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 18코스
2020. 07. 25 장난 같은 하루
언제나 달콤한 거짓말로 나를 구슬리던 기상청, 오늘도 역시 나를 괴롭혔다. 2시부터 비가 내린다는 예보에 우산을 챙겼다. 밖을 나오는 순간 축축한 습도가 몸을 감쌌고 정말 비가 올 듯 먹구름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당장 빗방울이 떨어져도 이상할 게 없는 하루다.
올레 18코스는 제주 시내를 돌고 동문시장을 지나 오름을 오르고 마을을 지나 꼬닥꼬닥 들과 바다를 가로질러 조천만세동산까지이다. 거리는 19.6km로 생각과 다르게 짧은 거리는 아니다. 느영나영 걷다가는 해가 넘어가고 흡혈귀 모기에게 밥이 되는 밤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동문시장 맞은편 산지천부터 시작이다. 우선 구름 사이로 가끔 얼굴을 내밀며 자외선을 톡톡 쏘는 태양을 피해야 했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챙겨 나온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고 목을 수건으로 감싸려 주머니를 뒤졌다. 가방을 뒤집어 까며 훑었지만, 손에 잡힌 거라곤 선크림뿐이었다. 이럴 수는 없다. 가지런히 챙겨놓고 잊어먹다니 젊은 나이에 건망증이 찾아온 것일까. 하루를 어떻게 버텨야 할지 시작 전부터 걱정이 태산이다.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했다. 자외선 차단제를 손바닥 위에 듬뿍 짠다. 이마를 내려와 광대뼈와 눈 주위를 바른다. 다음으로 팔자주름이 있는 입가와 목을 씻듯 목 주위를 싹 휘감았다. 작은 손거울로 시커멓게 탄 목 부위뿐 아니라 얼굴에 밀가루를 씐 듯한 우스꽝스러운 한 명의 광대가 비췄다. 비록 목을 감을 손수건은 없지만, 태양의 피할 만분의 1의 안심이 생겼고, 얼굴엔 나도 모를 웃음과 생기가 돋았다. 준비 하나만으로 반은 걸은 것이나 다름없다. 35m 앞 배낭을 멘 아저씨가 의자에서 일어선다. 배낭에 아웃도어 바지, 모자 그리고 신발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난 길을 걸을 사람”이란 수식어가 이마에 딱 쓰여 있다. 단번에 올레길을 걸을 걸 확신했다. 혼자 걷게 될까. 마음이 노심초사였는데 뒤를 졸졸 따라가다 보면 심심하지도 않고 재미난 일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제주여객터미널을 가기 전 건입동. 눈앞에 비췬 계단을 올라 낮은 언덕을 하나 넘는다. 그럼 다시 마을. 귀엽지도 동화처럼 익살스럽지 않은 골목길 벽화를 만난다. 그냥 제주 그 자체다. 뭉클한 무엇이 심장을 파고들었다. “윽~ 이건 도대체 뭐야” 뜨거운 무언가 심쿵하게 가슴을 울린다. 심장은 쉼 없이 날뛰고 흥분을 고조시켰다. 터질 듯한 심장을 부여잡고 벽화 거리를 마음에 담은 채 벗어났다. 골목길을 빠져나오니 열기를 가득 머금은 4차선 아스팔트 도로가 나타났다. 자동차가 휭~ 지날 때마다 후 텁텁한 공기가 몸을 훑었다. 푹푹 찌는 공기는 입가를 바싹 마르게 달구었다. 몸은 열기가 달아오르고 답답해졌다. 답답한 공기가 턱까지 찼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제주항 부두에 정착된 큰 배와 바다가 내려다보였다. 마음이 뻥 뚫렸고 잔잔한 푸른 바다는 거친 쉼에 위안을 심어줬다. 그렇게 쉼 없이 빠져든 심장은 얼마 가지 않아 두 개의 오름 중 첫 번째 사라봉을 마주했다. 그 말인즉슨 천국을 맛볼 계단의 고난이 시작된다는 소리였다. 오름이라면 편안함을 추구하기 위해 많은 계단을 설치했기 때문이다. 산지천에서 마주한 아저씨와 난 앞을 다퉈 엎치락뒤치락하며 추격전을 벌였다. 처음부터 결과는 예고되었다. 아저씨는 사라봉 입구에 다다르자 나를 앞질러 나갔다. 앞서든 뒤서든 놓치고 싶지 않은 장면을 담기 위해 난 카메라 셔터를 누를 뿐. 현재의 나에겐 그 무엇도 들리지 않았다. 셔터만 누른 난 무엇을 잘못 본 걸 아닐까. 셔터를 한 번, 두 번 누른 것뿐인데 아저씨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가파른 계단 길을 평지처럼 오른다. 아저씨는 백만 돌이 에너자이저인가? 아니면 미래에서 온 터미네이터라도 되는 걸까? 숨도 쉬지 않고 오르는 것이 로봇 같았다. 아저씨와 반대로 나의 심장은 헉헉대며 인간미 넘치는 비명을 질렀다. 사라봉 산책길은 나무로 우거져 그늘이 졌지만 바람이 막혔다. 땀은 벌써 얼굴을 타고 줄줄 흘러 최고조에 도달해 정점을 찍었다. 초반부터 샤워라니 태양을 피해 보려고 덕지덕지 발랐던 선크림마저 무용지물이다. 그렇게 헐떡이는 심장을 부여잡고 사라봉 정상에 다다르니 반가운 전망대의 정자가 눈에 들어왔다. 주변은 사람들이 북적였고 더운 날씨임에도 운동을 하느라 바빴다. 로봇 같은 아저씨를 쫓아가기엔 힘이 모자랐다. 그냥 여기까지 마무리를 짓고 포기를 해야 할까. 0.5W의 전력으로 터미네이터 에너자이저를 따라가기에 너무 벅찼다.
사라봉을 내려와 별도봉을 오르는 능선 굴곡 사이의 쉼터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더위를 피해 그늘은 찾아온 낭인들이다. 북적거리는 그림자가 시원한 바람을 탁하고 막아선 느낌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문제는 이마를 타고 내려온 땀이다. 눈은 껌벅껌벅 땀은 눈으로 흘러 눈동자를 괴롭혔다. 주의를 돌아볼 정신조차 없다. 이마를 닦고 닦아도 장맛비에 터진 댐이 홍수를 낸 듯 땀 물은 그치지 않고 눈을 덮쳤다. 따끔거리는 눈에 별도봉 정상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어떡해야 할지 가던 걸음이 주춤거렸다. 그걸 알 리 없는 하늘의 먹구름은 온데간데없고 땡볕은 울창한 나뭇잎 사이로 내려앉았다. 만나서는 안 될 태양이 얄미운 민낯을 드러냈다. 다행이랄까? 구름 대신 뜨거운 태양이 나왔다고 봐준 걸까? 두 개의 리본은 정상이 아닌 방향을 가리켰다. 별도봉길 정상이 아닌 둘레길이다. 그걸 바라 본 나의 입술에는 미소가 빙그레 그려졌다.
그림자를 엇갈러 가며 사라봉을 내려왔던 아저씨가 화장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포착. 기다려야 할까! 말까? 같이 걸으면 위험요소도 줄고 사진을 찍는 것에 있어 좋은 조력자가 되어준다는 장점이 있기에 기다려보기로 맘을 먹었다. 금방 나올 줄 알았다. 천천히 더욱 천천히 한발 한발 걸음을 떼며 기다렸다. 시계를 쳐다보니 벌써 20분이 지났다. 올레길이 걷는 게 아닌였나? 옆길로 빠졌나? 이도 저도 아니면 변비에 걸려서 아직도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 힘을 주는 중일까. 얼토당토않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렇게 맛있는 재미가 사라지는 걸까? 다시 외톨이가 될까. 쓸쓸함이 밀려왔다. ‘인생은 혼자 가는 것이다.’라는 아는 형의 말이 생각났다. 인생은 때론 혼자라지만 무리 지어 살아가는 늑대와 같다. 혼자는 심심한데... 머리가 멍해져 왔다. 풍경은 아름다웠고 공기도 맑았지만, 점점 지쳐만 갔다. 왕눈은 실눈이 되어 쪼그라들고 어깨는 허리선까지 축내려 왔다. 그런 나에게 푸른 나무가 눈앞에 펼쳐졌고 바다의 짠 내음이 코끝을 핥았다. 꼬불꼬불 별도봉의 둘레길은 여느 길보다 환상 속으로 나를 이끌었다. 멋짐이 폭발했다. 그러나 걷지 않는 이들에게는 얼굴을 보여줄 리가 없다. 눈앞에 애기업은 바위가 자태를 뽐냈다.
덩굴 옷을 입은 ‘애기 업은 돌’을 지나 어느새 별도봉의 둘레길을 빠져나왔다. 잃어버린 곤을동 마을의 터가 있는 곳. 무성하게 자란 잡초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아픔을 가리려는 잡초의 위로일까? 제주 4.3의 흔적이 슬픔이 남아 있는 곳.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파도마저 구슬픈 노래를 흥얼거려 왔다. 슬픔도 잠시 여기서부터 바다와 마주하며 뻥 뚫린 바다와 마주하며 걷는다. 바다는 뜨거운 그림을 펼친다. 먹구름이 사라진 자리에 뭉게구름이 자리를 트고, 출렁이는 파도를 타고 고깃배 한 척이 바삐 어디론가 달렸다. 선장님의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오늘은 고기를 한가득 잡아 오매” 한참을 걸어 도착한 화북포구. 동네 아저씨와 할아버지의 우렁찬 목소리가 바람은 타고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도여, 아니 모라니까” 윷놀이를 하는 모양새다. 그런데 윷가락을 찾을 수 없다. 작은 종지 그릇에 손가락 마디 크기의 뭔가를 담고 빙빙 돌리더니 던졌다. 제주에서는 넋 동배기라고 부르는 윷놀이로 이제까지 볼 수 없던 윷가락이다. 윷놀이하던 어르신이 나에게 말을 건넸다. “사진 찍으면 안 돼요.” ‘으하하’ 이럴 수가 따뜻한 말을 할 줄 알았다. 뻘쭘하다. “육지에서는 설 명절에 볼 수 없는 모습이라 그랬습니다.” 추격하다 놓쳐버린 아저씨를 다시 마주했다. 오메 여기 있는 걸 몰랐다. 옆에서 나와 똑같은 자세로 목을 쭉 뺀 채로 윷놀이 구경에 푹 빠져있다. 아저씨 또한 제주 윷놀이가 신기했을 것이다. 서로 눈인사만 나눴을 뿐 처음부터 엎치락뒤치락 추격전이다. 복면을 쓴 아저씨는 첫 만남부터 도망자였고 나는 그 뒤를 쫓는 추격자였다. 쫓기 전에 먼저 길을 나서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