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사람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여러 기준이 있을 수 있겠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은 안 하고 살아도 문제가 없다면 그도 행복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그래도 행복의 크기로 보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 하기 싫은 일을 안 하는 사람보다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 같은 값이라도 능동적인 행복감이 수동적인 그것보다 얻는 맛이 더 좋을 테니까요.
배가 고플 때 밥을 먹는 사람, 잠을 자고 싶을 때 잠을 자는 사람, 물론 이런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왠지 이 행복은 너무나도 당연해 보입니다. 그렇다고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과거 우리 삶이 어려웠던 시기라면 이런 인간의 1차원적인 욕망의 해소도 행복의 기준에 들어갔겠지요.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미 그런 행복쯤은 넘어 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행복의 기준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엔 여전히 존재합니다.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을 때,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도 사람들은 행복을 느낍니다. 소소하고 평범하지만 행복을 주어서입니다. 이럴 때 우리도 행복한 사람이 되지만 이 말을 한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행복한 사람이 되기에 그는 이러한 일상의 행복을 소확행(小確幸)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행복도 있을 것입니다. 소확행이 있으니 당연히 대확행(大確幸)도 있겠지요. 아무 말 대잔치 조어인가 해서 국어사전을 검색해보니 대확행이란 단어도 엄연히 존재하네요. '크고 확실한 행복'이라 정의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한 발 더 나아가 중확행(中確行).. 아, 이 말은 안 나오네요. 제가 무리했나 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 행복이 계속 늘어나고 많아져 그것이 분화되고 정교하게 쪼개지면, 그래서 사람들이 그 말을 많이 사용하게 되면, 그 단어도 사전에 등재될 것입니다.
대확행은 생활 속에서 반복 가능한 일상의 행복과는 달리 비일상적이고 특별한 행복을 말할 것입니다. 어떤 남자가 지금은 폐지되었지만 과거 출세의 최고 등용문인 사법고시를 여러 번 실패하고 각고의 노력 끝에 뒤늦게 합격을 하였다면 그는 누가 뭐라 해도 대확행을 낚아챈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다섯째 아들이었지만 아버지와 형제들의 뜻을 거스르고 무력으로 왕위에 오른 조선 초기 태종 이방원도 그의 간절한 염원을 이루었으니 행복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요즘 TV에 보이는 분들입니다.
이렇듯 대확행은 보통의 행복엔 없는 한 가지가 추가되는데 그것은 바로 성취감입니다. 위에서 예시한 매일매일 반복되는 당연한 행복과 일상생활에 악센트를 찍어주는 소확행에 이 성취감은 들어있지 않을 것입니다. 졸릴 때 잘 수 있다고 해서, 빵이 부드럽게 잘 찢어진다고 해서 성취감까지 느껴지지는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대확행은 그 행복을 만들기 위한 행복 주체자의 노력과 시간까지 들어가야 이루어집니다. 성취감은 그러한 인풋의 결과로 나오는 것이니까요. 물론 여기에 운(luck)까지 더해지면 투입된 노력은 줄어들고 걸리는 시간은 단축될 것입니다. 아, 운만으로 얻어지는 로또 당첨 같은 행복은 이 글에선 사양입니다.
지난주 이 브런치에서 어느 친애하는 작가님(박지향님.. 허락 없이 이렇게 고귀한 존함을 올리는 저를 용서해주세요)의 글을 읽고 퍼뜩 과거에 알던 누가 떠올라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적어도 그는 제 기준으로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입니다. 제목에서 보이는 위대한 현대 음악가인 구스타프 말러와 연관된 사람입니다. 박 작가님은 그의 9번 교향곡에 심취되어 글을 쓰셨는데 이 남자는 그의 2번 교향곡과 연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박 작가님은 말러도 말러지만 그의 9번을 지휘한 어느 지휘자의 매력에 빠지셨는데 제가 세상 부러워하는 이 행복한 남자도 말러의 지휘자이긴 합니다. 그런데 그는 특이하게도 2번만 지휘하였습니다.
길버트 카플란이란 남자입니다. 말러와 관련해 신화와 같은 그의 전기와 영화와 같은 지휘자 등극으로 이미 유명인이 된 그입니다. 그는 기관 투자 전문 간행물인 <Institutional Investor>의 오너 창업자로 큰돈을 번 성공한 기업가였습니다. 세속적인 출세를 이룬 사람으로 여느 음대나 음악원을 나오지 않은 비음악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그가 그 어렵다는 말러의 2번 교향곡 전문 지휘자가 된 것입니다. 그가 20대 초 경영대학원생 시절 카네기홀에서 들은 말러의 그 곡이 그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번개를 맞은 듯한 대단한 충격, 종교로 치면 그 연주회에서 감동감화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말러의 2번 그 곡엔 '부활'이란 부제가 달렸는데 그래서 그런지 당시 그 곡을 들으며 그의 마음속에선 새로운 삶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언젠간 저 곡을 내가 꼭 지휘하리라"라는 결심이 선 것입니다.
길버트 카플란(1942~2016)의 역사적인 말러 2번 초연, 카네기홀, 1982
이후 비즈니스로 커다란 부를 이룬 그는 그 부를 바탕으로 말러의 지휘에 정식으로 도전합니다. 39세부터 음악 공부를 시작한 것입니다. 대위법, 화성학, 지휘법 등 음악 전반에 대한 교육을 개인 교습을 통해 맹렬히 학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82년, 그의 나이 불혹에 도달한 40세에 이르자 추호의 의심도 없이 말러 2번 교향곡에 지휘자로 데뷔합니다. 그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 온 것입니다. 지휘한 곡도 동일했지만 오케스트라도 그가 1965년 말러 2번을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이 아메리칸 심포니로 세팅되었습니다. 지휘자만 스토코프스키에서 그로, 공연장은 같은 뉴욕에 소재한 카네기홀에서 링컨센터로 바뀌었습니다.
유수의 아메리칸 심포니 단원들에 둘러싸인 포디엄 위에 처음 올라섰을 때 그의 기분이 어땠을까요? 그의 눈밑 보면대 스코어엔 말러의 2번 교향곡 음표들이 어지러이 펼쳐져 있고, 눈앞엔 그의 손끝만 바라보는 수많은 연주자의 눈들이 그를 빙빙 돌게 했을 것입니다. 그 순간 그는 이번 달 출간할 잡지를 펼쳐 보이며 그의 최종 결재를 기다리는 그의 회사 편집국 직원들 앞에 선 일상의 평정심을 느끼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등 뒤 아래엔 역시 또 그의 손끝만을 바라보는 연주자보다도 더 많은 관객들도 있었기에 그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과거엔 그 편안한 관객석이 그의 자리였습니다. 그곳의 초짜 관객이었던 그가 17년 후에 부활하여 무대 위로 승천해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완벽한 쇼이고 이벤트였을 것입니다. 갑부가 돈으로 공연장과 악단을 사서 그의 꿈을 이룬 것이지요. 그날 지휘를 하며 카플란은 공연 품질과 상관없이 지구 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연주 후 평론가들의 극찬으로 세계 유수의 교향악단에서 지휘 초청이 이어진 것입니다. 가장 먼저 런던 심포니가 그를 불렀고 말러의 음악적 고향인 빈 필에서도 그를 불렀습니다. 물론 그들이 의뢰한 곡은 말러의 2번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2005년 시점, 전 세계 31개 오케스트라에서 말러의 2번을 50회 이상 공연한 베테랑 지휘자가 됩니다. 그 해 말엔 우리나라 성남 아트홀 개관 기념 방한 공연을 갖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의 레퍼토리는 언제나 그러했듯 말러 2번 한 곡이었습니다. 어딜 가든 그 곡은 90여분의 어마어마한 대곡이기에 그 곡 하나로 공연을 채우기에 충분했으니까요.
성남 아트홀 개관 기념 내한 공연 시 인터뷰 중인 길버트 카플란, 2005
이렇게 한마디 말이 시가 되고 노래가 되듯, 그의 일회성 지휘 이벤트는 그를 마에스트로로 다시 태어나게 하였습니다. 사실 지구 상에서 말러의 2번을 그만큼 잘 아는 지휘자도, 연주자도, 그리고 연구가도 없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오히려 원작자인 말러보다도 2번 교향곡에 한해서는 카플란이 더 잘 알 것입니다. 말러가 아무리 천재라 하더라도 1시간 30여분이나 되는 그 긴 곡의 세세한 구간까지 다 기억하진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쓴 교향곡만도 10개(그중 1개는 미완성)에 달하는 데다가 그것들은 다 기나 긴 대곡들이니 말입니다.
다작의 소설가는 그가 과거에 쓴 소설의 디테일한 단어나 문장까지는 다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저부터도 필력이 짧음에도 그간 쓴 글의 디테일까지는 전부 기억하지 못하니까요. 이것은 가왕이라 불리는 나훈아씨나 조용필씨의 경우에도 과거에 불렀던 노래의 가사를 전부 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jtbc TV 인기 프로그램였던 '히든 싱어'에서 원곡 가수가 모창 가수에게 지는 것을 우리는 왕왕 목도하곤 했습니다.
카플란은 말러의 2번을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다 암기했을 것입니다. 아마 눈 감고도 지휘가 가능하고, 그에게 오케스트라에 편성된 모든 악기의 악보를 필사하라고 하면 그것도 가능했을지 모릅니다. 1982년부터 2016년까지 34년 동안 그는 그 곡만 연구하고 지휘했으니까요. 그 긴 기간 중 그가 말러의 2번 이외에 지휘한 다른 곡이 딱 한 곡 있었는데 그것은 엉뚱하게도 미국 애국가였습니다. 아마도 미국에서의 공연이 국경일이라 그의 곡 바로 앞에 세리머니가 있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외모에서도 드러나는 고뇌하는 천재 구스타프 말러, 1860~1911
설사 거부 카플란의 그 지휘가 그의 라이프 버킷 리스트 중 한 개를 덜어낸 단 한 번의 이벤트에 그쳤다 해도 그것만으로라도 그는 지휘자로서 존경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말러의 이 곡이 길기도 하지만 난해하고, 철학적이고, 신학적이라 해석 불가한 삶과 죽음의 기묘함 속에 동원 가능한 모든 음악적인 자원들을 총집합시켰기 때문입니다. 그가 만약 우리 귀에 익숙한 요한 슈트라우스의 라데츠키 행진곡이나, 어렵다곤 하지만 베토벤의 5번 교향곡을 듣고 감동을 받아 지휘자로 도전장을 던졌다면 그의 이야기는 이렇게 신화로까지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만큼 말러는 넘사벽이기에 그렇습니다.
저는 카플란의 이 이야기를 처음 알게 된 6년 전 "그럼 나는 2번에 어떻게 반응할까?"라는 생각으로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말러의 그 곡을 1주일 내내 하루에 한 번씩 들었습니다. 일단 첫날에 카플란과 같은 충격은 오지 않았습니다. 대신 다른 충격을 받았는데 5악장의 길고 어려운 것은 각오하고 들었으니 그것은 차치하더라도 대개의 유명한 심포니는 처음 들어도 왠지 귀에 익숙한 유려한 주제부라는 것이 있는데, 그리고 그것은 가벼운 변주와 함께 반복되기도 하는데, 이 곡은 도통 90여 분간 그러한 구간이 한 군데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심각한 불협화음으로 소음처럼 들리는 구간도 많아 마치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것과 같은 느낌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베토벤 9번처럼 끝부분에 합창이 등장하는 것도 이색적이었는데 그 이전에 무대 앞에 선 두 명의 여가수가 아리아를 부르는 것도 색달랐습니다. 말러를 가리켜 교향곡 해체 직전 끝단까지 간 작곡가라는 평이 과연 무색하지 않은 경험이었습니다. 그래도 감상 1주일이 지나도 말러는 끝내 제게 오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어떻게 이런 음악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말러의 천재성에 대한 경탄은 계속 제게 왔습니다. 좋다는 것은 못 느꼈지만 다르다는 것은 확실히 느낀 것이지요.
방대한 오케스트라 연합 군단이 동원돼야 공연 가능한 말러의 교향곡들(8번), 네덜란드 필, 2019
이후 저는 말러에게 대중적인 성공을 안겨준 8번 '천인' 교향곡도 몇 번 들었습니다만 결론은 2번과 비슷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쓰기 전 어제도 사전 심호흡을 크게 하고 오래간만에 말러의 2번과 8번을 다시 들었는데 웬걸 마치 처음 듣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들을 때마다 처음 듣는 것 같은 새로움을 주니 그것들은 좋은 곡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렇게 역설적으로라도 말러를 찬미하지만 사실 저의 낮은 음악 수준에 자괴감이 밀려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알게 된 9번은 달랐습니다. 그 곡은 지난주말에 처음 들었는데 상대적으로 이지 리스닝한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연주 중 스치듯 지나가는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넉넉하고 편안한 미소까지 더해서 말입니다. 그는 오케스트라 연주자의 연주가 다 끝났어도 한동안 무대에 서서 고요 속에 홀로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오홋, 말러의 첫 소확행.. 감사를 드립니다.
길버트 카플란은 생전에는 해석 불가한 난해함으로 오늘날만큼 평가받지 못한 말러를 유명하게 만든 인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대 위의 음악적인 이야기도 좋아하지만 이런 무대 밖 백 스토리도 그 이상으로 좋아하니까요. 말러의 대중화에 기여를 한 것입니다. 첫째 손가락은 언젠가 '나의 시대가 올 것'이라며 유언과도 같은 예언을 한 말러를 대중에 전면적으로 알린 뉴욕 필의 레너드 번스타인일 것입니다. 그는 무명의 카플란과는 달리 그의 유명세로 50여 년간 잠자고 있던 말러를 부활시켜 그가 예언한 그의 시대를 오게 하였습니다.
번스타인이 말러 2번 교향곡을 열정적으로 지휘하는 모습, 에든버러 페스티벌, 런던 필, 1974
번스타인의 이러한 공헌이 있었기에 카플란도 말러의 2번을 1965년에 만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카플란은 지휘 외에도 말러 재단을 만들어 그의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하는 데 많은 공헌을 하였습니다. 이 정도면 말러를 만난 이후로 평생 말러리안으로 산 그는 진짜로 행복한 남자라 하겠습니다. 온전히 말러를 소유했으니까요.
세상엔 지금도 카플란처럼 말러의 음악을 듣고 그것을 오마주해 그 곡을 지휘하겠다는, 또는 연주해보겠다는 제2의, 또는 제3의 비음악인 말러리안들이 또 있을지 모릅니다. 그가 말러의 2번 남자로 성공했으니 남은 그의 교향곡들 중에서 말러의 1번 남자, 또는 9번 남자 등을 꿈꾸면서 말입니다. 부디 그런 행복한 남자가 또 출현하기를 기대해봅니다. 아참, 꼭 남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겠네요. 행복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