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 1코스
두 개의 오름을 넘어 중간 간세가 있는 종달리 바닷가를 향해 속도를 올렸다. 헉헉~ 더위에 심장은 쿵쿵쿵 시동을 걸었지만, 몇 분도 가지 못해 발걸음은 맥없이 꺼졌다. 태양은 눈치 없게 더욱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늘로 피신을 하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다. 접싯물에 코 박는 격이다. 고개를 두리번두리번거려도 달궈진 밭담이 열기를 뿜으면 동행할 뿐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군대에서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듣던 말이 생각난다. 군을 제대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태양 가림막을 못한 팔과 목이 타들어 갔고, 힘겨운 고통이 군 생활과 비슷함을 몸소 느낀 순간이다. 뜨거움은 따가움으로 바뀌고 절절 끓어 나의 속은 열기에 수분을 빼앗겨 메말라갔다. 가져온 물도 바닥이 드러났다. 근처에 슈퍼가 있을 리 만무했다. 남은 모든 힘을 온전히 다리에만 집중했다. 혓바닥이 쩍쩍 갈라졌지만 다리만은 쉴 시간 없이 움직여야 했다. 물을 찾아 헤맨지 30분. 600원의 시원한 용천수를 찾아 입안으로 콸콸 쏟아부었다. 뱃속에 이글거리던 태양을 잠재웠더니 때아닌 욕심이 문뜩 생겼다.
종달 초등학교를 지나 마을 골목길로 들어섰다. 달달한 냄새가 코를 후벼 팠고 창문 너머 아기자기한 소품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무슨 시간' 좀 전의 힘들었던 시간은 잊어버렸다. 상점 문앞까지 휘청 되던 다리는 문턱을 넘을까 말까? 몸은 움찔움찔했다. 그러면 안 된다는 두뇌의 외침이 귓가에 와 닿았다. 지갑에는 2장의 카드가 전부일뿐 텅텅 빈 지갑을 꺼내기조차 부끄러웠다. 지나온 고난의 시간을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파랗게 웃던 하늘은 어느새 까만 먹구름을 몰고 왔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우물쭈물하던 난 다시 길을 나섰다. 종달리 옛 소금밭을 지나 종달리 해변 올레 21코스와 올레 1코스의 갈림길에 섰다.
종달리는 수국으로도 유명하다. 늦깎이 수국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호기심이 갔다. 그러나 생각할 겨를도 없다. 바다 건너편 올레 1코스의 마지막 구간 성산 일출봉의 위엄한 자태가 나를 잡아당겼다. 길가 옆에 핀 나리꽃이 나를 달래주었다. 시작부터 두 개의 오름은 극기 훈련이라면 지금부터 평평한 해안 길로 접어든다. 휑한 바다 무슨 일이 벌어졌다. 썰물로 인해 바다가 바닥을 드러냈고 숨어있던 해조류와 바다생물이 얼굴을 보였다. 작은 덩치의 게는 기본이다. 생각지도 못한 손바닥 크기의 물고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고 물웅덩이에 갇혔다. 니모의 친구 중 하나다. 얕은 물에서 꼬리를 퍼덕이는 모습이 안쓰럽다. 잡아서 집으로 가져갈까 생각했지만, 방법도 엄두도 나질 않아 그냥 포기했다. 갈 길이나 가자.
종달리 해변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올레 1코스의 중간 스탬프 도장을 찍을 수 있는 목화 휴게소를 만난다. 평지라지만 펄펄 끓는 온도에 살갗마저 익어갔다. 작은 그늘을 찾아 1분여 동안 달아오른 온도를 내려야 했다. 머리가 지끈지끈할 찰나에 휴게소에서는 아저씨 두 명이 낮술을 마신다. 화끈화끈 아저씨를 보는 순간 더 더워진다.
목에 걸친 손수건은 이미 땀으로 젖어 치렁치렁 되면 걸리적거렸고, 땀은 모자 아래로 주르륵 흘러 눈을 괴롭혔다. 군것질할 것도 없다. 담배도 피지 않는다. 커피를 좋아하지 않아 카페를 들어갈 이유도 없다. 모든 상황이 힘들어하는 몸을 외면한 채 걸어가기만을 원했다. 지쳐가는 발걸음은 힘없이 터벅터벅 바닥을 내리쳤다. 목화휴게소 유리창 너머로 비췬 내 모습은 이리저리 날려 산발이 된 걸뱅이? 부랑자였다. 뱃속을 빵과 우유로 허기를 달래긴 역부족이었다. 다른 음식을 위장을 채워야 했다.
그때 마침 한치가 빨랫줄에 매달려 바닷바람을 처맞으며 쫄깃하게 말려갔다. 생김새부터 한 장할 노릇이다. 입안 가득히 침이 고였다. 출발한 시점부터 5시간이 지났다. 아무것도 없는 길바닥 위에서 위장이 화살의 시위를 당겼다. 꼬르륵~ 함성이 길이가 짧아질수록 걸음걸이는 2배의 힘이 더 들었다. 뱃가죽과 등짝이 만날수록 마음만 조급해져 왔다. 풍경도 옆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앞만 보며 달리는 경주마가 됐다. 달리고 달려 계속 달렸다. 위장도 못 느낄 번개 같은 움직임에 해안도로의 끝을 맛볼 때다. 그래도 머리가 하얗게 센 약주에 취한 아저씨보다 상태는 좋다. 초등학교 3학년도 가는 길 청춘인 내가 못 갈 리가 없다. 비틀비틀 눈동자가 흔들리는 아저씨가 더위에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이 더 앞섰다.
성산 일출봉이 코앞인 성산 부두의 갑문교를 건너는 찰나 부부를 만났다. 걸음걸이에서 애정이 뚝뚝 떨어졌다. 내심 혼자가 아닌 둘의 재미에 눈길이 갔다. 참고 왔던 부러움이 폭발했다. 뒤를 졸졸 따랐더니 알 수 없는 응어리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앞질러서라도 눈앞에서 지워야 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지미 오름 위 하늘이 심상치 않다. 하늘은 먹물을 쏟아부은 것처럼 시커먼 구름이 드리웠고 세상은 부옇게 변했다. 아침부터 쌓여 있던 화가 곧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하늘과 협상을 본 시간이 끝나갔다. 이제 부러움도 배고픔도 한낱 변명에 지났다. 광치기 해변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악을 쓰며 걸었다. 성산포항 종합여객터미널을 거쳐 성산 해안도를 돌면 성산 일출봉, 곧 마무리가 된다. 나만 다가오는 구름 비에 두려움을 느꼈다. 편의점 앞, 야외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떠는 사람들, 술에 취한 늙다리 총각으로 보이는 두 명의 아저씨. 비가 오면 비를 맞을 작정이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전혀 동요도 없다. 천하태평인 성산 주민에 비해 내 마음은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매미같이 조급했다. 시곗바늘은 5시를 훌쩍 넘겼다. 땀을 흘린 만큼 1분 1초라도 시간을 아껴야 한다. 남은 구간은 3.5km 남짓, 끝이라는 생각에 긴장감이 풀렸는지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갈까 말까 망설여졌지만, 이것조차 걷지 못한다면 바보다. 더 굳은 필승의 각오를 다져야 했다.
공사 중인 길을 피해 가며 용기를 가지고 걸었지만 한 방 먹었다. 막다른 길목을 발이 묶였다. 엉킨 길을 헤매다가 겨우 찾은 길은 작은 빗방울을 얼굴 위로 떨어뜨렸다. 3km만 더 가면 목적지인데 조바심에 마음만 급해졌다. 하지만 스멀스멀 다가오는 희뿌연 안개비에 겁이 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똥이 더러워 피하는 것이 아니듯 안개비가 무서워서 도망치는 것은 아니다. 옷이 젖어 감기라도 들까 봐 조심하는 것뿐이다. 그런 내 자신이 미치도록 싫었고 졌다는 것에 화가 치밀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자연은 거대했고 난 자연에 속한 작은 먼지 같은 존재였다. 큰비가 내릴 것이고 그 판단은 정확할 것이다. 집으로 향할 버스를 기다릴 일만 남았다. 차츰 비안개가 바람을 타고 내려 머리를 적셨다. 어둑해지는 하루를 마치고 돌아가는 내 뒷모습엔 빗방울이 아닌 성취감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