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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 Mar 31. 2021

지침이 찾아왔다

서서히 강해지다가 훅 나를 점령해버린 '지쳤다' 라는 느낌

회사로 가는 길 중간엔 오르막길이 있다.  이주 전 그날은 유난히 그 오르막길을 오르기가 힘겨웠다. 양 다리에 몇개의 모래주머니를 매달고 걸어 올라가는 느낌.  숨이 차고 발걸음이 무거웠다. 회사가 가까워 지면 질수록 가슴은 답답해져왔다. 절대 들어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억지로 끌려들어가는 그 기분. 머리도 무거워지고 몸이 가라앉았다. 


뒤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OO님- 괜찮아요?" 


다른 조직이지만, 협업을 자주 하는 팀의 팀장님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힘없이 인사했다. 

그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발걸음이 너무 힘이 없고 지쳐보여요. 괜찮아요?" 

"아 네... 좀 힘드네요. 지친거 같아요" 


그가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저 그 느낌 알아요. 그래서 작년에 한달 쉰거에요. OO님도 좀 쉬세요." 

갑자기 가슴속이 울컥했다.  "네... 그래야 할까요?"


그날 그 팀장님과 잠시 티타임을 하게 되었다.  격무에 치여 살았던 작년, 그는 심한 지침과 무기력증을 경험했다 했다. 누군가가 메신저로 자기 이름만 태그해도 멍해지고, 가슴이 답답해져왔으며 우울감이 자신을 짙게 지배했다고.  그런 느낌에 집에서도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와 제대로 시간을 보내지 못했고, 더이상 안되겠다 싶을때 한달 육아휴직을 쓰겠다 라고 상사에게 얘기했다 한다. 만약에 허락받지 못한다 하면 퇴사할 각오로 얘기한건데, 다행히 상사가 흔쾌히 예스라고 대답했고 그렇게 한달을 쉬게 되었다. 


"OO님은 항상 파이팅 넘치시고, 에너지 충만하신 분인데 그런 분이 이렇게 지치셨다니... 저처럼 좀 쉬어보세요. 솔직히 쉬고 돌아와도 그 휴식 에너지가 오래 가진 않아요. 우리 회사가 그렇잖아요... 그래도 한번 끊어주는건 필요한것 같아요" 그가 말했다. 


그가 얘기했던 것처럼, 나는 어떻게든 해 보려고 항상 파이팅을 짜냈던 사람이다. 누가 봐도 별로일것 같은 아이템 (하지만 목표는 항상 높음)을 받아 들었을 땐 어떻게든 해 보려고 전략을 짜고, 하기 싫어하는 팀원들을 어떻게서든 독려해서 끌어가고자 노력했다. 실행 과정에서는 하나도 놓치는것 없게끔 항상 신경이 곤두서있었으며 점검 또 점검했다. 윗분들이 요청하는 반복되는 보고.보고. 보고속에선 어떻게든 원하시는 내용을 보다 잘 담아내려고 생각을 거듭했으며 문서를 찍어내고 또 찍어냈다. 집에서도 일을 끊어내지 못하고 애들이 자고 난 이후에 항상 컴퓨터를 켰고, 주말에도 각종 지표를 확인하며 메신저로 대응했다.  윗분들은 그런 나에게 수고많다 고맙다고 하셨지만, 그보다 훨씬 쎈 강도로 더 많은것을 요구하셨다.  가끔 만족스럽지 않을때는 짜증을 쏟아냈다.  팀원들은 나를 가끔 대단하다며 추켜세웠지만 그보다 더 많이 나를 '힘든 사람' '쎈 사람' 으로 뒤에서 쑥덕였다. 


써 놓으니깐 뭔가 지독한 사람같다. 하지만 요즘 이런 상황을 처리해 나가야 하는 팀장들이 널리고 널렸다. 어떻게든 일이 '되게' 해야하는건데, 높은 목표를 달성하기 원하는 윗사람들과 회의감이 가득한 팀원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해 나가려면 중간 관리자들이 이 악물고 어떻게든 끌어 나가야 하는거다.   


여하튼, 이건 중간 관리자로서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으로 인지하고 지내왔고 가끔 힘들때면 '돈'이란 한 글자를 되새기며 버텨왔다. 그렇게 계속 잘 버틸 줄 알았는데,  몇주 전 그게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을 경험했다. 




정말 하기 싫은 프로젝트가 있었다. 벼르고 벼르던 연말 휴가 직전에 받게 된 프로젝트였는데, 작년 유난히 많은 프로젝트로 지친 우리팀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최악의 프로젝트로 다가왔다.  연말 휴가에 처리하려고 미뤄놓은 가정 대소사가 많았기에 난 휴가를 쓸 수 밖에 없었고, 팀원들도 미리 내 놨던 휴가를 가긴 했지만 마음은 불편의 극치였다.


휴가 복귀하자마자 마케팅 플랜을 빠르게 보고하라는 재촉을 받았고, 짜증과 회의감이 가득한 팀원들의 눈빛을 애써 무시하며 진도를 뺐다. 어떻게든 하긴 해야하는거 아닌가. 설상 가상으로 그 프로젝트는 자체의 가능성 대비 목표가 너무 높았고, 거기에 대한 얘기도 몇번이나 했지만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한두번 겪는 일은 아니기에 그 목표에 맞춰 플랜을 준비했고 실행안을 짰다. 항상 그랬듯이 열심히 점검하고 실행했다.  하지만 큰 차이가 하나 있었다. 나도 팀원들 못지 않게 짜증이 난 상태였기에 모든 과정 하나하나가 모래알을 씹는 기분으로 힘들었다. 그 어느때보다도 지치고 역했다.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예상했던 바였다. 윗분들의 짜증도 고스란히 밀려왔다. 예전 같았으면 네, 네, 네 했을그 분들의 감정적인 한마디 한마디가 유난히도 마음과 몸을 찔렀다. 그러던 와중 유달리 화가 많고 짜증이 많은 한 분이 짜증섞인 발언을 쏟아내던 하루, 갑자기 한순간에 버텨왔던 맘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 날 화장실에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때 생각했다. '나 좀 지치네....'    




항상 긴장 상태에서 지내왔던것 같다. 실시간으로 데이터가 쌓이고 온트랙/오프트랙에 대한 질문을 상시 받는다. 더 잘하려면 뭘 해야하는지, 못하는 경우는 왜 그런지, 대응방안은 무엇인지 수도 없이 요구가 쌓이고 해야할 일들이 쌓인다. 주말에도 가족과 제대로 시간을 즐기지 못하고 전화 및 메신저 대응을 하기 일쑤였다. 그러려니 했다. 이것이 내가 근무하고 있는 업계의 생리라고 당연하게 넘겼고 팀장이라면 마땅히 해야하는 일로 치부했다. 스트레스는 심했지만, 급한 일이 끝난 잠시 동안은 괜찮아졌다. 필요 이상으로 과하게 신경질을 내고 짜증을 쏟아내는 윗분들도 때론 힘들었지만, 이건 직장생활 하면서 당연한 과정이라 생각하며 삼키고 삼켰다.  그런 사이클이 계속 반복되었다. 


이러던 중 갑자기 와르르 무너짐을 경험한거다. 서서히 쌓아가던 지침의 정도는 나를 순식간에 압도했다. 피곤을 넘어선 몸과 마음의 지침이다. 아주 낯선 느낌이었다. 꽤 오래 해온 직장생활 속에서 많은 업앤다운이 있었고 그때마다 피곤함과 감정의 소진을 종종 느끼기도 했지만, 이번의 느낌은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을꺼라는 감이 왔다. 내가 생각보다 약해빠졌구나 라는 자책을 하기도 했지만, 인정할건 해야했다. 정말 지쳤다. 


오르막길을 힘들게 오르던 그 날, 직속상사와 면담을 신청했다. 내 지금 상태를 솔직히 공유했고 일주일의 휴가를 요청했다. 




지금 그 일주일의 휴가의 중간에 와있다. 가끔 휴가를 쓸때마다 항상 메신저를 체크하고 팀원들과 타 부서의 요청에 응답하긴 했지만 이번은 알람을 꺼버렸다. 메일도 체크하지 않고 있다. '나 답지 않은 행동'이다. 


고작 일주일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만약 지침의 느낌이 나를 계속 지배한다면, 이후에도 멍하니 책상에 앉아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낯선 나를 발견하는 순간이 지속된다면 잠시 쉬어가는 기회를 만들어야 하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여하튼 나 답지 않은 행동을 하고 있는 이 순간, 내가 있던 항상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던 세계에서 한발짝 떨어져 있는 이 순간, 난 모처럼만에 가슴이 답답하지 않다. 


하지만, 아직 자신이 없다. 

회사에 돌아가서 예전의 다시 화이팅하고 일할 수 있을까 라는 물음에 강하게 예스라고 말할수가 없다. 과연 내가 그럴수 있을까? 고작 일주일이, 나의 지침을 해결할 수 있을까?  


남은 며칠, 지친 나를 조금 더 다독여주자. 

다음 주 오르막길에 오르는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워지길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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