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벨벨 하니 한 가족인 듯합니다. 맞습니다. 그들은 한 형제입니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소설을 쓴 유명 작가들입니다. 그 3형제는 서로 의기투합하여 1847년 같은 해에 그 작품들을 출간하였습니다.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아그네스 그레이가 바로 그 작품들입니다. 어.. 그 작품들의 작가가 남자? 그렇습니다. 영국에서 초판 출간 시 그 작가들은 남자였습니다. 남자 필명을 사용한 것이지요.
그런데 샬럿 브론테와 에밀리 브론테, 그리고 앤 브론테 이 세 자매는 왜 남자 이름으로 책을 내었을까요? 로맹 가리란 이름이 있음에도 에밀 아자르란 필명으로도 활동한 20세기 프랑스의 유명 소설가처럼 그들도 그렇게 한 것일까요? 그처럼 전략적으로 일부러 필명을 사용하는 작가들도 많으니까요. 글쎄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녀들이 여성이고, 또 시대가 19세기였기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전에 맏언니 샬럿 브론테는 자매들이 쓴 시를 모아 당대의 유명 작가에게 보내 평가를 부탁합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돌아온 응답은 "문학은 여자의 일이 아니며, 여자는 작가가 되고파도 될 수 없는 일"이라는 황당한 평가였습니다. 작품의 질(質)을 평가한 것이 아니라 작가의 성(性)을 평가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들은 고육지책으로 필명을 남자로 바꾸는 도발을 감행하며 이후 각자의 소설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었습니다. 브론테 시스터스(Bronte sisters)가 벨 브라더스(Bell brothers)로 둔갑한 것입니다. 물론 진실은 나중에 밝혀졌지요.
<시대의 얼굴> 서울 전시회에 온 브론테 자매 초상화, 좌로부터 샬럿, 에밀리, 앤, 2021
그런데 별개로 세 자매가 같은 해에 출간한 이 소설들이 모두 오늘날 전 세계인이 읽는 특급 고전이 되었다는 이 사실은 어떻게 설명이 돼야 하나요? 그렇게 많은 남자 작가들이 있었지만 문학 역사상 그녀들과 같은 그런 3형제는 없었습니다. 남자의 전유물인 전쟁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놀라운 사실입니다. 과연 남자보다 위대한 여자입니다. 그녀들이 이런 기지를 발휘하지 않았다면 우린 인류의 위대한 문학 유산을 잃을 뻔했습니다. 이 사실은 브론테 자매들 이전에도 수많은 명작들이 작가가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햇볕을 못 본 경우가 많았음을 유추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꼭 문학에만 국한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20세기를 현대 문명의 시대라 한다면 19세기는 근대 격동의 시대입니다. 바로 전 18세기 말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의 시민혁명 등이 구체제라 불린 기존의 사회를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전면 변화시켜 19세기는 새로운 가치와 질서가 만들어지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혼란은 당연하였습니다. 이럴 경우 기득권을 지키려는 기존 세력과 주류 사회에 새로 진입하려는 신규 세력과의 갈등은 눈에 보이듯 뻔한 것이었습니다.
남녀 문제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남성은 기득권을 상징하며, 여성은 남성에 맞서는 도전 세력이었습니다. 하지만 혁명을 해도, 근대화가 되어도 그 안에 여성들은 없었습니다. "손님이 찾아오면 여성들은 지식인 티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응접실에 앉아 바느질을 해야 했다." 이 말은 헤리엇 마티노라는 19세기 영국의 여성 작가이자 사회학자가 당시 유럽 지식인 여성의 현주소를 가리켜 한 말입니다. 그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은 여왕이었는데 말입니다.
프랑스혁명의 성공엔 여성들의 적극적인 참여도 크게 기여하였는데 혁명 세력은 권력을 잡자마자 그녀들을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이에 참여한 여성 중 올랭프 드 구즈가 가장 크게 분개하여 여성의 권리를 주장합니다. 그녀가 싸워야 할 적이 베르사유 왕궁의 왕족과 귀족에서 혁명 정부의 남자들로 바뀐 것입니다. 그녀가 궁극적으로 얻고자 했던 권리는 여성의 정치 참여가 가능한 참정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1791년 <여성과 여성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합니다. 혁명 초기 국민 의회에서 발표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의 인간 자리에 여성을 대입한 선언문입니다. 여성도 인간이라는 것이겠지요. 그 결과 그녀는 1793년 단두대에 올라 처형을 당하였습니다.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을 주장하다 사형당한 올랭프 드 구즈, 1748~1793
비슷한 시기 영국에서 건너온 또 한 명의 여전사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양성 평등을 주장하며 혁명의 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녀는 1792년 최초의 페미니즘 저서라 불리는 <여성의 권리 옹호>란 책을 펴내었습니다. 하지만 18세기가 끝나가도록 프랑스혁명엔 여성 혁명은 없었습니다. 공포정치를 휘두른 자코뱅파가 선고한 올랭프 드 구주의 사형 죄목은 "여성임에도 가정을 안 지키고 정치를 하려 해 여성의 미덕을 망각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성은 그때까지는 집안에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19세기가 밝으면서 여성들의 사회 참여와 활동은 대세까지는 아니더라도 거스를 수 없는 흐름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여성의 권리와 양성 평등을 위해 목숨까지 잃은 혁명기 선배들의 희생도 분위기 전환에 역할을 하였을 것입니다. 더디지만 여성이 앞으로 나아가는 시대였습니다. 영국의 브론테 자매들의 경우 남자 필명을 쓰면서까지 돌아서는 갔지만 그렇게라도 여성의 특별한 재능을 사회에 어필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서구에서 개화기라 불린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영국의 브론테 자매보다 먼저인 1832년 프랑스에도 남자 필명으로 책을 낸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바로 19세기 자유와 진보의 여성 아이콘이었던 조르주 상드입니다. 그녀의 본명은 오로르 뒤팽으로 그녀가 사용한 이 남자 필명은 평생 그녀의 이름이 됩니다. 그녀는 남성과 동격이 되고파서인가 담배를 입에 물고 남장 차림으로 다니기도 했습니다.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면서 결혼 제도를 반대하고 연애를 즐긴 자유인이었습니다. 우리에겐 피아노의 시인 쇼팽의 연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지요. 그녀에게 쇼팽을 소개해 준 사람은 리스트의 연인이었는데 그녀도 다니엘 스턴이라는 남자 이름으로 사회 활동을 하였습니다. 19세기의 맨 앞에 있던 이 두 여성이 이러할진데 그때까지 여성은 본인의 이름을 드러내며 사회에 진출하기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19세기 최고의 진보 여성 조르주 상드, 1804~1876
그런데 이런 19세기였음에도 음악은 좀 달랐나 봅니다. 남성의 전유물인 정치와 지적 요소가 투입되는 문학과는 다르게 여성의 영역으로 본 것입니다. 집에 손님이 왔을 때 남성들의 눈에 긴 드레스를 입고 응접실 소파에 앉아 바느질을 하는 여식의 모습과 피아노 의자에 앉아 연주를 하는 모습은 동일하게 간주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전 세기이지만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어린 모차르트 곁에서 함께 연주하는 누나 마리안네의 모습이 그러했듯 말입니다. 19세기 멘델스존의 누나도 마찬가지였겠지요. 어찌 보면 당시 피아노로 대표되는 음악은 귀족 가문의 교양 있는 여성의 혼수품으로 간주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업 연주자까지는 여전히 힘든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모차르트의 누나도 성인이 되어서는 음악 교사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여성은 거기까지였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전업 연주는 물론 작곡에까지 손을 대는 여성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특히 작곡은 악기 연주와는 달리 남성 고유의 지적 영역인데 그 영토에 일단의 여성들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훨씬 전인 1625년 피렌체에서 오페라를 작곡한 프란체스카 카치니라는 여성도 있었지만 그것은 지극히 예외적이고 단발적인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메디치 가문 산하에서 있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19세기의 그녀들이 작곡을 한다 해도, 그리고 그것이 아무리 뛰어난 곡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연주하고 공연할 연주자나, 악단, 그리고 극장이 섭외되지 않는다면 그 곡은 햇볕을 볼 수 없었습니다. 당시엔 어느 분야이든 마찬가지였지만 기득권을 가진 남성 주류 사회를 뚫지 못한다면 그것까지는 불가능했기에 그렇습니다. 어쩌다 햇볕을 본 곡도 혹평을 받기 일쑤였습니다. 물론 평론가는 남성입니다. 그래서 여성 작곡가의 곡은 난이도가 낮고 저급한 살롱 음악이라 칭해지고 주로 가정에 머무른 음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남성들이 아무리 견고하게 방해해도 이렇게 음악적인 재능과 흥미로 분출되는 여성들의 창작 욕구까지 막을 방법은 없었습니다. 이제 그녀들은 문학계의 여성들이 사용한 것과 유사한 방법으로 그녀들이 작곡한 작품을 세상에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파니 멘델스존은 초기에 동생인 펠릭스 멘델스존의 이름으로 그녀의 곡들을 발표했습니다. 클라라 슈만은 남편인 로버트 슈만과 공동 명의로 작품을 발표해 어느 작품이 그녀의 작품인지 알 수 없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녀들의 별난 노력까지 더해졌기에 오늘날 우리는 19세기 여성 작곡가들의 명곡을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더 많은 여성들이 작곡한 악보들은 햇볕을 보지 못하고 일찌감치 버려졌거나, 아니면 어딘가에 먼지가 수북이 쌓인 채로 지금도 잠자고 있을 것입니다.
파니와 펠릭스, 멘델스존 남매의 피아노 컷
로버트와 클라라, 슈만 부부의 피아노 컷
19세기가 끝나고 20세기에 들어서야 여성들은 완전한 그녀들의 이름을 찾았습니다. 작품 발표 시 사용했던 남자의 필명은 사라져 잊히고, 남편이나 남동생의 이름에 함께 묻어 있던 그녀들의 이름도 그곳에서 나와 오롯이 그녀들의 이름으로 알려지고 평가받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프랑스혁명 시 양성 평등을 주장하며 애타게 부르짖던 여성의 참정권도 행사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여성과 여성시민의 권리 선언>을 주장하다 기요틴에 희생된 올랭프 드 구즈의 프랑스는 1948년에, <여성의 권리 옹호>를 주장한 최초의 페미니스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영국은 1928년에 완전한 여성 참정권이 주어졌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150년이나 가까이 걸린 일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프랑스와 같은 1948년 첫 선거부터 여성에게 투표권이 부여되었습니다.
꽃이 개화하는 이번 3월, 19세기 유럽 개화기를 빛낸 4명의 여성 작곡가들이 서울에 옵니다. 루이즈 파렝, 파니 멘델스존, 클라라 슈만, 그리고 폴린 비아르도가 봄처녀 제 오시듯 음악 한 다발씩 가슴에 안고 우리를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녀들은 남성 작곡가들만 즐비하던 그 시대에 이전 18세기 혁명기의 여성들처럼 격렬하게 반기를 들었다기보다는 뛰어난 재능만큼이나 아름다운 음악으로 부드럽게 19세기를 빛낸 여성들입니다. 남녀를 무론하고 인간의 심성에서 우러나오는 예술의 영역은 행동하는 정치와는 좀 다르니까요. 꽃으로 그 시대와 사회를 때렸다고나 할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녀들은 21세기가 된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그렇게 익숙한 이름들은 아닙니다. 그만큼 이번 19세기 그녀들의 음악회가 특별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루이즈 파렝, Louise Farrenc / 1804~1875 / 프랑스 / 피아니스트, 작곡가
파니 멘델스존, Fanny Mendelssohn / 1805~1847 / 독일 / 피아니스트, 작곡가
클라라 슈만, Clara Schumann / 1819~1896 / 독일 / 피아니스트, 작곡가
폴린 비아르도, Pauline Viardot / 1821~1910 / 프랑스 / 오페라 가수, 작곡가
※ 위의 <19세기 유럽 개화기의 여성 작곡가> 4인의 음악을 직접 듣고 싶으신 분들은 3월 19일 오후 5시, 서울시 중구에 위치한 푸르지오아트홀에서 동명의 타이틀로 무대에서 연주되는 그녀들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