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 이후 좌대륙 우대양으로 거침없이 질주하던 일본이 처음으로 멈춰 섰습니다. 무조건 항복입니다. 하지만 일본은 순식간에 또 살아납니다. 미국은 100여 년 전엔 흑선으로 압박만을 가했지만 이번엔 일본을 직접 개조시켰습니다.
[후쿠자와 유키치 - 탈아론 / 대정봉환 - 메이지 유신/ 사카모토 료마 - 삿초동맹 / 유신 3걸 - 개혁과 갈등 / 폐번치현 - 야마구치현 하기 / 요시다 쇼인 - 존왕양이론, 정한론 / 군국주의자들 - 태평양전쟁 /더글라스 맥아더 - 연합국최고사령부 / 일본 근대화 - 미국 / 일본 선진화 - 미국]
7. 군국주의자들 - 태평양전쟁
예상 못한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한방 맞은 미국은 물리학자 오펜하이머의 주도로 원자폭탄 개발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박차를 가해 1945년 성공을 거둡니다. 미국은 이미 진주만 공습 6개월 후 복수전으로 벌어진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세계 최고의 해군력을 자랑했던 일본에게 승리함으로써 승기를 잡은 상태였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세상에 없던 신상 핵무기는 전쟁의 대세가 기울었음에도 카미카제, 전원옥쇄 등 군국주의자들의 발악으로 항복을 하지 않는 일본에 결정타를 날립니다. 남쪽 지역 히로시마에 이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어린아이(Little Boy)와 뚱보(Fat Man)라 불려 동네에서도 펀치력이 안 통할 것 같아 보이는 갓 태어난 애들에게 이렇게 차례로 한방씩 맞음으로써메이지유신 후 80여 년간브레이크 없이 폭주하던 일본이라는 제국주의 기관차는 처음으로 멈춰 섭니다. 미국이라는 사자의 코털을 잘못 건드린 것이죠.
나가사키 원폭 투하 3분 후의 구름 기둥, 1945. 8. 9, AP통신
하지만 일본은 대전 중 이렇게 딱 두 도시와 그곳에 거주하는 민간인만이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사실 원폭으로 많은 사상자가 집중되어 피해가 커 보이지만 일본이라는 국가의 전체 피해는 상대적으로 그렇게 큰 것은 아니었습니다. 도쿄와 오사카 등 대도시 공습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일본이 침략한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본토 상륙 공격을 당하지 않았기에 그렇습니다. 상대적으로 깨끗한 피해라는 것입니다. 일본이 침략한 국가들은 그들이 영토의 이곳저곳을 휘저으며 망신창이를 만들고 민간인을 학살하는 등 인권 유린을 자행하였으니까요.
식민지인 우리나라는 태평양전쟁 이 시점에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 등의 수탈이 정점에 달하게 됩니다. 막바지 전쟁을 치르느라 닦달하는 일본의 병참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중국의 피해는 난징학살만 보더라도 사망자가 30만 설까지 대두되는데 이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사상자를 합친 숫자와 비슷합니다. 중국은 1937년에서 1945년까지 지루하게 이어진 중일전쟁의 사상자를 최대 3천5백만 명으로 집계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피해와는 비교가 안 되는 숫자지요. 원자폭탄이라는 가공할 신무기의 화제성과 윤리적인 문제까지 대두되어 일본 피해를 더 주목하게 하는 것일 겁니다.
도쿄에 정박한 미주리호 선상에서 맥아더 앞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일본, 1945. 9. 2
사실 당시의 대세로 볼 때 히로시마의 원폭도 그렇지만 나가사키의 원폭은 막을 수 있던 재앙이었습니다. 군부가 천황에게 히로시마 원폭의 정확한 피해 상황을 신속하게 보고하고 곧바로 패전을 인정했다면 나가사키에 팻맨은 출격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히로시마에 8월 6일, 나가사키엔 9일에 투하됐으니 첫 원폭 후 항복 의사를 바로 연합국 측에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이전부터 소련의 대일본 참전이 가시화되면서 천황은 이미 항복으로 기울고 있던 터였습니다. 일본이 공산화되면 제정 러시아의 차르제처럼 천황제는 당연히 폐지될 테니까요. 당시 히로히토 천황은 러시아의 마지막 차르인 니콜라이 2세와 같은 일가족 처형을 걱정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일본은 그때도 결사항전을 주장했던 주전파 군국주의자들의 반대 속에 8월 15일에야 히로히토 천황이 무조건 항복 선언을 합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나라엔 광복이 찾아오고 해방이 되었습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초기에 정치와 군사 모두에 실권을 가졌던 사이고 다카모리가 그 권력과 인기를 힘에 입어 세이난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이후 정치 권력과 군사 권력을 이원화시켰습니다. 천황 아래 일원화되어있던 권력을 분산시킨 것이죠. 그래서 유신 초기 실권자인 유신 3걸이 퇴진한 후 최고 실권자는 이토 히로부미였음에도 군사 문제는 그가 아닌 군부의 실력자인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담당하였습니다. 조선 주둔군 사령관도 역임한 육군 원수인 그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등 당시 일본의 모든 군사 행동을 총지휘하였습니다. 그리고 군국주의의 아버지답게 모두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이렇게 그는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문관과 무관의 양대 산맥을 이룬 것입니다. 물론 둘 다 삿초동맹의 주역인 조슈번 출신인 데다 요시다 쇼인의 제자로 쇼카손쥬쿠 사숙 동문이니 쿵짝은 잘 맞았을 것입니다.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한 메이지 시대의 최고 실력자 이토 히로부미, 1841~1909
일본 군국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야마가타 아리토모, 1838~1922
그런데 대륙 침략과 태평양전쟁에선 이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습니다. 군부가 내각의 견제를 받지 않고 걷잡을 수 없는 군국주의의 길로 간 것입니다. 양자가 동등한 힘을 가지니 서로 힘 겨루기를 하게 되고, 커뮤니케이션에도 문제가 발생하여 때론 내각 모르게 군부가 독자 행동에도 나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군을 통제하기 위하여 내각과 군을 통수하는 1인 실권자 체제로 다시 돌아가는데 이때 등장한 실력자가 바로 문제의 도조 히데키입니다.
그는 육군 대신 신분으로 1941년 총리까지 겸하고 막판인 1944년엔 육군 참모총장까지 겸직하여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합니다. 도조 막부란 소리를 들으며 전권을 휘두르게 된 것입니다. 과거 유신 초기 사이고 다카모리보다 세어 보인 그였습니다. 그런데 평시엔 모르겠으나 전시의 이 결정은 상황을 더 악화시켰습니다. 그 또한 극렬 군국주의자였기에 이젠 그나마 있던 견제도 없이 무조건 반자이(만세) 돌격 앞으로를 외치며 일본을 전쟁의 태풍 속으로 돌진하게 하였으니까요.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에게 돌아갔습니다. 물론 그 시대에 일본이 원하는 인물이기에 그가 집행자로 낙점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패전 후 당연히 A급 전범으로 사형을 당했지만 연합군에 체포당할 당시 시도한 자결이 미수에 그쳐 스타일을 구기기도 했습니다. 평소 부하들에게 확실한 옥쇄를 강조했던 그였습니다. 하지만 그를 기리는 우익 세력들에 의해 그의 사후 유골은 이곳저곳을 떠돌다 1978년 국가의 희생자로 추대되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야스쿠니 신사에 다른 전범들과 함께 합사 되었습니다. 그가 죽은 지 30년이나 되었으니 일본인들 기준에 그만하면 됐다 생각하고 주변 피해국들과 상관없이 내린 결정이었겠지요.
그다음부터는 우리가 목도하고 있듯이 일본에서 총리를 비롯한 고관대작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여부는 그들이 거행할 때마다 국제적인 이슈로 뜨고 있습니다. 도쿄에 위치한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에 있는 8만여 신사 중 가장 규모가 큰 신사로 메이지 유신 시 천황을 위해 막부군과 싸우다 죽은 반막부파 전사들을 기리기 위해 유신 다음 해인 1869년 세워졌습니다. 천황을 위해 싸우다 죽었다는 것이 기준이고 포인트겠지요. 도조 히데키는 전범재판 시 천황의 전쟁 개입 여부를 묻는 재판관들의 집요한 질문에 요리조리 피해 가며 끝까지 부인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가 야스쿠니에 들어오고 일본인들이 지금도 그를 기리는 이유입니다.
도쿄 전범재판에서 사형당한 전범들을 후에 합사한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
8. 더글라스 맥아더 - 연합국 최고사령부
1945년 일본이 항복한 후 미국을 비롯한 11개의 연합국은 연합국 최고사령부(SCAP, Supreme Commander of the Allied Powers)라는 기구를 도쿄에 설치합니다. 일본에서 부르는 정식 명칭은 '연합국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인 이 기구는 이름에서 보듯이 총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의 미국이 실질적으로 모든 것을 관장하는 기구였습니다. 맥아더는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될 때까지 7년간 말 그대로 최고 권력을 가지고 일본을 통치합니다. 우리 땅 독도 문제를 유야무야로 처리해 일본에게 여지를 준 바로 그 조약입니다. 뿐만 아니라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해방 후 한반도 남한의 미군정도 그의 지배력 하에 놓고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 맥아더의 권력이 얼마나 대단했냐 하면 군인인 그가 수장인 그 사령부는 막부라 불리고 맥아더는 쇼군, 또는 푸른 눈의 천황이라 불릴 정도였습니다. 그때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천황을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놓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히로히토 천황은 태평양전쟁의 최고 의사 결정권자였기에 전후 사형을 당해 마땅했지만 일본인의 정서를 고려해서 그 화는 면했습니다. 신으로 추앙받는 천황을 사형시킬 경우 그 후유증을 고려한 맥아더가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전범재판 법정에 A급 전범으로 기소됐어야 할 그를 맥아더가 막아준 것입니다.
도쿄의 미국 대사관으로 맥아더를 방문한 히로히토 천황, 1945. 9. 27
이렇게 천황을 살린 맥아더는 2차세계대전 추축국 중 다른 나라의 지도자인 독일의 히틀러가 종전 직전 자살하고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종전 전 자국 국민들에게 처형당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고 그들이 히로히토 천황처럼 종전 후까지 살아있었다면 일본보다 먼저 완료된 유럽의 2차세계대전 전범재판인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백 퍼센트 처형을 당했을 테니까요. 그랬으면 대신 그들과 죽음을 같이 한 연인인 히틀러의 에바 브라운과 무솔리니의 클라라 페타치는 살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유럽의 두 전쟁 동업자들이 재판을 거치지 않고 죽어줬기에 맥아더는 상대적으로 덜 부담을 가지고 일본의 천황을 살렸을 것입니다. 정확한 이름이 극동 국제 군사재판인 도쿄 전범재판은 먼저 끝난 독일의 뉘른베르크 재판의 결과를 많이 참고하였습니다. 공범 성격으로 같이 일으킨 범죄였지만 그 사이 뉘른베르크의 판결은 판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러한 미국이 주축이 된 연합국의 지배가 패망한 일본을 또 발전시킵니다. 맥아더는 7년에 걸친 통치 기간 중에 미국식 선진 제도를 일본의 각 사회 체제에 고루 뿌리내리게 하였습니다. 군국주의의 왕정에서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의 일본으로 개조시킨 것입니다. 마치 80여 년 전인 1871년 미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에 가서 선진 문물을 직접 보고 배워왔던 이와쿠라 사절단이 일본을 근대화시켰다면, 이번엔 미국이 주축이 된 연합국이 일본에 직접 와서 그들을 선진화시키는 작업을 한 것입니다. 기간 중 우리나라 한반도에서 발생한 6.25 동란도 전후 일본의 경제 발전에 큰 몫을 했지요.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7년 동안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 모든 체제를 미국식으로 바꿉니다. 군대를 해산하고, 전범을 처벌하고, 재벌을 해체하고, 토지 개혁을 하고, 그리고 직계가 아닌 황족을 평민으로 강등시켰습니다. 군사 문제는 미국 본국의 합참 지시 하에, 민정 문제는 본국 국무부의 지시 하에서 그렇게 사회 전반을 바꾸어 갔습니다. 일본의 헌법과 법률 위에 존재하는 기구로 손아래에 일본 정부를 두고 그렇게 간접 통치를 한 것입니다. 일본으로서는 매우 굴욕적이었을 것입니다. 내각의 총리대신 권한이 연합국 총사령부의 일개 과장보다도 못한 시절이었으니까요. 일본은 이렇게 1853년 에도 앞바다에 뜬 흑선 함대로 인해 불평등 조약을 맺은 이후 단 한 번도 겪지 않았던 굴욕을 1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당하게 됩니다. 상대는 모두 같은 나라인 미국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주도한 도쿄 전범재판은 정의롭지 않았습니다. 전쟁 주범인 천황 처리의 문제도 그랬지만 28명만이 A급 전범으로 기소되고 그중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7명만이 사형을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맥아더가 임명한 11명의 재판관이 2년 반 동안 진행하며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전쟁에선 하루에도 폭탄 하나로 수십만 명도 죽이는데 법정에선 그것을 지시한 28명에 불과한 사람의 처벌을 이렇게 오랫동안 지루하게 진행한 것입니다. 법리적 논리가 들어가서 그런 것인데 그래서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하는 것이겠지요. 이렇게 도쿄 전범재판은 저지른 범죄의 흉포함에 비해 턱없이 약한 처벌로 처벌이 마무리되었습니다.
2년 반이나 끌은 도쿄 전범재판 광경, 1946. 5 ~ 1948. 12
아쉽게도 이 재판에 조선이든 대한제국이든 코리아는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독립국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일어난 2차세계대전의 피해국으로 간주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1개국에서 온 11명의 재판관 중엔 중국과 필리핀의 재판관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나라 국민들은 피해국 증인으로도 나왔지만 우리 조선인은 어느 곳에도 채택되지 못했습니다. 연합국의 눈엔 우리가 전쟁 훨씬 전인 1910년 한일합방으로 식민지화가 완료된 일본과 한 덩어리인 국가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피해자로 분류하면 연합국 중 인도를 식민지로 갖고 있는 영국 같은 나라들이 난처해질 수도 있어 모른 척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이야 주요 연합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의 식민지인 상황에서 전쟁 기간 중 일본에게 무력 침공을 당했으니 당연하게피해국의 자격을 부여받았을 것입니다.
또한 일본은 연합국이 1차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인 독일에게 천문학적인 배상 등 가혹하게 대해 독일이 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것을 보고 전후 처리 정책을 유화적으로 바꾼 덕도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당시 한반도를 위시한 소련 공산주의의 남하로 이것을 제지하려는 미국의 입김이 더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전후 처리는 처벌과 재발 방지보다는 재건이 더 우선시되는 정책이 펼쳐졌습니다. 칼자루를 쥔 민주주의의 보루 미국이 그들의 아시아 방어망을 위해 그들의 손으로 파산시킨 일본을 곧바로 급속 회생시켜준 것입니다. 이래저래 운이 좋았던 일본이었습니다. 그 엄청난 인류 범죄를 짓고서도 면죄부를 받은 것도 모자라 재건까지 되었으니까요.
태평양전쟁의 최고 책임자로 지목된 도쿄 전범재판의 도조 히데키, 1884~1948
맥아더의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이렇게 전후 처리를 완료하고 정상 국가가 된 일본 정부에게 1952년 권력을 돌려주고 주일 미군사령부로 축소됩니다. 메이지 유신 시 도쿠가와 막부가 천황에게 권력을 돌려준 1867년의 대정봉환을 떠올리게 하는 권력 이양이었습니다.
※ 본래 4회로 마감하려했던 이 연재 글은 분량 문제로 1회를 더해 다음 주말 5회분으로 종료합니다. 지루한 역사 이야기, 지금도 긴데 더 길면 읽다 포기하실까 싶어..ㅎ즐겁고 편안한 명절 보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