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과 공부의 상관관계
4살 때 중국어 학습지를 했다. 배우는 것을 좋아했고 집에서 너무 심심해해서 시작했는데 그냥 일주일에 한 번씩 오는 예쁜 선생님이 좋았는지 곧잘 따라 해서 하다 보니 2년 정도하고 6살 때 언니오빠들이 중국어시험 보는데 견학을 갔더니 센터장님이 중국어 신동이라는 말씀도 하셨다.
영어도 그랬다. 영어에 한 맺힌 엄마가 일주일에 한 번씩 프뢰벨 선생님을 불러서 마더구스라든가 영어동화라든가 전혀 공부랑은 상관없을 것 같은 일에 돈을 썼지만 그렇다고 아이가 일상생활에서 영어로 대화를 한다든가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일단은 매일매일 하는 독박육아가 힘들어서 선생님 오시는 잠깐이라도 쉬고 싶었고 가랑비에 옷 젖듯이 영어라는 언어에 익숙해지길 바랐을 뿐이었다.
큰맘 먹고 보낸 영어유치원은 몇 달 못 가서 자의 반 타의 반 그만두고 같이 놀러나 다니자 싶어 광화문에 있는 캐나다문화원에 일주일에 두 번씩 다닐 땐 정말 그 한 시간을 위해서 차를 두 번씩 갈아타고 왕복 4시간씩 걸리는 일이었으나 그 시절 나의 유일한 친구인 아이와 함께 피자도 먹고 삼계탕도 먹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 나서 초등학교에 들어가니 3학년 때 영어특성화반이 있다길래 영어면접 대비 필리핀 화상영어를 시작했다. 선생님 질문에 Yes, No는 해야되지 않나 싶어서. 1학년때부터 매일 20분씩 1년 반동안. 이렇게 나열하고 보니 뭘 되게 열심히 많이도 시켰구나 싶다. 그래도 전부 재미있어하고 잠깐씩 쉰 적은 있지만 부지런했구나 우리 딸. (지금 6학년인 아들과 자꾸 비교가 된다)
어느 날 영어특성화반을 다녀와서 아이가 자기도 영어학원을 다녀야겠다고 이야기했다. 학원에 굳이 가야 할까 싶었지만 특성화반에서 영어학원을 안 다니는 사람은 자기뿐이라는 말에 3학년 겨울방학부터 영어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워낙 어릴 때부터 다닌 친구들이 많아서 처음엔 친구들보다 낮은 레벨이었지만 꾸준히 열심히 하니까 금방 레벨은 같아졌고 5학년때 5주 동안 미국여행을 다녀온 후에는 레벨이 3단계가 올라서 바로 고등반으로 들어갔을 땐 학원원장님도 놀라셨다.
“그 애랑 같은 반 되고 싶어서 열심히 한 거야”
4살 때부터 짝사랑하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같은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였다. 그러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해마다 짝사랑하는 아이가 바뀌었다. 심지어 잠깐 미국 갔을 때도 좋아하는 금발머리 남자아이 있었다. 이렇게 보니 정말 사랑꾼이네?
자기가 다니고 싶다고 하는 영어학원이었고 그러니 당연히 열심히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저학년부터 다니던 학원이라 지금 막 들어간 우리 아이보다 더 높은 레벨이었나 보다. 그러니 그 아이와 같은 반이 되려면 더 열심히 하는 수밖에. 그렇게 열심히 하더니 결국 같은 반이 되었고 고등반에 들어가니 그 아이보다 높은 레벨이 되어 버렸다. 그즈음 아이는 일주일에 세 번 학원 가고 디베이트 숙제까지 하려니 매일 12시 넘어 자는 게 일상이 되었다. (키크라고 매일 10시면 재우던 아인데.. 고3인 지금도 키가 겨우 150이 넘는 아이라 나에겐 언제나 풀지 못한 숙제같다) 학원은 일주일에 세 번인데 일주일 내내 다른 공부를 할 시간도, 놀 시간도 없었다. 이건 아닌 것 같아 영어학원을 그만두었었다.
며칠 전 그때일을 이야기하다가 아이가 지나가는 말처럼 그 애랑 같은 반이 되고 싶어서 영어학원을 열심히 다닌 거라고 했다. 그 영어학원도 그 아이가 다니고 있어서 애초에 간 거고. 중간중간 아이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어떤 아이가 우리 아이에게 고백을 했는지 전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항상 먼저 하는 일이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하고 들어주는 게 일과였으니까. 그래서 나는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까지 듣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십 년이 지난 후에 알게 되다니!
나중에는 그 아이보다 더 높은 레벨이 되어서 재미가 없어 학원을 그만뒀다는 아이에게 나는 배신감을 느꼈다. 나는 너 잘되라고 그렇게... 그렇게... 이것저것 알아보며 뛰어다녔는데 그 많은 수고들이 다 너의 짝사랑 때문이었다니. 그래... 그렇게라도 결과가 좋으니 됐다 싶으면서도 그동안 내가 들인 에너지와 시간과...
인생이 허무하다. 검은 머리 짐승은 믿는 거 아니라더니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