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 18코스
화북포구 방파제를 넘어서 유독 귀에 거슬리는 아이들의 괴성이 귀를 잡아당겼다. 마을마다 있는 작은 용천수로 물놀이장이었다. 뜨거운 열기에 지친 아이들이 엄마의 손을 잡고 물가로 나온 것이다. 점프하지 말라고 써 놓은 안내문을 무시하는 듯 뛰어든다. 다행히 얌전히 튜브를 타는 녀석도 있다. 귀여움에 카메라를 들이댄 나를 향해 “야야 사진 찍는다. 빨리해” 뭘 보여줄 건가. 기다렸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고 시간만 흘러갔다. 햇볕 아래 서 있던 난 더위에 지쳐서 태양에 지글지글 익혔다. 아이들의 달콤한 농이었을까. 무반응은 시간에 쫓긴 나를 올레길로 다시 돌렸다. 꼬마들에게 한 방 맞은 씁쓸한 이 맛은 뭘까?
화북일동 일대를 돌고 짧은 밭담 길을 빠져나왔더니 다시 검은 아스팔트가 열기를 뿜으며 기다렸다. 난감하게 펄펄 끓는 태양으로부터 피할 방법이 없다. 도로 옆을 차지한 잔잔한 바다의 수평선은 그나마 나의 원동력이 되어줬다. 철썩이는 파도를 타고 시원한 바다 위를 달리고 싶은 한순간의 꿈이 생겼지만, 현실은 온몸이 땀범벅. 내가 살 길은 올레 18코스의 중간지점 검은 설탕을 뿌려놓은 삼양 해수욕장뿐이다. 근데 저건 뭘까? 서핑 보드는 아니다. 그렇다고 배도 아니다. 서핑보드를 닮긴 했지만, 노를 저으며 앞으로 움직였다. 지나가던 아저씨를 무턱대고 잡아 물었다. “저건 뭐예요. 서핑 보드 같은데...”, “서핑보드는 맞는데, 노를 젓고 가는 것이라 패들보드라고 해요.” 보드는 다 같은 것으로 생각했는데. 파도가 시원찮아도 노를 저어 탈 수 있는 매력이 마음에 쏙 들었다. 다음에 도전하기로 메모장에 기록했다. 제주에는 이처럼 서핑하기 좋은 바다가 많다. 매력적인 월정리, 김녕, 종달리 등을 들 수 있다. 그걸 바라보는 난 왜 이리 더운 거야? 당장이라도 바다로 뛰어들고 싶은 욕구가 복받쳤다. 그렇게 더위에 쩔어 있는 사이 꼬리를 잡혔던 아저씨가 나를 지나쳐갔다. 어느새 추격의 발판이 또 만들어졌다. 몸 구석구석 아드레날린이 분비됐고 곧 뒤를 따랐다. 얼마 안 가서 “앗싸~ 잡았다 잡았어!” 아니다 검은 모래 해수욕장이 코앞이었지만 움직일 미동조차 없다. 단단한 돌조각이 되어버렸다. 마을에서 운영하는 해수탕인 “삼양감수탕” 앞에 서서 손전화기만 만지작거린다. 사라봉에서도 통화하더니 약속이 있던 걸까? 솔직히 긴장감은 1%도 없지만 쫓는 재미가 영화를 찍는 마냥 주인공이 된 기분이다. 흔적을 찾고 그림자를 쫓아 추적에 나선다는 상상만으로 쉴 틈 없는 난 주인공 톰 크루즈였다.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선 추격전은 미뤄두고 혼자 길을 나섰다. 파도가 넘쳐 얼굴로 입술로 키스를 해왔다. 입술에 닿은 바닷물을 날름 핥았다. 짠 소금에 몸이 파르르 떨렸다. 열기에 건조해진 몸과 목젖은 차가운 얼음물을 요구했다. 그러나 수건도 물도 챙기지 못한 가방은 텅텅 비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깊은 심연에서부터 한숨만 푹푹 새어 나왔다. 파도를 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즐거운 비명이 바다에 울려 퍼졌다. 더욱 몸이 말라왔지만, 또 한편을 영화를 찍듯 해수욕장은 떠들썩했다. 뜨거운 열기를 피해 집을 떠나 피서를 나온 주민들. 그늘마다 자리를 잡아 텐트와 돗자리를 깔고 앉아 웃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어떤 아빠는 아이를 모래에 파묻는 위험천만할 웃지 못할 장면도 연출했다. 제각기 자기의 위치를 파악하고 그에 맞는 역할을 소화했다. 그중에서 주인공은 나였는데 비중은 지나가는 사람1의 비중의 크기다. 단 제주라는 스케일 큰 한 편의 연극을 무료로 관람하는 것 같아 즐거웠다. 올레 18코스 중간 스탬프가 있는 정자 아래에서 아저씨를 더 기다리기로 했다. 손전화기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멀리서도 보였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이틈을 타 건조했던 목을 축이기 위해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냉장고에서 500m 생수를 하나 사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활활 타오르던 목과 뱃속은 드디어 북극을 만났다. 물 한 모금은 외롭던 나에게 해변의 여인이었다.
드디어 아저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시 끝날 듯한 추격의 빌미를 잡았다. 심장은 빨딱 빨딱 뛰기 시작했고 아드레날린이 머리 정수리로 분출했다. 움직였으니 곡 정자 아래까지 당돌할 것이다. “어서 오라. 빨리 와라” 주문을 걸었던 게 약효가 먹었나 보다. 1분 1초가 바삐 움직여야 할 몸이지만 5분, 10분이 지나도 아저씨의 그림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걸까?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지나쳐 간 걸까. 아쉬움 마음에 고개는 계속 뒤로 돌아갔고 아저씨는 올 생각이 없다. 혼자 즐긴 추격전이었지만 그것도 여기서 막을 내려야 했다. 그 뒤로 복면을 쓴 아저씨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허전해진 마음을 달랠 양분이 필요했다. 멀지 않은 삼양 해수욕장 한견에 가름 선착장에서 찾을 수 있었다. 줄지어 다이빙하는 머스마들의 재간둥이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이들이 여름을 나는 방식이었다. 어렸을적 난 겁쟁이라 그러지 못했는데 물속으로 뛰어드는 용기가 부럽다. 이래저래 불난 뱃속은 식혔지만, 붉으락푸르락 성난 피부는 나 자신이 용기를 가지고 아이들처럼 물속으로 풍덩 뛰어드는 상상을 가졌다.
삼양일동 마을을 지나 이제 원당사의 불탑사로 가는 코스다. 나무 아래의 그늘은 찬 공기를 만들고 바람은 몸의 열기를 식혔다. 원당사로 가기 전 극락을 만났다. 한참을 걸어 원당봉 꼭대기 위로 올라 갈 때쯤이다. 그러나 8.5km 지점 여긴 뭔가 잘못된 루터로 발을 들였다. 바람에 흩날리는 올레길 리본이 보이지 않는다. 심상치 않은 싸한 느낌이 몸을 감쌌다. 몇 번을 걸었던 길이지만 길은 꼬였고 상황은 급박했다. 급히 스마트지도를 켰다. 신촌 옛길로 가는 방향은 사찰과 전혀 반대 방향인 농로다. 갑자기 몸에 남아 있던 힘이 쫙 빠져나갔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시원한 바람과 그늘을 만났다는 것에 위안으로 삼았다. 새로 만난 길은 나무 한 그루 없는 꼬부랑길로 땡볕에 지글지글 끓었다. 그늘이여 안녕! 앞으로 남은 건 태양과 동거만 있을 뿐이다.
졸랑졸랑 햇볕을 따돌리고 신촌 옛길을 빠져나와 바닷길로 들어섰다. 조금만 더 가면 눈이 튀어나올 닭머르 정자가 기다렸다. 발길이 바빠졌다. 별 시답잖은 개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개는 나의 천적일까? 나에게 있어 동행자일까? 길 위에서 늘 만나는 게 신기할 정도다. 이쯤 되면 친해질 법하지만 그렇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다. 불쑥 튀어나온 개의 짖음. 가던 걸음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개와 거리는 20m, 5m 점점 가까워진다. 나의 발걸음 소리에 개의 짖음은 더욱더 앙칼스러워졌다.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났다고 해도 무방하다. 위화감을 조성하던 바둑이 새끼를 지키기 위해서였을까? 그늘진 트럭 아래에서 누른 이빨을 입 밖으로 드러내며 으르렁 되며 나를 향해 살금살금 다가왔다. 몸은 경직되고 얼어버려 움직이질 않는다. 이렇게 당할 수만 없다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우선 비를 피하려고 가져갔던 우산으로 위협을 줬다. 오던 걸음이 주춤하는 걸 보아선 우산의 효과가 나타났음이다. 이젠 지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발을 들었던 건 큰 오만이었다. 으르렁 되는 소리는 더욱더 날카로워졌고 금방이라도 달려와 팔과 다리 어디든 물어뜯을 기세다. 잔뜩 겁을 먹은 나는 막무가내로 주인아저씨를 불렀다. “아저씨” “아저씨” 몇 번을 부르고서야 침묵을 깨고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리 와. 이리 들어와” 주인의 부름에도 바둑이는 좀처럼 성난 이빨을 내보이며 위협을 해왔다. 목줄도 매어 놓지 않는 건 주인으로서 실격이다. 그렇다고 나 몰라라 옆으로 지나가기에 불안한 요소가 주변에 가득했다. 잔뜩 겁먹은 뇌는 어찌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지만 어떠한 방법도 떠오를 일이 만무하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답은 한 가지뿐 왔던 길을 돌아 나와 다른 길을 모색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라는 속담처럼 20분이 지나서 여차여차 닭머리에 다다랐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다. 닭머르에 닿기 전 뜻하지 않은 행운을 맞았다. 자그마한 습지로 황제가 자식을 얻기 위해 제를 지내 아들은 얻었다는 전설로 전해지는 남생이 못을 만났다. 수면위의 작은 요정이란 꽃말을 가진 작은 어리연꽃잎이 남생이 못에 둥지를 틀었다. 100m에서 보면 노랑나비 무리가 연못에 내려앉은 모양새지만, 1m 앞에서 보면 오이꽃을 닮았다. 이상우의 “그녀를 만난 곳 100m 전”이란 노랫말이 이상하게 생각난다. 묘한 매력과 꽃말을 가진 녀석인 만큼 생각도 남다르게 만든다. 말썽꾸러기 바둑이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횡재는 꿈도 못 꿀 일이다. 더위와 필사적으로 싸우는 모양이 불쌍했던지 백만 송이의 어리연꽃을 던져준다.
여기는 조천읍 신촌 마을. 제2의 추격전이 시작되었다는 빨간불이 켜졌다. 표적은 느릿느릿 거북이걸음 꽃무늬 티셔츠를 입은 할머니가 주인공이다. 나의 목적은 할머니를 모델로 만드는 것. 거북이가 아닌 달팽이로 할머니의 한 발짝 움직일 때마다 2초나 걸렸다. 아직 가야 할 거리는 3km 남짓이다. 난 신촌리를 빠져나갈 때까지만 달팽이가 되기로 했다. 그런 와중에 이쁜 집을 하나 발견한다. 돌담으로 둘러싸인 파란 지붕과 마당 한쪽의 야자수에 발목을 잡혔다. 사정없이 집을 담는다. 슬금슬금 뒤늦게 꽃무늬 티셔츠 할머니가 나타났다. 등골이 오싹해 온다. 할머니가 가는 집 바로 내가 죽자고 찍던 집이다. 깝죽거리면 찍기에 바빴던 난 움찔. 난 그 순간을 모면하려고 딴청을 피웠다. 간담이 작은 난 돌아올 할머니의 억센 말투에 지레 겁이 났다. 꽁무니를 감추고 줄행랑을 치기 바빴다. ‘할머니 건강하세요.’
골목길을 걷고 3~5개의 동네도 들여다보고 뜻하지 않은 추격전을 벌이며 온 지도 4시간째. 목적은 완주가 아닌 연북정까지의 여정이다. 그래봤자 완주까지의 거리와 차이는 2km이다. 이제 곧 신촌 포구와 대섬을 지나면 목적지에 도달한다. 대섬을 살짝 비껴 마치 바다와 바다 사이에 놓인 외길은 구름다리를 걷는 느낌이다. 그사이를 매운 돌탑은 또 다른 공간을 만들고 포근한 바닷냄새가 코를 뒤튼다. 오랫동안 머무르고 싶다는 마음의 속삭임에 밤은 깊어 오고 마음만 급하다. 집과 물이 공존하는 아름다움이 있는 조천리. 수암정, 조천초등학교, 황 씨 종손 가옥을 지나 연북정에 발을 들였다. 18코스의 끝은 아니지만, 하루의 마무리라는 안도감에 마음이 편안해져 왔다. 해는 어느새 서쪽으로 뉘엿뉘엿 넘어갔고 밤의 그림자가 드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