빠방이 책을 읽고 싶다면 빠방이 책을 읽어 줄게
우리 아들은 이제 거의 15개월이 되었다. 세상을 향해 걸음마를 한 발짝 씩 하기 시작하며 새롭게 접하는 모든 것이 재미있고 신기한 시기다. 집안의 모든 물건에 다 손을 직접 대보고 싶어 하고, 엄마 아빠의 행동을 늘 유심히 지켜본다. 산책을 하다가 매미가 맴맴 우는 소리가 들리면 몸을 흔들며 춤을 추고, 개미를 만나면 쪼그리고 앉아 가리키며 한참을 관찰한다. 모든 것을 궁금해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된 아기를 위해 엄마 아빠는 이건 뭐고 저건 뭔지 설명해주느라 매일이 바쁘다. 그런 우리 아기의 최대 관심사는 바로 다름 아닌 '빠방'이다.
8개월이 될 무렵 '엄마', '아빠'를 차례대로 말했고 그다음으로 한 말은 '빠방'이었다. 12개월 때 자동차는 '빠방', 트럭과 포크레인은 '크으으~', 소방차와 구급차는 '부우~' 하며 나름대로의 언어를 정해 다양한 탈것을 부르기 시작했다. 13개월 즈음부터는 재우려고 함께 누웠을 때 '빵빵' 노래를 불러 달라고 했다. '반짝반짝 작은 별', '곰 세 마리' 등 일반적인 동요는 거부한다. 빵빵 노래를 부를 때까지 '빵빵!!!'을 외친다. 결국 '자동차 하나~ 버스 하나~ 트럭 하나~ 비행기 하나~' 등으로 새로운 노래를 작사, 작곡해 흥얼거려야 했다.
15개월을 며칠 남겨놓은 지금, 책도 그릇도 옷도 다 자동차다. 아침을 먹을 땐 자동차 그릇에 담아줘야 하고, 산책을 나갈 땐 자동차로 장식한 크록스 신발을 신어야 한다. 심지어 거북이 인형을 바퀴처럼 바닥에 굴리는 시늉을 하며 '빵빵~'하고 놀기도 한다. 딱히 자동차에 대한 노출을 더 많이 해준 것도 아닌데 참 신기한 일이다.
얼마 전 동네 어린이 서점에 책을 구경하러 갔을 때다. 서점 주인은 지금 월령에는 자연에 대한 전집을 구매해야 한다며 아기에게 다람쥐에 관한 책을 읽어주려고 했다. 아기는 듣는 둥 마는 둥 서점 내부를 둘러보다가 자동차가 표지에 그려진 책을 발견하고 '빠방!'을 외쳤다. 그러자 서점 주인은 그 자동차 책을 숨겨버렸다. 아마도 아기가 그 책에만 관심을 보이자 영업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걸까. 그러면서 내게 "자동차를 좋아한다고 자동차만 보여주면 뇌가 골고루 발달하지 못한다"며, "지금 월령대에 자연 전집을 보여 주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어린아이에게 책은 엄마 아빠와 유대를 쌓고 세상을 배워 나가는 재미있는 놀이도구다. 나는 초보 엄마고 전문가도 아니지만 무엇보다 아이가 재미있어하는 책을 읽어줘야 흥미를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월령 별로 읽어야만 하는 책"이란 대체 누가 정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과 타임라인을 쉴 새 없이 마주하고 그에 맞춰 살아오면서 극진한 피로감을 느껴왔다. 이제 갓 돌이 지난 아기에게도 그런 기준을 정해놓고 특정 책을 강요하다니, 피로하고 또 피로하다.
아기를 데리고 나오며 다짐했다. 아기가 자동차 책을 읽고 싶다고 하면 자동차 책을 읽어줄 것이라고. 자동차 장난감만 가지고 놀고 싶어 하면 그렇게 놔둘 거라고. 소꿉놀이를 하고 싶어 하면 주방놀이를 사 줄 거고, 인형 놀이에 관심을 가지면 역할극을 함께 해 줄 거다. 지금 우리 아기의 생각의 90% 이상은 자동차가 차지하고 있지만, 언젠가 산책할 때 다람쥐를 보고 관심을 보이게 된다면 다람쥐에 관한 책을 읽어줄 거다.
15개월 아기라도 관심사가 있고 취향이 있고 열정이 있다. 그것도 생각보다 뚜렷하게. 앞으로 살아갈 많은 날들 동안 좋아하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수천 번 바뀌겠지만, 그럴 때마다 응원해 주고 싶다. 언젠가 하고 싶지 않은 일도, 좋아하지 않는 일도 해야 하는 날이 오겠지만, 최대한 오랫동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취향 존중'하는 엄마가 되겠다는 초심, 잊지 않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