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의 외출 (올레 19코스 1)

올레 19코스

by 병욱이



며칠, 아니 일주만이다. 빨리 찾아온 장마가 서서히 물러가고 이례적인 폭염이 발생할 것이란 뉴스가 연일 방송된다. 정말 폭염에 휩싸이지 않을까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그래도 밖으로 나갔다. 뜨거운 태양이 세상을 녹이려는 듯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뜨겁기도 했지만, 습도가 폭염을 한몫 거들었다. 수분이 머금은 그늘은 시원함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날짜를 잘못 고른 걸까. 의심이 들었다. 그 순간 한 줄기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며칠 동안 집안에 갇혀 움직일 수 없었던 갑갑함이 뻥 뚫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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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샘 작업에 늦잠을 자버려 아침밥도 걸렸다. 먼저 배를 채우기 위해 식당을 찾았다. 일반 정식, 냉면, 흑돼지... 뭘 먹을까. 그럴싸한 음식을 찾기란 웬만해선 어렵다지만, 우연히 마주친 식당 “삼도 해장국”으로 들어갔다. 벽에 걸린 메뉴 중 “고사리 육개장”이 유독 눈에 띄었다. 다른 곳에서 맛본 경험이 있어 더욱 먹고 싶은 충동이 입맛을 강하게 다셨다. 주문을 한 후 몇 분을 기다리자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 생각 외로 쫄깃쫄깃하고 부들부들한 고사리의 씹는 식감. 몇 분 후 텅 빈 그릇을 바라보니 꼬닥꼬닥 걸을 올레 19코스가 든든했다.


위험한 동행


잔뜩 부른 배를 안고 올레 19코스 시작점에 입도했다. 조천만세운동장부터 김녕 서포구까지의 18.8km 중간 난이도로 6시간의 대장정에 올랐다.


“저기 올레 19코스 가려고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하나요.”

뜬금없이 치고 들어오는 한 여성. “저기 리본이 보이네요. 저쪽으로 가면 돼요.”


늦은 시간이었기에 서둘러 길을 나섰다. 뒤를 쫄래쫄래 따라온다. 복장을 훑어보아선 올레길을 걷기엔 무리였다. 짧은 바지에 조깅 운동화였기에 그냥 조깅을 했다면 이해가 갔다. 따가운 자외선을 맞으며 걷는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음~ 오늘도 함께 걸을 사람이 있다는 게 괜찮았다. 걷다 멈추기를 반복하면 걷다 고개를 뒤로 돌렸다. 다른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하는 것 같더니 방향을 틀어 사라졌다. 기분이 묘하게 불편하다. 내가 그렇게 신뢰성이 없어 보였을까? 어쨌든 상한 기분은 좀처럼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사람은 좋아하는 나로선 기분을 잡치고 이럴 바에 혼자가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항일 기념관을 지나 작은 농로와 밭 담길 따라 바다로 가는 여정에 다시 만난 여성. 서먹하게 헤어지고 다시 아는 척을 하려고 했더니 뭔가 어정쩡하다. 각자 갈 길을 걸었다. 얼마 가지 않아 서로의 대화가 오갔다.


“어디서 오셨어요” 요즘 코로나 19가 병원이 유행 중인 하루하루를 조심해야 했다.

“서울이요. 제주도는 많이 돌았지만 올레길을 걸어보고 싶어서...”


잠식되어 가던 코로나 19가 인터넷 뉴스 기사에서 본 내용은 서울의 사태가 심각하다. 그런 상황에서 여성은 마스크까지 쓰지 않았다. 코로나의 안전수칙은 서로의 거리가 2m이다. 비말이 튈까. 위험하다는 빨간불이 감지됐다. 안심이 되지 않아 멀찌감치 떨어져서 불어오는 바람을 등졌다. 바다가 가까워졌다는 건 헤어질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올레 19코스에 대해 여러 조언을 해 준 후 인사도 없이 조용히 거리를 두며 멀어져 갔다.


발가벗은 아저씨


함덕 서우봉을 오르기 전까지 해안 길이다. 줄줄 흘러내리던 이마의 땀이 세차게 불어오던 바람과 함께 날려갔다. 에어컨 바람보다 차갑지는 않지만, 남해에서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이 조함해안도로를 꽉 채웠다. 바람은 타고 옛날 조천관 시대에 각종 선박이 항로 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관곶, 날개를 단 듯 사뿐히 문개항아리 앞 전망에 섰다. 제주와 해남 땅끝의 거리가 가장 가까운 87km. 화창할 땐 추자도와 남해 도서를 조망할 수 있는 명소이다. 운무가 조금 끼였지만 바다는 또 다른 볼거리를 만들었다. 해녀인 듯 아닌 듯한 묘한 분위기를 그리며 물질을 남과 여. 울퉁불퉁 뾰족한 바위를 밟고 궁금증을 풀기 위해 다가갔다. 물질을 마친 아저씨가 바위에 앉아 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뭘 잡으셨어요.”

“아~ 불소라 따개비를 좀 땄어요.”


왠지 뭔가 어색하다. 단 한마디를 끝으로 대화가 멈췄다.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만 울려 퍼졌다. 몇 분 동안 가만히 있던 아저씨가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저기 나 팬티 벗을 건데...” “아~ 네에” 처음으로 건네 온 말이 팬티를 벗는다니 황당했지만 이해가 갔다. 뜨거운 태양은 불타올랐지만 젖은 옷을 입은 상태에서 바람까지 불었으니 추웠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발가벗는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난 사진을 더 찍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뽀얀 뒤태의 엉덩이가 눈에 보였다. 보고도 믿을 수가 없다. 대담하다고 해야 할까. 50~60대쯤 되는 중년의 힘일까. 주저 없는 행동과 자연스러움은 자주 해 본 느낌이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바위에 걸터앉아 젖은 옷과 몸을 말렸다. 한동안 그렇게 아저씨는 엉덩이를 깐 채로 바닷가를 즐겼다. “나는 자연인이다”라고 절실하게 표현했다. 시원한 바다를 만끽 할 저런 용기가 나에게도 있을지 생각했다. 팬티만 입고 있는 것도 무리일 것이란 결론이 지어졌다.

용기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가질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무엇을 함에 있어서 시간의 틈이 메워질수록 그 용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보는 이에 따라 아저씨는 꼰대가 될 수도 있지만, 난 반대로 세상의 모든 걸 내려놓은 멋진 아저씨로 보였다. 그렇다고 하지만 난 저렇게 할 수는 없다. 빨리 도망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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