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하 Feb 02. 2022

양재천의 겨울 나그네, 칸트

한껏 멋을 낸 겨울 양재천의 칸트(1724~1804), 2022. 1. 24


양재천의 현자 칸트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따스한 인정에 감동을 받고 있을 듯합니다. 위 사진 속 그의 모습,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겨울 남자가 된 며칠 전 그의 모습입니다. 한 달 전쯤 그를 지나칠 때도 머플러를 두른 그의 모습을 보고 흐뭇해했는데 거기에 한 술 더 뜬, 아니 이렇게 한 겹 더해진 그의 모습을 보고 깜놀하여 이렇게 글까지 쓰게 되었습니다. 12월 겨울이 되면서 추위에 노출된 그가 안쓰러워 마음씨 착한 이 동네 어떤 분께서 머플러를 둘러주었을 텐데 그것도 모자라 또 그 분인지, 아님 다른 분께서 어깨와 몸을 감싸는 망토까지 그에게 입힌 것입니다.


그 선자가 누구이든 그는 칸트의 팬일 것입니다. 망토는 지난주 매서운 한파가 왔을 때 입힌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아무 두꺼운 옷이나 입힌 것이 아니라 코디까지 세세히 신경을 썼습니다. 빨간 목도리에 어울리는 감색 망토를 준비해 패션에 무관심해 보이는 그 독일 남자를 멋진 겨울 신사로 만들었으니까요. 이렇게 머플러든 망토든 그를 변화시킨 사람은 100프로 남자는 아닐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럴 리도 없고 그럴 수도 없겠지요. 제 기준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아무튼 대단한 우리동네 인심입니다.


망토를 두르기 전 칸트의 모습, 2021. 12. 20


그가 살았던 왕의 언덕이라 불린 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도 칸트는 이런 인정을 맛보았을까요? 태어나서 살며 그곳에서 100마일 밖을 벗어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그였습니다. 거기에 살 때 칸트는 그를 유명하게 만든 일화처럼 그곳에서 루틴의 대마왕으로 매일 오후 5시 강변을 산책해 그곳 주민들에게 정확한 시간을 배달해주곤 했었지요. 그리고 그의 천재성에 비해 뒤늦게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늦깎이 철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그 도시를 철학적으로 번성하게 하였습니다.


사실 칸트가 그렇게 늦어진 것은 철학, 천문학, 수학, 물리학, 화학, 지리학, 정치학 등 전 학문에 능통한 천재였기에 젊은 시절부터 일찍이 학교 측에서 다른 학문의 정교수를 제안했으나 꼭 철학 교수만을 하겠다는 그의 거부로 늦어진 것입니다. 기존 철학 교수 중 누군가 죽어줘야 자리가 났던 시대라서 그랬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해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는 강사로 계속 재직하다 46세가 돼서야 정교수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른 도시의 대학으로 갔더라면 당연히 일찍부터 철학 교수가 되었을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처럼 근세 이후 독일엔 위대한 철학자들이 많았습니다. 니체, 쇼펜하우어, 헤겔, 마르크스, 하이데거, 피히테 등 이렇게 날고 기는 철학자들이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누가 뭐래도 그중에 제일은 칸트일 것입니다. 근대 이전의 철학은 모두 칸트로 흘러들어갔고, 근대 이후의 철학은 모두 칸트로부터 흘러나왔다고 할 정도니까요.


이런 칸트라는 대철학자로 인해 우리는 그가 빛낸 도시인 쾨니히스베르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독일 통일 이전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였던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쾨니히스베르크라는 그 도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칸트 사후 1세기가 지나 그의 후손들이 벌인 1,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하면서 러시아의 영토가 된 것입니다. 철저하게 독일풍이었던 도시의 이름은 흠뻑 러시아 냄새가 나는 칼리닌그라드로 바뀌었습니다. 칼리닌은 볼셰비키 원로의 이름입니다.


밤에도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칸트, 2022. 1. 28


하지만 칸트의 무덤은 독일로 옮겨지지 않고 여전히 칼리닌그라드에 있습니다. 칸트를 만나려면 독일이 아니라 러시아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아생전 다른 도시로 나간 적이 없는 그였으니 죽어서도 그 도시에서 움직이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나 봅니다. 사실 이 문제는 칸트라는 유명세와 의미로 볼 때 독일이 유해 송환을 추진할 법도 한데 그런 시도는 없었던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칼리닌그라드 대학으로 이름이 바뀐 칸트의 모교이자 평생 재직했던 쾨니히스베르크 대학만이 다시 그 도시와 그 학교를 빛낸 그의 이름 임마누엘 칸트 대학으로 교명바뀌었습니다. 아무리 러시아라지만 학교 마케팅을 위해서라도 듣보잡 칼리닌보다는 칸트가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해서 번복한 것이겠지요. 이렇게 살아있을 때나 죽어서나 고향에서 요지부동한 칸트가 우리나라 우리동네 양재천에 와있는 것입니다. "Good job, Mr. Kant".


그런데 칸트도 이제는 이곳 양재천에 온 것을 매우 다행스럽고 좋다 할 것입니다. 4년 전 2018년 이역만리인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낯설고 외로웠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쾨니히스베르크의 강변처럼 양재천의 사시사철이 익숙해지고 그를 반기는 이곳 사람들의 진심도 알게 되었을 테니까요. 양재천 산책을 하는 사람들 중 그의 옆에 가서 앉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의 옆자리에 앉아 그를 쓰다듬기도 하고 잠깐 그처럼 사색도 하다 가니까요.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저처럼 사진을 찍고 그 모습을 이렇게 사방에 알리니 그 인기가 아이돌 스타 부럽지 않습니다.


급기야 추운 겨울 이렇게 머플러와 망토로까지 따스한 애정을 표해주니 그의 행복감은 꼭지까지 올라가 있을 것입니다. 무뚝뚝한 그의 고향 독일인과는 다른 우리네 살가움을 그도 이젠 알겠지요. 처음 왔을 때 혹시 느꼈을지도 모를 나그네 설움은 어느 순간 온데간데 없어졌을 것입니다. 그의 고향에선 맨날 이런 비판, 저런 비판만 날카롭게 외쳐댔던 그였습니다. 그런데 그나마 이제 그의 고향은 나라도, 주소도 바뀌어 그가 가고파도 찾아가기 힘든 곳이 되었습니다. 말도 바뀌어 통하지 않고요. 그리고 평생 미혼남에 무자식으로 산 그인지라 설사 간다 해도 그를 반기는 후손도 고향엔 없습니다. 그러니.. "Mr. Kant, be here long".


겨울 양재천의 둑방 산책로, 2022. 1. 17


 임마누엘 칸트와 쾨니히스베르크에 얽힌 더 많은 이야기는 이곳 브런치의 앞쪽에 있는 제 글 <양재천에 온 칸트>나 제가 출간한 책인 <지명에서 이순으로의 기행>을 보시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참고로 후자를 선택하기엔 속도나 비용에서 전자와 게임이 안 되기에 당연히 전자의 방법을 추천드립니다.ㅎㅎ

작가의 이전글 일본 근대화의 기수 - 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