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기록을 꿈꾸다가 포기한 나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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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나는 늘 쓰는 사람이었다.
어릴 때엔 열쇠가 달려있는 비밀 다이어리를 쓰곤 책상에 넣어 보관했었고, 크고 나서는 다이어리라는 이름이 붙은 노트를 사서 꾸준히 끄적였다.
스타벅스에서 주는 몰스킨 다이어리는 목적 없이 받아 예쁘게 첫 장을 꾸며댔지만, 연말에 가까워질수록 내 다이어리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어쩌면 기록을 멈춘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밀리고 밀리다 보니 다이어리가 예쁘지 않았다.
기록이 듬성듬성 있는 다이어리를 펼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늘 내 다이어리는 끝을 보지 못한 채 멈춰 버리곤 했다.
새해가 되면 다시 리셋된 예쁜 다이어리에 공들여 쓴 글자들로 기록을 시작했지만 결국은 또 멈추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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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종이 다이어리에 쓴 글이 멈춰있더라도 내 기록 모두가 멈춰 있던 건 아니었다.
늘, 유행에 따라 온라인에 기록을 빼먹지 않고 해오고 있었다.
내 일상과 감정들을 싸이월드, 블로그, 인스타그램 등 그 시절 유행하는 SNS에 꾸준히 기록을 해오고 있었다.
휴대폰 사진 화질이 점점 좋아지고, 기록이 편하다 보니 온라인에 기록하는 것이 좋았다. 나의 감정을 타인과 공유하는 것도 좋았다.
때론 내 생각을 올렸을 때 내 글에 공감해 주는 것이 좋았고, 꽤 감정을 잘 표현한다고 인정해 주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다이어리처럼 예쁜 기록을 하는 것이 온라인에서는 참 쉬웠다.
처음 싸이월드에 일기를 쓰면서 내 기록들이 차례대로 아카이빙 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싸이월드가 시들해지는 때가 왔었다.
그 무렵 내 일기는 블로그로 옮겨가고 있었다.
글을 쓰는 편리함은 더해지고 나를 아는 사람이 아닌 익명의 이웃들이 내 글을 읽는 것도 좋았다.
내 속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해도 좋은 공간이었다.
여러 장의 사진을 하루에 있었던 순서대로 올리고 글을 쓰고 나면 마치 목욕을 한 것처럼 개운한 느낌도 들었었다.
이때부터였을까. 내 기록들이 파편처럼 흩어졌던 때가.
싸이월드에 기록하던 것이 자연스레 블로그로 옮겨 왔다고 생각했지만 싸이월드가 폐쇄되면서 나의 기록의 한 부분이 사라져 버렸다.
온라인에 기록한 내용들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경험한 때였다. 나의 젊은 시절의 감정을 모아둔 곳이었는데 꼭 누군가에게 도둑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을 멈추진 않았다.
블로그에 쓸 사진은 일부러 정성스레 찍고, 사진이 없으면 글을 쓰지 않았다.
사진첩에서 제일 괜찮은 사진들을 골라 일기를 써 내려갔다.
어떤 날은 매일을 기록하기도 했고, 어떤 날은 건너뛰기도 했지만 기록을 멈춘 적은 없다.
그 무렵 예쁜 사진에 빠져 있을 때, 인스타그램이 핫해졌다.
매력적인 사진 한 장과 짧은 글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블로그에 방대한 양의 글을 올리지 못하던 날은 인스타그램에 기록을 했다.
짧은 시간, 내 하루 중 가장 매력 있는 순간을 기록할 수 있다는 점이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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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매일을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으로 이어가던 기록이 멈춰 서기 시작했다.
아이를 낳았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워킹맘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쁜 기록들은 시간이 필요하다. 때론 꽤 많은 정성과 시간을 들여야만 가능한 작업이다.
워킹맘이 되자마자 글을 쓸 수 있는 잠깐의 시간도 허락되지 않았다.
살림과 일을 병행하는 일은 생각보다 체력 소모가 컸다.
아이와 함께 잠들고 새벽에 깨서 출근 준비를 하는 일상은 예쁜 기록을 허락하지 않았다.
처음 복직한 때엔 기억해야 할 것들을 놓쳐 스스로를 무능하다고 느끼는 때가 많았다.
챙겨야 할 것은 많은데, 효율성이 떨어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것을 혼자 해내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하루 24시간이 버거웠고 일이 감당되지 않을 때는 모든 것을 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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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를 살린 것은 또다시 기록이었다.
복직을 한 해에 나는 노션을 배웠다.
기록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 다른 사람들이 쓰는 것들은 한 번씩 써보는 성향을 지니고 있는데 노션이 참 궁금했었다.
노션을 사용하면서 엉망징창이던 업무에 질서를 부여하게 되었고 조금씩 정리가 되기 시작했다.
지금 해야 할 일들을 프로젝트별로 나누고, 그 일을 노션에 기록한 후 저장해야 할 자료들을 드라이브에 모으면서 내 삶은 꽤 많이 가벼워졌다.
하지만 여전히 바쁜 삶 속에서 놓치는 일들이 많은 워킹맘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아이와 함께 있을 때 노션을 열어보고 일정 체크를 하기가 어려웠고, 집안 대소사까지 노션에 기록하는 것이 적절해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내 기록의 허브가 필요한 때였다.
그때 내 눈에 띈 것이 종이 다이어리였다.
내 기록들이 파편처럼 흩어져있지만 그걸 묶어줄 허브 역할을 종이 다이어리가 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내 종이 다이어리는 20대 때 쓰던 다이어리처럼 ‘예쁨’을 추구하지 않는다.
예쁜 기록도 아닐뿐더러 체계조차도 없다.
불렛 저널이며, 다꾸가 유행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도, 내 다이어리는 그저 내 생각의 조각들을 쏟아내는 종이 역할을 할 뿐이다.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나는 종이 다이어리를 펼친다.
날짜만 쓰고 내 생각들을 그냥 쏟아낸다.
어떤 날은 우울했던 하루를 쓰기도 하고, 어떤 날은 감사 일기를 쓰기도 한다.
어떤 날은 해야 할 일의 목록들을 쓰기도 하고, 어떤 날을 기억해야 할 업무 내용을 쓴다.
예쁜 것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부담도 없다.
늘 들고 다니면서 기억나는 것들을 혹은 기억해야 할 것들을 적어내다 보니 삶이 조금씩 정돈되는 기분이 들었다.
업무용, 개인용 다이어리로 나누지 않는 이유는 지금까지 파편처럼 흩어진 기록이라고 생각했던 온라인 기록장이 있기 때문이다.
종이 다이어리에 다 쓰고 난 뒤, 훑어볼 시간이 될 때, 업무 내용은 노션에, 내 개인 기록은 블로그에, 기억해야 할 하루의 멋진 순간은 인스타그램에 나눠 기록을 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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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난 예쁜 기록이 좋다.
정돈된 글자를 좋아하고, 균형 잡힌 사진을 좋아한다.
그럼에도 나를 지지하고 일으켜 세우는 기록은 예쁜 기록이 아니라 휘갈겨진 메모장임을 깨닫게 되었다.
바쁜 워킹맘은 오늘도 노트를 펼쳐서 생각들을 그저 펼쳐 놓는다.
그런데, 펼쳐놓은 그 생각들이 나를 살렸다. 아니, 여전히 나를 살리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