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 1코스
나도 모르게 아침 일찍 눈이 뜨였다. 시각은……. 5시 47분이다. 컨디션은 다른 때와 다르게 최고에 달했다. 일어난 시간에 비해 피곤하지 않다. 그런 것과 정반대인 하늘을 보니 왠지 우울해져 왔다. 세찬 바람에 오락가락하는 비구름은 곧 눈물이라도 흘리 것 같이 슬퍼만 보였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라는 속담처럼 일찍 일어나니 쌓였던 이불 빨래도 하고, 방 청소도 하고, 밥을 먹어도 시간의 여유가 넘쳤다. 정신없이 움직여도 7시 30분이다. 오늘따라 시간은 느림보 인듯하다. 밖의 상황은 좋지 않지만 상쾌하다. 날씨가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상황. 우선 욕실로 들어가 나갈 단장을 꾸몄다. 면도를 하고 머리를 감고 변기에 앉아 배 속을 비웠다. 걱정할 건 없다 만반의 준비가 끝났다. 이젠 하늘이 도와주기를 기다렸다. 창문을 열고 하늘의 동태를 살폈다. 뒤엉킨 흰구름과 먹구름이 바람에 휩쓸러 빠른 속도로 떠내려갔다. 태양이 비췄다가 구름이 자리를 뺏는다. 바람이 요술을 부렸다. 2020년 07월 24일은 그런 날 왠지 기발한 하루가 될 것 같은 징조가 나타났다. 카메라, 모자, 우산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여름을 잊어버릴 만한 시원한 공기가 바람을 타고 내 몸을 훑으며 찌릿찌릿 전율이 온몸을 감았다. 시뻘겋게 탄 팔과 목 그리고 얼굴에 대한 보상일까? 꿈같은 하루가 시작되었다.
버스를 타고 올레 1코스 출발 지점인 시흥리 정류소에 내렸다. 다른 올레길에 비해 거리는 10km에서 20km 사이의 중간 정도. 올레 1코스는 시흥초등학교에서 광치기 해변까지로 거리는 15.6km로 걷기에 딱 알맞다. 일찍이 찾아온 장마에 하늘이 말썽을 부렸다. 갑자기 부슬부슬 내리는 이슬비. 난감한 상황에 부닥쳤고 우산을 펼치고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기다렸다. 뭔가 오늘 운이 좋은 날이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이슬비를 데리고 떠나갔지만, 푹푹 찌는 열기가 몸을 에워쌌다. 코앞에 말미오름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실은 20분을 걷고 나서야 입구에 도달할 수 있다. 말미오름을 가기 전 밭일에 빠진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곡식을 돌보느라 바빠 보였다. 밭에는 콩, 고구마, 참깨 귀한 곡식이 자랐고, 할머니는 자식 같은 곡식을 위험으로 지키는 경호원이었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더운데 쉬엄쉬엄하세요..”
“더워도 어쩔 수 없지”
“어디서 오셨소”
할머니는 나의 차림새를 보고 궁금했던가 보다. “저 제주시에서 왔어요.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요.”
“늙은이를 왜 찍어”
할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돌아가신 할머니와 지난날이 떠올랐다. 그때 난 학교를 마치고 나며 할머니가 있는 큰집으로 곧장 달려가곤 했다. 할머니는 항상 내 입에 사탕 하나를 넣어주었다. 주름 많고 늘 미소가 가득했던 할머니의 모습이 그리워진다. 서둘러야 한다. 가고 싶지 않아도 올레 1코스에서는 지나야 하는 두 개의 오름. 높지는 않지만, 시작부터 여느 오름처럼 계단 길이 시작되었다. 선선했던 몸은 차츰 뜨겁게 달궈졌고 구멍이란 구멍에서는 물을 쏟아내었다. 순식간에 몸은 축축하게 변했다. 땀을 흘리고 나니 시원하기도 했지만 끈적거림은 싫었다. 점점 정상이 가까워졌다.
말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말미오름이라 이름이 붙여졌지만 오름의 진짜 이름은 두산봉이다. 모든 오름이 그러하듯 높이가 145.9m다. 간혹 가파른 곳이 있긴 해도 대체로 평평한 길. 산책하기에 이보다 멋진 곳은 없다. 그럼 여긴 어디쯤일까. 조금씩 아래로 드넓은 들판이 눈에 들어왔다. 한 편의 그림 같은 풍경은 혼을 베었다. 풍경에 매료돼 우왕좌왕하는 사이 느닷없는 소똥의 출현. 소똥을 밟을 위기에 닥쳤지만 시간은 슬로모션으로 흘러갔다. "으~ 안돼에에에" 쨉 싸게 허공에서 몸을 비틀었고 1초의 시간을 뛰어넘어 간신히 똥칠을 모면했다. 소똥을 밟았다면 난 다시 비 맞은 생쥐 꼴인 된 쓴 하루를 맞봐야 했다. 근데 소똥이 많은 이유는 뭘까? 말의 형상을 닮은 오름이라지만 제주의 흔한 말 대신 흔한 소가 방목되고 있었다. 소는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듯 궁둥이조차 꽁꽁 숨겨 보여주지 않았다. 소똥을 위장한 말똥이 아닌지 막대기를 들고 파헤쳐 봤어야 하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다. '난 소똥" 말미오름 구역만큼은 우리가 접수했다고 말해 왔다.
우여곡절을 겪고 정상 전망대에 도착했다. 가히 말로 표현되지 않은 제주의 풍경이 눈을 사로잡았다. 퍼즐 같은 들판 위에는 성산 일출봉, 우도, 지미 오름, 수산봉, 대왕산 등 오름이 줄지어 한눈에 들어왔다. 먹구름 아래로 선녀가 내려가는 듯 노란 빛내림 길을 만들었다. 파란 하늘도 좋지만, 먹구름이 이런 모습을 보여준다는 게 한층 더 좋았다. 주변은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었고 잡초와 여러 종류의 들꽃이 환영의 인사를 보낸다. 얼굴을 마주 보고 인사를 나누기에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촉박한 시간에 쫓겨야 했다. 양옆으로 자라난 풀의 배웅을 받으며 길을 따라 내려갔다. 그러나 끝날 것 같은 말미오름의 종점이 보이지 않는다. 다른 오름과 다르게 알오름과 한 몸인 듯 자연스레 이어졌다.
말미오름과 알오름은 육지의 산과 산이 이어진 능선처럼 독특한 형태를 보여줬다. 나무로 빽빽하게 둘러싸인 말미오름과 달리 알오름은 35,659㎡ 의 평야의 억새가 눈 앞을 가렸다. 말을 타고 1만 평에 가까운 몽골의 끝없는 초원을 달리는 상상에 빠졌다. 칭기즈칸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난 오늘도 주인공, 슬프게도 1인 1극이다. 나를 맞춰주는 듯 바람의 부는 세기도 억새의 춤사위도 강도가 달랐다. ‘쓱쓱~ 스스스슥~~’ ‘살랑살랑’ 공연이 시작됐지만 난 오줌보가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벌써 눈앞의 초원은 광활한 화장실이었다. 주변을 확인 후 다급한 마음에 자크를 내리자마자 방광에서 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꽉 찬 방광이 비워지자 굳었던 근육이 풀린 듯 사르르 녹았다. 한숨을 돌린 난 눈을 감고 한 자리에 가만히 서 귀를 기울였다. 새가 노래하면 억새는 연주하고 바람은 춤을 췄다. 잔잔한 음악에 나도 모르게 힘듦을 잊고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말미오름보다 낮은 높이 96.2m. 알오름은 눈 한번 깜박하니 정상에 다다랐다. 발 닿는 곳마다 빼어난 알오름에 반해서이다. 말미오름과 형제여서일까? 성산 일출봉을 비롯해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비슷하다. 굳이 승자를 가린다면 아주 조금 더 알오름이 마음에 쏙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