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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Feb 05. 2022

일본 근대화의 기수 - 5(최종편)

역사에서 선택을 요하는 순간은 대개 실리와 명분 앞에 놓일 것입니다. 일본의 근대화와 선진화엔 주로 실리가 작동하였습니다. 그 시작점엔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주장하며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일본이었지만 서구열강의 힘을 본 그들은 곧바로 자세를 바꾸어 양이를 개국(開國)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양이는 토막(討幕)이 되어 타도의 대상이 서구 오랑캐에서 자국의 막부로까지 바뀌었습니다. 바다 건너 우리와는 다른 선택이었습니다.


[후쿠자와 유키치 - 탈아론 / 대정봉환 - 메이지 유신 / 사카모토 료마 - 삿초동맹 / 유신 3걸 - 개혁과 갈등 / 폐번치현 - 야마구치현 하기 / 요시다 쇼인 - 존왕양이론, 정한론 / 군국주의자들 - 태평양전쟁 / 더글라스 맥아더 - 연합국 최고사령부 / 일본 근대화 - 미국 / 일본 선진화 - 미국]



9. 일본 근대화 - 미국


일본 근대화의 시작이라고 하는 메이지 유신을 최초로 촉발한 것은 에도 앞바다에 뜬 미국의 페리 제독이 몰고 온 흑선 함대였습니다. 당시 동인도 함대 사령관이었던 페리는 1853년과 1854년 두 차례에 걸쳐 나타나 도쿠가와 막부를 압박해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처음엔 4척을 몰고 왔는데 뜻대로 협상이 안 되어 그다음 해 7척을 몰고 다시 왔습니다. 이것이 존왕양이파라 불리는 개화파들을 각성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흑선으로 상징되는 외세가 밀고 들어오는데 무능한 막부 체제 하에서 일본의 미래는 없다고 본 것입니다.


그들 중 흑선에 직접 관여된 주요 인물로는 그 흑선에 용기 있게 잠입해 미국으로 밀항을 시도했던 일본 보수 우익의 영혼이라 불리는 요시다 쇼인과 그것을 경이롭게 목격한 후 대정봉환에 박차를 가한 사카모토 료마가 있었습니다. 앞서 설명했듯 둘 다 메이지 유신의 사상과 행동에 핵심으로 공헌한 인물들입니다.


에도 앞바다에 출현한 미국의 흑선 기록화, 1853


그 이전 일본 앞바다에 서양 배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16세기 초부터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의 유럽 배들이 일본 앞바다에 출현했습니다. 그들 중 처음에 온 포르투갈은 임진왜란 시 일본이 조선에게 유용하게 써먹은 조총도 전수했지만 더 큰 목적인 기독교 선교에 적극적이었습니다. 막부는 처음엔 포교를 허용했지만 그 세력이 예상보다 커지자 그것을 금지시키고 쇄국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임진왜란 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조선 땅에 포르투갈 신부를 대동해 전투 중 부하들과 미사를 드릴 정도로 초창기 일본은 기독교에 개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쇄국으로 방향을 틀면서 심한 박해가 시작되는데 국내에도 개봉한 엔도 슈샤쿠의 소설 <침묵>을 영화화한 '사일런스'는 바로 이 시기의 이야기입니다.


이에 막부는 서양과의 무역 창구를 나가사키의 데지마라는 인공섬 한 곳으로 통일하여 1641년부터 200여 년간 독점권을 가진 네덜란드를 통해서만 서양과 교류해왔습니다. 우리 조선의 왜관처럼 말입니다. 기독교 선교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허용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엔 네덜란드로 대표되는 서양의 문물과 학문을 지칭하는 난학(蘭學)이 발달했습니다. 탈아론을 주장한 후쿠사와 유키치를 비롯한 당시 일본의 선각자들은 난학을 공부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역으로 일본의 도자기나 우키요에로 대표되는 일본 미술 등이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에 전해지며 그 동양의 이국적인 멋으로 유럽인들을 열광시키기도 했습니다.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화가 고흐를 비롯한 당시 유럽 대가들의 그림에 우키요에가 보이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난학은 이렇게 일본을 알리고 발달시키긴 했지만 막부 봉건제로 대표되는 일본의 시스템까지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나가사키에 인공섬으로 조성된 네덜란드의 상관 데지마, 17세기


그러나 19세기 중반 신무기로 무장한 미국이라는 신흥 강대국의 출현은 그 이전과는 경이감과 위기감의 강도가 달랐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페리 제독이 1853년 몰고 온 흑선 중 페리가 타고 있던 기함은 2,540톤으로 당시 세계 최대의 최신 전함이었는데 반해 그 시절 일본이 보유한 선박은 최대치가 100톤 전후에 불과했으니까요. 무려 25배의 차이, 아마 당시 일본인들의 눈에 그 시커먼 증기선은 바다 위에 떠있는 괴수 고질라로 보였을 것입니다.


1858년 막부는 미국의 압력으로 미일화친조약보다 더 강화된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합니다. 핵심 골자는 요코하마를 비롯한 5개 항구를 정식으로 개항한 것입니다. 4년 전 맺은 미일화친조약에 무역 등 상거래에 대한 내용이 빠져있어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미국이 다시 맺게 한 조약입니다. 당시 미국은 막부의 쇼군에게 불응 시 군함 공격 등의 압력까지 가하며 조약을 강행했습니다. 때를 같이 해서 일본은 영국, 프랑스 등 유럽 강국들과도 조약을 맺어 이제 완전한 개항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불과 10년 만인 1868년 메이지 유신이 성공한 것입니다. 개항에 이어 264년간 칼 찬 사무라이들이 지배해온 막부 정권이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일본은 진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 후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났으니 정세는 차이나도 단기간 흐름은 비슷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린 딱 3일천하로 끝났지요.


메이지 유신 성공 후 일본은 정부 차원에서 1871년 이와쿠라 사절단을 꾸려 구미 12개국을 방문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을 압박한 구미 선진국의 실체를 직접 보고 체험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와쿠라는 사절단 대표인 전권대사의 이름입니다. 유학생 포함 106명 규모의 사절단은 일본의 미래를 짊어질 인재들로 구성되었으며 방문 기간은 장장 22개월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간 중 타 국가 대비 압도적으로 긴 8개월이 미국 체류였습니다. 사절단은 이름도 아메리카호라는 증기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대륙을 횡단하며 미국의 이곳저곳을 시찰하며 백악관이 있는 워싱턴 DC를 방문했습니다. 그 기간 중 미국의 정치, 경제, 과학기술, 군사, 교육, 문화 등을 견학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럽으로 건너가 영국, 프랑스, 독일을 비롯한 선진 국가들을 견학하고 돌아왔습니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주요 인물, 좌로 부터 기도 다카요시, 야마구치 마스카, 이와쿠라 도모미, 이토 히로부미, 오쿠보 도시미치, 1871~1873


그들 중 앞에서도 설명드린 유신 3걸인 오쿠보 도시미치와 기도 다카요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일본의 초대 총리가 된 이토 히로부미도 있었습니다. 일본의 근대화와 팽창에 모두 기여를 한 인물들입니다. 물론 다른 100여 명도 돌아와 일본의 각 분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을 것입니다. 이 사절단에 유신 3걸의 나머지 1인인 사이고 다카모리가 빠져있는 것은 다소 의외라 생각됩니다. 아마도 그는 집에 남아서 유신이라는 소를 키우느라 안 갔을 것입니다. 약 2년간 경쟁자들이 부재한 그 기간 중 천황 옆에서 실권을 장악한 그였습니다.



10. 일본 선진화 - 미국


일본은 2차세계대전의 태평양전쟁에서 폭망했음에도 위에서 설명했듯이 미국의 이런저런 도움과 영향력으로 위기를 딛고 재차 선진국으로 올라섰습니다. 연합국 최고사령부의 수장 맥아더는 최우선적으로 일본의 천황을 신에서 인간으로 끌어내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려면 천황을 무소불위의 국가 수장으로 명시한 헌법부터 손을 봐야 했습니다. 일본이라는 국가의 가장 기초적인 국체와 정체부터 개조하여 재정립한 것입니다. 이렇게 그의 손에 의해 1889년에 제정된 대일본제국헌법은 파기되고 1946년 새로운 일본헌법이 공포됩니다.


구헌법인 메이지 시대의 제국헌법은 이토 히로부미가 구미 선진국을 돌며 여러 헌법들을 검토한 결과 당시 이미 강국인 구미 국가들보다 신흥 강국으로 떠오르는 독일이 일본의 상황과 유사하다고 보고 독일헌법을 모델로 만든 헌법이었습니다. 그렇게 세계사에 같은 시기에 부상하고 비슷한 헌법 하에서 운영된 독일과 일본이라선가 그 둘은 우리가 알고 있듯 나쁜 손을 맞잡고 20세기 전반에 같은 운명의 길을 걸었습니다. 흔히 메이지 유신의 기간은 유신이 시작된 1868년부터 이러한 제국헌법이 공포된 1889년까지를 이릅니다.


메이지 시대 대일본제국헌법 공포식, 1889


계몽주의자 장 자크 루소는 <전쟁 상태론>이라는 그의 논문에서 "전쟁은 상대국의 헌법을 바꾸는 것"이다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승전국이 패전국의 국가 형태를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통치자 맥아더는 그 룰을 충실히 따랐습니다. 그런데 바꾼 헌법의 내용이 주목할 만합니다. 새롭게 공포된 일본헌법의 전문 하단부엔 "국정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 그 권위는 국민으로부터 유래하고,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행사하며,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존 제국헌법의 천황, 천황, 천황 했던 자리에 국민, 국민, 국민이 들어선 것입니다. 가히 혁명적인 새 헌법.. 그런데 가만히 보면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문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링컨 대통령의 그 유명한 1863년 게티즈버그 연설에 나오는 대표 문구를 쏙 빼닮았습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그 연설의 중심 내용이 따옴표 순서대로 일본헌법에 똑같이 적용된 것입니다. 과거 천황에게 모든 권한을 부여했던 반민주적인 제국주의 헌법에서 그것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민주주의 헌법으로 미국인 맥아더가 바꾼 것입니다. 일본은 오늘날까지 이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일본은 헌법마저도 미국식으로 바꾸어, 아니 바뀌어 민주국가로서의 발전을 거듭하며 전쟁 전범국에서 세계에서 무시 못하는 선진국으로 올라선 것입니다.


1947년 1월에 발효된 일본헌법은 전쟁을 포기하고 군대를 보유하지 않겠다고 해서 평화헌법으로도 불립니다. 그런데 일본에는 주지하고 있듯이 헌법에서도 보유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군대 아닌 군대인 자위대가 있습니다. 아시아 최강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군대입니다. 한반도에서 6.25 동란이 발발하자 치안 목적의 경찰 예비대로 편성되었다가 중국과 북한의 공산화와 냉전 등 국제 정세에 맞춰 1954년 오늘날의 자위대가 된 것입니다. 일본 군대를 해체한 연합국 최고사령부의 미국이 곧바로 서둘러 그렇게 하라고 종용했습니다. 결국 일본은 이렇게 졸지에 다시 군사력까지 급속도로 갖추게 되었습니다. 실질적으로 일본 역사상 그들 땅에 군대가 부재했던 기간은 새 헌법이 발효된 1947년부터 3년에 불과한 시간이었습니다.


일본헌법 공포 시 발행된 관보 호외, 1946. 11. 3


이렇듯 일본의 근대화와 선진화는 일본 근현대사에 이름을 올린 많은 인물들의 활약도 컸지만 미국이라는 국가의 영향력이 월등하게 작용하였습니다. 일본 근대화의 기수 리스트에 미국도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최상위권 석차로 말입니다. 미국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의 동기를 부여하고 앞선 문물을 전수해 일본을 근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1945년 패망한 일본을 근대적인 왕정국가에서 빼내어 현대적인 선진 민주국가로 바꾸었습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의 국가들을 침략하고 2차세계대전이라는 패악적인 전쟁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미국에 의해 곧바로 기사회생한 것입니다.


그래서인가 그들 나라를 흑선으로 위협해 불평등 조약을 강요해 강제 개항시키고, 원폭을 투하해 많은 피해를 입히고, 메이지 유신 후 쾌도난마로 전진하기만 했던 그들에게 처음으로 패배도 안기고, 신으로 추앙했던 천황을 인간으로 끌어내리고, 그리고 전후 7년간 그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통치했던 미국임에도 일본은 오늘도 우리가 보고 있듯이 미국과 대놓고 친밀한가 봅니다.






에필로그


지금까지 저는 봉건주의 국가였던 일본이 어떻게 근대화된 국가가 되고 선진국까지 되었는지를 제가 보고 아는 좁은 틀 안에서 사감 없이 사실적으로 기술하였습니다. 1850년대에서 1950년대까지 약 100년간의 기록이지만 1900년대 초반의 이야기는 많이 생략되었습니다. 여러 인물들과 사건들이 등장했지만 제 시각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된 것만 얕게 다루다 보니 많은 역사가 빠져있을 것입니다. 요약본 수준으로 나름 제 딴엔 쉽고 재미있게 쓰려고 애를 쓰며 시대를 오르락내리락하였습니다. 역사학자가 아닌 저이기에 분명히 내용 중 제가 인지 못 한 오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점은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글을 쓰면서 이런 상상이 들어왔습니다. 불경스러운 상상입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만약 일본이 조선(대한제국)을 합병하지 않았으면 우리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요? 중국은 이미 밀려났으니 이 땅을 호시탐탐 노리던 러시아에게 조선이 넘어갔을까요? 그리고 하나 더, 일본이 정한론의 기본대로 조선이나 만주국까지만 식민지로 삼고 2차세계대전의 추축국으로 참전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독립과 광복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처럼 더 늦게 독립이 되었으려나요?


약소국의 운명이 강대국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시장통에서처럼 그들끼리의 흥정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사자 무리 속 토끼처럼 약소국은 그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무섭고도 참담한 상황에 놓이니까요. 그렇게 해서 떡 하나 받듯 얻어낸 독립이라는 것도 강대국은 진지한 상황 고려 없이 그들 편의대로 떡 썰듯 지도에 줄 하나 지익 그어 버리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우리의 38선이 그랬고 세계지도에서 보듯 수많은 아프리카의 직선 국경 국가들이 그런 아픔의 결과입니다.


본문에 언급한 독도 문제만 해도 그랬습니다. 그 논란은 1952년 발효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결과로 비롯되었습니다. 그 회의에서 독도는 조약의 5차 수정 문서까지는 우리나라 땅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어떤 작자가 그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고 독도를 일본 땅으로 해야 한다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는 당시 일본의 정치 고문을 맡고 있던 자였습니다. 그 영향으로 6차 수정 문서엔 독도가 일본 땅으로 기록되었는데 영국과 뉴질랜드가 이견을 제시하자 그다음 차 수정 문서엔 아예 독도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역시 최종 조약 문서에도 독도는 빠졌습니다.


예측컨대 당시 미국의 태평양 안보 이익과 일본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6차 문서엔 그렇게 기록되었지만 더 강하게 계속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어서 그다음부터는 슬쩍 빼서 논외로 하였을 것입니다. 당시 당사자인 우리나라의 의견이나 고래로부터 우리 땅인 독도에 대한 역사적 배경이나 기록은 고려되지 않은 채 강대국의 이익과 흥정으로 그렇게 처리되어 버린 것입니다. 약소국의 설움입니다. 일본은 역사적이고 국제적인 이 조약 문서 중 6차 수정본을 독도에 관한 한 파이널 기록이라 보고 오늘날까지 집요하게 우기고 있는 것입니다.  


단언컨대 아무리 선한 강대국이라도 약소국보다 더한 손해를 감수한 경우는 역사상 단 한 건도 없습니다. 안 봐도 되는 손해를 일부러 보며 장사하는 장사꾼은 없듯이 말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한 역사에서 강대국이 베푼 최고의 선의는 바빌론 유수 시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들을 이후 바빌론을 정복한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이 아무 조건 없이 풀어준 일입니다. 노예의 노동력이 귀한 기원전 6세기에 그는 그렇게 하였습니다. 이 일로 이방인임에도 유대인에게 메시아라 칭송받은 그로 인해 당시 절망적인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시온으로 향하는 환희의 송가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것 말고는 딱히 제 기억 속에 입력된 강대국의 그런 훈훈한 미담은 없습니다. 그러니 약소국은 애당초부터 약소한 상황을 만들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아, 그런데 제가 이 글 꼭대기 프롤로그에서 한중일 3국이 역사적으로 서로를 어떻게 보는지에 대한 가벼운 관점을 이야기하며 글을 열었습니다. 한수 아래라는 표현을 쓰면서 말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엔 서로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요? 글쎄요. 제 생각엔 3국이 이젠 다 서로를 한수 아래로 보고 있지 않나요? 크기와 세기, 그리고 실체와 상관없이 말입니다. 그런데 과연 3국이 서로 동등하게 존중하는 시대가 올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기대 같지만 그래도 미래의 어느 시대엔 그런 날이 오게 되기를 희망해봅니다.

  


메이지 유신의 발상지 야마구치현 하기시에 남아있는 다이묘 모리 가문의  성터 앞 해자를 건너기 전.. 2018. 11



* 위의 연작 글 <일본 근대화의 기수>는 제 아들이 먼저 읽고 건네 준 아래 책의 내용을 일부 참고하고 인용도 하였습니다.


-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 가토 요코 지음 / 윤현명. 이승희 옮김 / 서해문집

- <근대 조선과 세계> / 최덕수 지음 / 열린책들 출판










* 일본 근대화의 기수 인물 중심 연표 요약


- 에도(도쿄) 앞바다에 미국 흑선 출현 (1853, 1854)

- 요시다 쇼인이 존왕양이론과 정한론의 이론적 체계 정립 (1850년대)

- 사카모토 료마가 삿초동맹을 통해 메이지 유신의 길을 닦음 (1860년대)

- 다카스기 신사쿠가 2차에 걸친 조슈정벌에서 승리, 막부군을 무력화시킴 (1864, 1866)

-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조슈번과 사쓰마번이 손잡은 삿초동맹 결성 (1866)

-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에 응함 (1867)

- 메이지 천황 도쿄 입성으로 메이지 유신 시작 (1868)

- 삿초 연합군이 잔존 막부파와 벌인 보신전쟁에서 승리 (1869)

- 유신 3걸이 판적봉환을 통한 폐번치현으로 통치 행정을 갖춤 (1871)

-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등이 이와쿠라 사절단으로 구미 시찰 (1871~1873)

- 조선 정벌을 주장한 사이고 다카모리는 오쿠보 도시미치 등 반대파에 의해 실각 (1873)

- 오쿠보 도시미치는 기도 다카하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만 정벌 (1874)

- 오쿠보 도시미치는 조선과 강화도조약 체결로 정한론 재점화 (1876)

- 이고 다카모리는 실각 후 세이난전쟁을 일으킴 (1877)

- 오쿠보 도시미치의 죽음으로 유신 1세대 모두 퇴진 (1878)

- 유신 2세대 실권자로 이토 히로부미 등장 (1878)

- 후쿠사와 유키치는 조선의 갑신정변 지원 (1884)

- 후쿠사와 유키치는 정한론을 확대한 탈아론 주장 (1885)

- 이토 히로부미는 대일본국제국헌법 공포 (1889)

- 오오시마 요시마사 경복궁 침입하여 친일 내각 구성 (1894)

- 이노우에 가오루 공사의 기획으로 명성황후 시해 (1895)

-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지휘 아래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승리 (1894, 1904)

-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조약을 체결함 (1905)

-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살해 (1909)

- 정한론대로 조선(대한제국) 합병에 성공함 (1910)

- 대륙 침탈로 만주국을 세움 (1932)

- 중국과의 본격 전쟁인 중일전쟁 일으킴 (1937)

- 도조 히데키의 주도로 2차세계대전 참전, 태평양전쟁을 일으킴 (1941)

-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으로 무조건 항복 (1945)

- 맥아더의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일본을 지배함 (1945~1952)

- 도쿄 전범재판 열림 (1946~1948)

- 평화헌법이라 불리는 새로운 일본헌법 공포 (1946)

-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로 일본의 주권 회복 (1952)

- 헌법에서 포기 선언한 군대인 자위대 창설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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