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 오르한 파묵
터키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르한 파묵의 대표작이다.
그의 작품은 <하얀 성> 다음으로 두 번째 접했다.
오스만 제국의 궁정화가 엘레강스가 우물에서 죽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독특하게도 죽는 자의 시점이다.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말하지만 누가 범인인지 자신도 모른다.
처음부터 끝까지 각 등장인물의 시점으로 쓰였다.
주요 인물들이 나비, 황새, 올리브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것도 특이하다.
결국 이 모든 이야기와 살인사건의 원인은
세밀화로 대표되는 터키 전통 미술양식과
원근법으로 대표되는 서양 미술양식의 충돌 때문이다.
<하얀 성>에서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도플갱어를 등장시켜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를 탐구했다.
거기서도 주인공은 이탈리아 사람이고,
똑같이 생긴 다른 사람은 이슬람 사람이다.
나중에는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안 된다.
작가에게 동양과 서양의 충돌은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중요한 모티브 같다.
하지만 이것들은 서로 구별되는 게 아니라 결국은 한 몸이다.
살인범을 찾기 위해 그림의 흔적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그림에서 펼쳐지는 전통과 관습
그리고 그것에 맞서는 개성과 새로운 스타일이 부딪힌다.
그림이라는 예술의 정의와 거장이나 대가,
그리고 진정한 화가의 의미에 대한 서로의 주장이 펼쳐진다.
“진정한 화가와 그렇지 않은 화가들을 구분하는 것은 시간이라고 하셨네”
시간이 지나도 살아남는 것이 진정한 화가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간이 중요한 것은 기억 때문이다.
기억이 전달되어야 시간이 지나도 영원하다.
“안다는 것은 본 것을 기억하는 것이며, 본다는 것은 기억하는 것이다”
“나를 보라. 산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를 보시라 본다는 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다는 것은 곧 보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보는 것이고, 본다는 것은 기억하는 것이다.
곧 산다는 것은 기억하는 것이고, 기억하려면 본다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작가는 본다는 과정에 주목하는 것 같다.
“모든 세계가 색으로 이루어져 있고
모든 것이 색임을 나는 보았다.
나를 다른 모든 것들과 구별하는 힘이 색에서 나온 것이고,
지금 나를 사랑으로 껴안고 세계와 연결해 주는 것도 색이란 걸 깨달았다.”
본다는 것은 색을 보는 것이다.
나와 다른 것들을 구별하는 힘이 색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내가 남들과 다른 색을 보면
그것이 나와 세계를 구별시켜 준다는 것이다.
이 모든 욕망은 인간이 얼마나 유일해지고 독특해지고 싶어 하는 가를 대변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특별하고 예외적인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는다는 건 누구나 피할 수 없기에 예외적인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이 든다는 것이다.
“우리를 대가로 만드는 것은 주제를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전혀 경험하지 않는 것이 우리를 대가로 만들어줍니다.”
대가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죽음도 그렇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대가들은 그것을 바라기도 한다.
우리가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기억이다.
기억만이 영원함을 유지시켜 준다.
예술도 그림도 기억되는 방법 중에 하나다.
그래서 우리는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봐야 하고,
그래야 그것이 기억되고 영원할 수 있다고 작가는 말하는 것 같다.
나는 지금 이 세상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남이 못 보는 다른 색을 보고 있는가?
그걸 기억할 수 있게 남기고 있는가?
“보지 못하는 사람과 보는 사람이 같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을 그리고 싶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