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07. 20 그 여름 (올레 20코스 )

올레 20코스는 이 맛이다.

by 병욱이



오늘은 밥 먹었다.

마트에서 파는 하얀 쌀밥과 인스턴트 카레일 뿐이지만 오늘만큼은 아침밥을 먹었다. 무얼 먹던 먹는 게 중요한 것보다 무얼 먹느냐가 중요하다지만 때론 먹었다는 것에 큰 위로가 되는 아침이다. 하늘은 늘 그랬던 것 같다. 먹구름을 잔뜩 머금었다. 비가 내릴까. 설레발 걱정이 앞서 편의점에 파는 투명우산을 챙겨 나왔다. 비가 내릴 땐 우산으로, 위험한 들개가 보일 땐 호신용으로 일석이조로 쓰일 조력자가 생겼다. 든든한 조력자 덕에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출발지는 평대리 마을. 올레 20코스를 걷기 위해 버스에서 내렸다. 20코스의 거리는 17.6km로 5~6시간이 소요될 거라는 안내서의 내용에 따라 늦은 출발에 마음이 급해졌다. 고사성어 중에 “우직지계”,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예를 들어 명절에 고향을 내려갈 때 직진의 고속도로를 타는 것보다는 오히려 돌아가지만, 교통량이 한가한 국도를 타는 것이 빠를 수 있다. 올레 20코스가 처음이 아닌 나에게는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운 일이다. 걷는 동안 풍경에 젖어 들기로 했다. 제주 동쪽은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서쪽 동네와 비교했을 때 더 많은 옛 제주의 모습이 남겨져 있다. 그 향기가 곧 나를 끌어당겼다. 첫 디딤의 그 마음은 늘 설렌다.


구좌읍 평대리


평대리는 여느 동네와 같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알록달록한 집이 있고 돌담길이 늘어져 있다. 마을 중심에서 만나는 팽나무의 늠름함은 여행객에 있어 유명 스타이다. 바람과 부딪쳐 바람결을 따라 자라난 팽나무는 그지없는 조각품이다. 이렇게 생각보다 더 괜찮은 모습을 만나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해진다. 사람의 눈이란 것이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비슷할 것이라 여겨졌다. 집들로 골목길이 빼곡히 들어선 것도 아니다. 커피 향이 풍기나 싶으면 어디선가 팔딱팔딱 뛰어오를 것 같은 횟집도 눈에 띈다.

특히 평대리에서 맛보는 당근 주스가 최고다. 우도에 땅콩이 있듯 평대리엔 당근이 유명하기 때문이다. 그럼 평대리 상점은 제주 주민일까? 아니겠지. 아마 서울이나 부산, 대구 어디쯤에서 내려와 장사를 하는 걸 거야. 단정적으로 나만의 결론을 내렸다. 입속의 달콤한 기억의 장난은 끝이 없다. 그러나 아직은 맛보기에 불과하다. 여기가 유혹의 시작점이다.


조용한 골목길을 빠져나와 평대리 해수욕장에 다다랐다. 월정리, 협재 해수욕장이 다이아몬드라면 평대리의 해수욕장은 깊은 계곡물에서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되어 생겨난 수정이었다. 소박하면서 깊고 아담한 바다가 마음을 더 포근히 감싼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엄마의 아늑하고 포근한 품이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던 나에게 바다가 질문을 던졌다. “난 당신에게 무엇을 주나요?” 뭘까? SNS Facebook 친구에게 물었다. “바다가 주는 건 뭘까요?” 돌아온 대답은 이러했다. “바다한테 해주는 것도 없는데 바라면 안 된다.” “바다한테 주시오. 평화로움을” “회” 등의 댓글이 달렸다. 그중에 하나의 댓글처럼 나도 평화로움을 주고 싶다. 평화는 내가 서 있는 곳 자체였지만 그것을 내버려 두지 못하고 못살게 구는 게 나였다.


여기는 한동리


다시 꼬불꼬불 마을 골목길을 돌다 보면 발길은 또 하나의 멋진 광경에 사로잡혀 있다. 도화지 위에 옮겨 놓은 수채화 같은 마을에 넋을 빼앗겼다. 이렇게 예쁠 수 있을까 황당함마저 든다. 멍한 나를 깨우듯 담벼락 넘어 “왈 왈왈” 짖는 개의 울부짖음은 심장을 깜짝 놀라게 했다. 겁쟁이가 왔다는 냄새라도 맡은 걸까. 돌담 너머로 얼굴을 쓱~ 들어 올렸다. 당당한 울음소리는 사라지고 꼬리를 가랑이 사이로 넣은 채 위축되어 보이는 개. “하하하~” 내가 너보다 더 강했던가?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나를 보며 슬금슬금 어깨를 움츠리며 숨는다. 우습게도 움츠린 개와 다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간 나. 뻣뻣해진 어깨에 근육통이 경직이 일렀다. 이제 내가 가진 힘을 모든 개에게 보여주는 일만 남았다. ‘딱 기다리고 있어라’ 그때 손에 쥐고 있던 우산이 돌담에 부딪혀 달그락달그락 소리였다. 우산 때문에? 그런 건 아닐 것이라 믿는다. 올레 20코스의 6개의 마을 중 두 번째. 부실한 아침이었지만 어느 정도 배는 채웠다고 생각했다. 배가 이렇게 쉽게 꺼질 리가 없다. 곰곰이 의문점에 대한 생각을 가졌다. 고심 끝에 생각난 원인은 아무 생각 없이 내렸던 버스가 문제였다. 정신이 나간사이 내린 정류장은 도착 장소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버스를 타야 했고 기다림은 지쳐만 갔다. 아직 가야 할 길은 10km 이상이 남았다. 앞이 깜깜해져 왔다.




홀로 남겨진 오솔길


구름에 가려진 태양은 뜨겁지 않다. 오후를 넘어 달궈진 땅바닥에서 올라오는 습도가 문제다. 끈적이는 땀이 온몸을 찌뿌둥하게 만든다. 조금 조금씩 뱉어내던 내 몸의 수분이 마르자 목이 타들어 갔다. 무엇이든 나오는 도라에몽의 주머니가 아닌 만능 가방을 다시 뒤졌다. 다행히 배 속을 채울 빵과 물이 나뒹굴었다. 평대리 해수욕장 맞은편 편의점에서 샀던 비상식량이었다. 신의 한 수였다. 목마름에 서둘러 물을 벌컥벌컥 마셨지만 뭔가 조금 아쉬웠다. 허기에 지쳐 쓰러져 가던 나의 배꼽시계였다. 아끼고 아껴 먹으려던 최애 단팥 크림빵을 꺼냈다. 한입 딱 베어 먹는 순간 기절초풍. 부드럽고 달콤한 빵이 나의 입술에 키스를 들이댔다. 으음 딱 좋은 장소를 골랐다.


철갑을 두른 소나무가 단단한 벽을 만들었고 밭이 빼곡한 오솔길. 달콤한 빵에 녹아버린 난 힘이 불끈 솟았지만, 심장의 두근거림은 두려움을 감지했다. 뭔가 불쑥 나타날 것 같은 어둡고 불길한 징조가 서서히 다가왔다. 뉴스에서 한참 조명되었던 들개의 무리였다. “들개 6마리가 3개월 된 송아지 4마리를 물어 죽였다.” “주택가 마당을 침입한 들개가 집주인은 물었다.” 살 떨리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다. 이토록 들개의 횡포는 제주에 있어서 큰 이슈였다. 나에게 그런 일이 생길까.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며 주위를 살폈다. 생각 외로 평온한 길가엔 들꽃이 올망졸망 피었고, 신선한 공기가 코를 타고 허파까지 내려왔다. 찌뿌둥한 열기와 두려움은 사그라들고 뜀박질하던 심장은 안정을 되찾았다.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정말 아무도 없다. 내 세상이나 다름없다. 길바닥에 철퍼덕 앉아 핏줄을 세워가며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렀다. 지저귀는 새들의 노랫소리에 맞춰 몸치인 몸을 마구 흔들며 춤도 췄다. 정신없이 놀았더니 불안한 마음은 곧 편안함을 안겨 왔다. 온몸이 데워져 푹푹 찐 고구마가 되었다. 폭삭 익어버렸다. 더위에 빨가벗고 자연인이 되어 날뛰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벌레가 너무 많다. 특히 피를 빠는 흡혈귀 모기가. 벌레가 사라질 그 날, 겨울을 기약했다. 두려움은 재미로, 재미는 춤으로 정신없이 빠져나온 오솔길은 끝이 나고 4번째 마을 행원리가 보인다.


행원리에서 김녕까지


많은 일이 벌어진 오솔길에 힘들였을 심장을 달랬고, 처음 만난 이름 모를 노란 꽃이 환영의 인사를 해왔다. 여기까지 와서 고생했다며 마음을 복 돋아준다. 꼬닥꼬닥 걷는 마을 길 사이에 돌담이 수를 놓는다. 입이 쩍 벌어지는 광경이다. 행원리는 지나온 평대리, 한동리 등의 마을과 색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오솔길에서 만났던 좌가연대와 같이 역사가 머물고 있다. 조선 15대 왕 광해군 기착비가 유일무이하게 흔적을 말했다. ‘왕의 역사다’ 광해군의 나이 67세. 유배 생활 4년 4개월 만에 생을 마감했지만, 왕이 발을 붙였던 곳, 그 기운이 지금 막 발끝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왔다. 왠지 모를 슬픔과 함께 그 자리에 섰다는 기쁨이 마음을 두드렸다. 왕은 처음 도착한 마을에서 무엇을 했을까? 어떤 마음이었을까? 마을안으로 들어갔다. 왕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팽나무 아래 할망들의 수다 소리가 정겹게 다가왔다. 무슨 이야기를 저리도 재밌게 나눌까 궁금했다. 딴청을 피우며 귀가 향한 곳은 끊이지 않는 수다. 귀를 쫑긋세워 살짝 들으려고 했지만,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기만 흘렀다. 3년이 넘은 제주 생활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광해군 얘기를 한 건 아닐 것이다. 궁금증만 가득 안고 정다운 마을을 떠나 월정리 바닷가로 향했다.


넓은 모래사장과 바다 빛깔이 너무 예뻐 사람의 혼을 뺏어 간다는 월정리.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팍팍했던 일상과 무료한 일상을 씻겨갈 에메랄드 파도의 잔잔한 음악이 흘렀다. 월정리에서 김녕까지 이어진 해안도로는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하다. B2B의 육성재가 한 번 거쳐 갔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환상의 바다는 언제나 주인공이 된다. 엄마, 아빠와 바다로 뛰어드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행복했고, 모래사장을 식탁 삼아 싸 온 음식을 꺼내어 소풍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월정리의 긴 입맞춤은 팍팍한 콘크리트의 무거운 삶의 껍질을 벗겨냈다. 내 마음을 쏙 뺏어간 바다에 빠져 까무잡잡한 돌과 더 센 바람이 피부로 스며든다. 불어오는 바람에 각이 잡히는 머릿결, 짭조름한 소금은 나의 헤어 디자이너. 작은 수풀 길을 걷고 해안 길을 달리면 어느새 풍차가 뱅글뱅글 바람을 잡는 김녕까지의 일상을 맛본다. 나와 만나기로 약속된 태흠이는 오지 않는다. 됐다 됐어! 언젠가 연인과 혼디 바라볼 20코스를 기억에 저장 완료다.

4시간의 사투가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