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 19코스
관곶 앞 하얀 등대가 하얀 물거품을 삼켰다. 푸른 바다의 배는 하얀 등대를 바라보았고, 난 밭담이 어울려진 황홀한 길을 따라 걸었다. 길마다 들꽃이 반겼고 그 향기는 바람에 실려갔다. 비틀비틀 나비의 춤사위에 팔을 오르락내리락 날갯짓 시늉을 짖는다. 위험한 동행이 있은 후 아무도 없던 터라 더욱더 반가웠다. 어느덧 함덕 서우봉이 보이는 여기는 신흥리 백사장. 그래봤자 고작 3.5km 지점이다. 남은 거리는 15km. 더욱 열심히 몸을 움직여야 했지만, 고장 난 자전거의 페달처럼 멈추기 일보 직전인 몸뚱어리다. 출렁이는 물결 사이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그들의 웃음소리는 혼자라는 이유로 귓가를 슬프게 만든다.
해변을 돌아 잠시 벗어난 올레길. 사람 냄새를 맡을까 꼬닥꼬닥 이어진 골목길을 찾아 마을로 발길을 돌렸다. 돌담 너머 마루에 앉은 할머니의 고요한 숨소리만이 들렸다. 골목길을 서성이는 바람만이 나의 땀을 훔쳐 지나갔다. 동네 사람은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걸까.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는 무거운 외로움만 골목길에 내려앉았다. 허나 지고 피고 다시 일어나는 게 인생이듯 다시 마주한 밭담 길. 생명의 기운이 쑥쑥 솟아난다. 가방에 얼려온 얼음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시무룩했던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밭담과 바다를 지나 다시 밭담으로 지루할 틈을 내어주지 않는 흥겨운 놀이터로 차츰 빠져들었다. 구멍난 밭담을 요리조리 따라 느영나영. 어느새 함덕 서우봉을 마주했다. 좁은 밭담 길로 질주하는 트럭이 먼지를 일으키며 쏜살같이 지나갔다. 차창 너머로 순간 마주친 할아버지의 눈동자. “저 녀석은 뭐야” 하며 그런 눈빛을 쏘아 보낸다.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심장이 덜컥 뭔가 용서를 빌어야 할 분위기다. 자동차를 따라 달려가 “죄송합니다.” 말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나의 동행은 그 누구도 아니다. 태양이 만들어준 나의 곁에 있는 반쪽 그림자였다. 나비를 만나는 것도, 길 위의 손님을 만나는 것도 이보다 더 가까울 수는 없다. 그래서일까? 출발선에서 만난 여성과 헤어진 후 그 누구의 얼굴을 마주칠 수 없다. 조용한 거리엔 나와 관계없는 낯선 이들의 즐거운 비명만이 떠들썩하다. 그렇다고 딱히 찾아 나서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림자란 친구가 있고 덩치가 제법 큰 친구 서우봉이 기다렸다. 걷다가 달리다 또 걸었다. 땀은 여름의 빗줄기처럼 흘러내린다. 도로 옆으로 늘어선 카페와 편의점이 나를 유혹해 왔다. 달콤한 아이스크림과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팔만 뻗으면 손끝에 닿아 금방이라도 입안에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다. 그렇게 나에게 필요한 건 달달한 휴식이지만 여기서 멈출 수 없다. 더 뜨겁게 심장을 불태워 달려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위기의 여름이라지만 바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흰마스크를 쓴 채 더운 여름을 이기려고 악을 썼고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불편하더라도 바다를 보며 더위를 피할 수 있어 감사할 따름이다. 영롱한 에메랄드빛을 자아내는 함덕해수욕장을 그냥 떠나보내기에 아쉬움이 남았다. 뜬금없는 일정이 더해졌다. 신고 있던 등산화를 벗고 모래 위를 걸었다. 소리를 지를 수도 없을 만큼 달궈진 모래가 발바닥을 구웠다. 생각할 겨를없이 바다로 뛰어 들었다. 뜨뜻미지근한 물이 발등을 덮었다. 바닷물도 태양에 절절 끊어 따스하다. 좀 더 바다 안쪽으로 들어가 물 아래 모래를 파고들어서야 차가움을 느낄 수 있었다. 바다에서의 쉼은 여기서 마무리를 지었다. 해변이 끝나는 길과 맞닿아 있는 서우봉은 바다에서 다시 오름으로 전환이다. 봄이 되면 유채꽃이 가을엔 코스모스가 한들거릴 서우봉의 언덕은 의외로 만만찮다. 오르는 내내 몸은 모락모락 땀내가 옷으로 스며든다. 숨을 돌리려고 잠시 멈춰 선 갈림길. 함덕리 주민이 일본군의 억압에 낫과 호미로 2년에 걸쳐 조성했다는 21개의 진지동굴로 가는 이정표가 방향을 가리켰다. 거리는 2km, 볼 시간의 여유가 넉넉하지 않다. 아쉬움만을 마음에 담고 다시 얼마 남지 않은 오르막길을 올랐다.
오르막길을 오르면 발아래엔 하얀 거품을 뿜어내는 바다가 펼쳐진다. 시원한 맥주 한 캔이 딱 생각나는 풍경이다. 생각만으로도 힘이 쭉쭉 뻗는다. 시원한 밤을 보내기 위해 맥주는 킾 해본다. 잠깐 만나는 빽빽한 나무가 우거진 숲이 초록의 향료를 콧속에 뿌려 넣는다. 이건 뭐라고 해야 할까. 막 태어난 아기가 엄마를 찾는 느낌이다. 올레 18코스의 사라봉과 별도봉과 또 다른 신선한 새로움이 묻어났다. 이리왔다 저리 갔다 가빠 온 숨을 가다듬고 내리막의 평온한 풍경을 맛보며 3번째 마을 북촌리의 해동 포구에 들어섰다. 서우봉에서 눈여겨봤던 집을 찾았다. 집은 보이지 않고 길 가운데 한 마리의 개가 낮잠을 즐겼다. 잠잠하던 왼쪽 심장은 지레 겁을 먹고 ‘쿵쾅쿵쾅’ 날뛰기 시작했다. 멀찌감치 선채 사진을 찍는 중 서로가 눈을 마주쳤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더위에 귀찮았던 걸까? 아니다 착한 녀석임이 틀림없다. 안도의 숨을 들이쉬고 오랜만에 개와 눈인사를 나눴다. 다행이다 라는 말만 연신 입밖으로 터져나온다. 다시 올레 본래의 길로 들어섰다. 자세히 보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뜻하지 않은 작품을 만났다. ‘찰칵찰칵’ 진흙 속에서 진주를 찾았다. 착시현상의 일종으로 보는 이에 따라 보물 같은 장면이다. 경운기는 길위에 있어 멋진 모델이지만 이번 경우는 색다르다. 다행히 눈에 띄는 행운을 잡았다.
농로를 걷다 보면 327가구 중 207가구의 479명이 희생을 기리는 너븐숭이 4.3 기념관의 위령탑을 마주한다. 그 앞으로 애기 무덤도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과 아픔을 겪고 살았을까. 마음이 착잡해져 왔다. 잠시지만 묵념을 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