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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청년 Aug 05. 2023

누구나 인간답게 살 수 있을까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사실 세상이 공정하다는 생각은 별로 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세상은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만연하다는 생각이다. 이런 분위기가 너무 팽배하다 보니 공정 비슷한 느낌만 나도 엄청난 일이라고 회자되는 것이 아닐까? 그중에 하나가 능력주의에 대한 칭송 같다.


샌델은 사회가 능력에 따라 경제적 보상과 지위를 배분해야 한다는 생각은 매력적이지만 능력주의가 공정하다는 것은 착각이라고 주장한다.


혹시라도 능력주의가 완전히 실현되어 각자의 직업과 보수가 노력과 재능에 완전히 비례한다고 해도 그게 과연 정의로운 사회인가?라고 되묻는다.


우리나라는 아직 능력주의도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데 이게 무슨 배부른 소리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대안인가?라고 되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의미는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능력주의가 공정하다는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는 데 의미를 두는 것 같다.


이런 생각의 바탕과 전제는 능력이나 재능이라는 것이 노력 같은 후천적인 이유보다는 타고난 운에 가깝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동감한다. 나이가 들수록 부도 건강도 운에 가깝다고 느낀다. 이렇게 말하면 노력이 아무 의미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노력이 운도 만들 수 있다고 본다.


운명이 능력의 반영이라는 관념은 서구 문화의 도덕적 직관에 뿌리 깊이 박혀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부는 재능과 노력의 상징이며, 가난은 나태의 상징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이런 관념의 신학적 뿌리는 ‘칼뱅주의’로부터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은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던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한 자’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성공한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성공했다. ‘그들의 성공은 그들의 미덕을 입증한다’라고 말한다. 성공이 곧 미덕이다. 


그들은 부와 건강을 상과 벌의 문제로 여긴다. 이런 주장은 ‘미국은 선하기 때문에 위대하다’라는 다소 황당한 주장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부와 명성 같은 사회적 상승을 행운이나 은총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노력과 분투로 보는 것이 능력주의 윤리의 핵심이라고 샌델은 말한다.


능력주의의 또 다른 이름은 학력주의다. 학력이 높은 사람은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가정한다.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sky에 입학하는 것만으로도 주어지는 기회나 역할 자체가 달라진다.


우리가 많이 착각하는 한 가지는 능력주의의 이상은 ‘이동성’에 있지 ‘평등’에 있지 않다는 점을 말한다. 공정이라는 것이 평등이라는 개념과 가깝다면 능력주의는 공정과 거리가 멀다. 능력주의는 능력에 따라 이동이 가능해야 한다.


능력주의의 단점은 승자에게는 오만과 불안을, 패자에게는 분노를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능력주의는 성실과 노력보다는 성과가 중요하다. 능력주의는 기회는 평등하지만 결과는 평등하지 않다.


샌델이 말하는 대안은 공공선을 추구하자는 것 같다. 센델이 말하는 공공선은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사회를 말하는 것 같다. 공공선을 추구하는 방법으로는 재능 있는 사람에게 핸디캡을 주는 게 아니라 승자가 패자에게 자신의 과실을 나누는 것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승자가 패자에게 어떻게 자신의 과실을 나눌 수 있을까? 현재로선 세금을 승자에게 많이 걷는 것인데 알게 모르게 승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세금 정책이 결정되고 있는 것 같다. 


사회는 반드시 분배가 가장 불운한 사람들에게 이롭도록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말한다. 최저 임금을 보장해야 하고 그들의 근로활동이 공공선에 기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동감한다. 능력주의에만 사회를 맡겨서는 안 된다. 능력주의가 자본주의랑 결합해서 사회적 부의 보상과 분배를 시장 시스템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 내가 생각하는 공공선은 효용성만 따지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공공선은 서로 도와가며 사는 것 같다.


사회는 경제성장보다는 좋은 사회를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더 추상적이다. 센델이 말하는 좋은 사회는 무엇일까? 그것에 대한 설명은 부족하다. 그러면서 금융 활동이 우리를 번영시키지 않으며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주기적으로 금융위기를 불러와 막대한 경제가치를 파괴한다고 말한다. 현재 금융시스템에 대한 강한 불신이 묻어난다. 아마도 금융시스템이 나쁜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왜 그런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기회의 평등’의 대안은 공산주의 같은 ‘결과의 평등’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도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조건의 평등'이라고 말한다. ‘조건의 평등'이라는 개념은 신박하다. 공산주의의 실패로 결과의 평등이란 말에 본능적인 거부감이 있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대안이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최저임금이 ‘넌 이 정도만 받아도 돼'라는 굴레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이 사회가 조건의 평등이라는 명목아래 더 할 수도 있는 책임을 면제시켜주는 건 아닐까?


누구나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능력주의는 오히려 빈부격차를 당연시한다. 시장경제는 능력주의를 부추긴다. 불가능한 문제를 푸는 방법은 문제를 재정의 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했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지금은 ‘죽을 때 너무 추하게 죽지만 않게 해 주세요’라고 바뀌었다. 너무 큰 소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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