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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urel Mar 29. 2024

수시러의 12월

그리고 1월

12월 15일. 


드디어 최종 합격자 발표가 났다. 그전까지 아이는 딱히 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렇게 좋아하는 책도 못 읽는 상태로 하루하루 초조하게 그날만을 기다렸다. 이미 발표를 한 고대 계적이 합격이라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아이가 가고 싶은 대학은 고대가 아니었다.   

   

체감상 하루가 한달같은 시간이었다. 집안은 고요했고 아무도 우리를 건드릴 수 없었다. 전쟁이 아니고서야 감히 고3 아이와 엄마를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마치 12년 동안 이날만을 기다린 사람들처럼 숨죽이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결과는 합격이었다.      


얼마나 기뻐했는지 사실 지금은 기억이 안 난다. 이제 겨우 세 달이 지났을 뿐인데도.


다만 내 기억엔 외대부고에 들어갔을 때가 더 눈물이 났던 거 같다. 그때는 아이와 껴안고 정말 엉엉 울었었다. 아이가 가고 싶은 고등학교를 위해 이사를 결정하고 집을 알아보고 특히 이사를 반대하는 남편 때문에 그 합격이 더욱더 감격스러웠다. 내가 이긴 기분이랄까. 아이학교 때문에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남편의 친구들이 정말 미웠고 가서 잘 지내라고 인사해 주는 내 친구들에게 고마웠다.      


그렇게 아이는 서울대에 들어갔다. 그리고 남편이 아프기 시작했다. 아이가 합격하자마자 아픈 건 아니었고 슬금슬금 아팠는데 티를 못 낸 건지 모르겠다. 결혼 후 20년 내내 아팠던 사람이지만 이번엔 자다가 가끔 숨이 막힌다고 했고 다리는 점점 부어올라 두 배가 되었다. 중간중간 병원에 가라고 얘기해도 고집스럽게 안 가더니 12월 29일 작은 애 졸업식을 하루 앞두고 응급실을 자기 발로 찾아갔다. 그리고 입원. 연이어 투석. 그렇게 2024년 1월 1일은 남편 병문안으로 시작되었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이의 합격발표를 기다리느라 병원에도 안 가고 병세를 악화시킨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대학에 합격하고도 아픈 아빠 때문에 마음껏 그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아이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재수를 시작하기 전에 매일매일 술을 마신다는 친구들 이야기에 너도 나가서 놀라고 해도 나가지도 않고 다이어트해야 한다며 짜증만 냈다. 1차 목표가 40Kg, 2차 목표 몸무게가 30Kg이라니! 그건 아마 내 초등학교 1학년때 몸무게 같은데... 세상에. 달라도 이렇게 다른 딸이 어디서 나온 걸까. 아이는 하루에 한 끼를 먹으면서 운동만 했다. 크라브마가도 등록하고 집에선 무슨 스트레칭을 세 시간 네 시간씩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와중에도 이제 아이를 독립시킬 수 있다는 기쁨에 웃음이 실실 나왔다. 두리뭉실하게 생겼어도 예민하기만 한 나와 꼼꼼하고 예민한 남편을 똑 닮아서 예민 그자체인 큰아이는 같이 살 팔자가 아니다. 그건 사주 보는 아저씨도 관상 보는 아저씨도 공감해 주셨다. 그래서 합격발표가 나자마자 원룸을 구하러 다녔다. 뭐 애초에 먹는 건 관심 없는 아이니 엄마밥 먹고 싶다고 집에 붙어있지도 않을 거고 처음부터 대학에 붙으면 학교 근처로 자취를 시켜 주겠다 약속했었다. 다 큰 딸이라 걱정된다는 남편의 말은 싹 무시하고 백 군데도 넘게 온라인으로 알아보고 적당한 매물을 내놓은 부동산과 약속을 잡았다.     

 

아이의 조건은 온통 다 하얀 집이었다. 특히!! 방바닥이 하얀색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누르스름한 장판이 너무 싫단다. 나중에 부동산 총각과 아이가 톡 한 걸 보니 그거 말고도 꽤나 깐깐하고 자세하게도 요구가 많다. 아이의 요구사항을 다 들은 부동산총각은 고르고 골라 우리에게 4군데의 원룸을 보여주었고 아이 마음에 쏙 드는 언덕 위의 하얀 집 같은 신축 원룸을 계약해서 아예 일찌감치 이사를 했다.      


어차피 아빠는 맨날 아픈 사람이고 집에서 짜증만 낼 거면 1월부터 있는 학교행사에 가는 게 좋겠다고 둘이 합의를 봤다. 그렇게 아이의 두 집 살림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대학교에는 새내기를 위한 신입생 환영회, 신입생 OT, 새내기 대학이 줄 줄이었다. 거기다가 대학을 가든 재수를 하든 지금까지 공부하느라 바빴던 고등학교 친구들과 하루에 한 명씩 만나도 한 달이 모자랐다. 학교에 가는 날은 미리 서울에 가서 새로운 집에서 자고 학교행사가 없는 날에는 홍대랑 성수에서 친구들도 만나고 주말엔 집에 오게 되었다.      


그러자 집안에 평화가 찾아왔다. 겨울 방학 두 달 동안 이제 중학생이 되는 작은 아이 공부습관을 잡을 참이었는데 큰아이가 시끄럽다고 할까 봐 혼내지도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보는 상황에서 해방된 것이다.    

 

나의 행복은 양팔저울 같아서 남편의 건강 악화로 한쪽이 내려간 걸 아이의 대학합격으로 균형을 잡았다. 비록 그 크기가 똑같지는 않아서 매일 하루에도 수십 번 흔들리고 있지만 그나마 아예 한쪽으로만 완전히 기울어지지는 않아서 견딜만하다. 오히려 투석을 시작한 남편이 전보다 활기차져서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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