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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Feb 18. 2022

올댓 바빌론 유수

All That Babylonian Captivity

1842년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 그 공연이 끝난 후 20대 후반의 베르디는 일약 스타덤에 오릅니다. 그 오페라는 그와 관객의 기억에서 이전 그가 작곡한 두 번의 실패작을 깨끗이 사라지게 했으며, 그를 미래 오페라의 왕으로 예약하게 하는 명작이었습니다. 곡이 워낙 좋기도 했지만 당시 그의 조국 이탈리아가 처한 시대상과 딱 맞아떨어져서도 그랬습니다. 이렇듯 일반 성공을 뛰어넘는 커다란 성공은 종종 외부의 힘이 더 크게 작용하기도 합니다.


특히 3막 2장에서 울려 퍼지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그 오페라의 절정이었습니다. 그의 이 곡은 당시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북부 이탈리아 사람들을 똘똘 뭉치게 하였으니까요. 음악의 힘입니다. 오페라 역사상 최고의 합창곡으로 뽑히는 그 곡은 통일 이탈리아를 향해가는 진군의 합창이 되었습니다. "가라! 내 마음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 이렇게 시작하는 그 곡의 가사처럼 말입니다.


베르디의 출세작 오페라 <나부코>의 이야기입니다. 그 오페라는 구약 성서에도 등장하는 유대인의 흑역사 바빌론 유수를 배경으로 합니다. 일전에 이곳 브런치에서 쓴 아비뇽 유수의 그 유수입니다. 그때 그 글시작하며 전제적으로 유수(幽囚)란 단어의 생경함과 쓰임새부터 논하였습니다.


오페라 <나부코> 중 절망에 빠진 히브리 노예들의 모습,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2017


역시나 그 단어는 글을 쓴 이후에도 단 한 번도 보이거나 들리지 않았습니다. 유수는 역사책에서 문헌으로 딱 두 개의 사건에서만 쓰이고 우리 실생활에선 거의 고어와 다를 바 없기에 그렇습니다. 감금, 억류, 연금, 잡아가둠 등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편한 말들이 즐비하기에도 그럴 것입니다. 아비뇽 유수를 소재로 한 제 글 제목이 <올댓 아비뇽 유수>이었듯, 바빌론 유수를 소재로 한 이 글 제목도 라임을 맞추어 <올댓 바빌론 유수>라 정하였습니다.


14세기에 발생한 아비뇽 유수에선 교황이 잡혀가고 억류되었다면 그 2천 년 전인 기원전 6세기에 발생한 바빌론 유수에선 유대인이 포로로 잡혀가서 억류되었습니다. 아비뇽은 로마 바티칸에 있어야 할 교황이 감금된 프랑스의 도시이고, 바빌론은 유다 왕국에 있어야 할 유대인들이 잡혀간 신바빌로니아의 수도입니다. 각각의 유수 기간은 바빌론은 59년, 아비뇽은 68년이었습니다.


유대 민족의 지도자 사울은 BC 1000년 경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을 건국합니다. 그 이전 해방자인 모세가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정착했으나 그들이 그때부터 국가 형태를 갖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아랍에미레이트연합(UAE, United Arab Emirates)이 그러하듯이 12개 지파의 부족 연합으로 느슨한 형태로 살다가 당시 필요에 의해 부족 연합체인 국가를 세운 것입니다.


이것은 먼저 그 땅에 살던 블레셋인들을 대적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성경의 블레셋은 과거엔 필리스틴(Philistine)으로 불렸다가 오늘날 팔레스타인(Palestine)이 된 지역으로 과거 유대인그 땅을 가나안(Canaan)이라 불렀습니다.


사울왕의 곁엔 세컨드 맨 다윗이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비파 연주로 그의 불치병인 우울증을 고쳐주고 왕국을 위협하는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물리치는 등 그에겐 일등 신하이자 공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대중에게 인기가 좋은 다윗을 호시탐탐 죽이려고 했습니다. 결국 다윗은 견디다 못해 독립해서 나가 유다 왕국을 세웠는데 후에 사울이 전장에서 죽자 두 국가를 통합하여 명실상부한 이스라엘 왕국의 왕이 됩니다.


치세 중 다윗왕은 부인이 많았음에도 부하 장수인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에게 반하여 그녀를 취하기 위하여 우리아를 사지로 보내 죽게 합니다. 그의 일생에서 지울 수 없는 치명적인 악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후계자가 된 아들을 얻었는데 그가 지혜의 왕이라 칭송받는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왕은 태평성대를 이루었지만 그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이르러 문제가 발생합니다. 부자가 3대를 못 간 격입니다.


솔로몬왕 이후 남북으로 분열된 유대민족, BC 931


솔로몬왕 이후 유대 12개 지파의 연합이었던 이스라엘 왕국은 이 중 10개 지파가 떨어져 나가 여로보함이라는 지도자를 옹립하여 북부 지역의 이스라엘 왕국으로 분리되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의 본래 이스라엘 왕국은 남은 2개 지파를 가지고 남부 지역의 유다 왕국이 됩니다. 이는 마치 7개 부족 연합체 국가인 아랍에미레이트연합(UAE) 건국 시 합류하지 않고 개별로 독립한 부족인 바레인과 카타르를 연상하게 합니다.


북부 이스라엘의 수도는 후에 사마리아로 바뀌었고, 남부 유다의 수도는 본래대로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연유로 인해 신약에서 등장하는 사마리아인이 정통 유대 기득권자들에게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분리된 북부 이스라엘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통칭해서 사마리아인이라고 불렀다고 하니까요. 이후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게 멸망되고(930~720 BC), 유다는 그 앗시리아를 멸망시킨 신바빌로니아에게 멸망됩니다(931~586 BC). 그리고 동시에 유다 왕국의 바빌론 유수가 시작됩니다.


유다 왕국을 멸망시킨 침략자는 위의 베르디의 출세작 오페라 제목인 나부코(Nabucco)입니다. 네부카드네자르(Nebuchadnezzar)라 불린 왕의 어려운 이름이 이태리어로 표기되면서 뒤가 잘리어 간단하고 쉬어졌습니다. 이 네부카드네자르는 성서에선 느부갓네살이란 역시 또 어려운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바빌론 유수의 주역인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642~562 BC


본래 바빌로니아는 고래로 그 지역의 맹주였습니다. 인류 4대 문명의 발상지 중의 하나인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을 끼고 있어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일어난 지역입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에덴동산도 이 강변에 위치한 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역사상 최초의 법전이라 하는 함무라비 법전도 이 바빌로니아의 유산인 만큼 그만큼 그곳은 문명화된 지역이라 하겠습니다.


이 바빌론은 철기 문명을 앞세운 히타이트에게 BC 1500년 대에 멸망합니다. 그리고 한참 후인 BC 625년 칼데아 부족인 나보폴라사르왕이 당시 그 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앗시리아를 멸망시키고 다시 바빌로니아란 이름으로 국가를 세우는데 이 국가를 고대 바빌로니아와 구분하기 위하여 신바빌로니아라 부르는 것입니다. 바빌론은 신구 바빌로니아의 수도 이름입니다.


그리고 건국자인 아버지에 이어 2대 왕 네부카드네자르가 등장합니다. 유대인에겐 침략의 원흉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는 유다 왕국을 여러 차례에 걸쳐 공격하여 멸망시켰습니다. 그의 공격으로 예루살렘은 초토화되었고 아름다운 솔로몬 성전은 파괴되었습니다. 침략할 때마다 그는 유대인을 살던 고향에서 빼내어 포로로 수도인 바빌론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이것이 바빌론 유수입니다. 과거 해방자 모세의 안내로 이집트로부터 탈출하여 기껏 돌아온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 땅에서 유대인은 다시 떠나야만 했습니다.


BC 500년대 바빌론 유수 시 지역도


바빌론 유수는 1, 2, 3차(BC 597, 586, 582)에 걸쳐 시행되며 4만 5천여 명 이상의 유대인이 끌려갔습니다. 그 와중에 항거하던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유다가 멸망된 2차 바빌론 유수 시 체포되어 두 아들의 처형 장면을 눈앞에서 목도하고 바로 눈이 뽑힌 채 바빌론으로 끌려가 옥사하였습니다.


바빌론에서 유대인은 노예 생활을 하며 주로 지구라트라 불리는 신전 건축 공사에 동원되었습니다. 그곳의 위치는 오늘날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와 가까운 남부 지역입니다. 당시 노예 생활도 힘들고 고달팠겠지만 야훼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섬기는 그들이기에 이방인의 신전 공사는 참기 힘든 모욕적인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60여 년 간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기약 없는 노예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시기였지만 긍정의 꽃도 피었습니다. 가장 큰 꽃은 유대인의 결집입니다. 이상하게도 인간은 등 따스하고 배 부를 때엔 단결력과 결속력이 생기기 힘들지만 어려울 때는 똘똘 뭉치는 강한 힘이 나옵니다. 오늘날 전 세계 유대인이 갖고 있는 강한 힘, 유대인의 근간인 시오니즘(Zionism)의 뿌리가 바로 이때 생깁니다. 2천5백 년 전 60여 년간 겪은 이러한 고통으로 인해 그들 몸속엔 시오니즘이라는 DNA가 생기고 대대로 상속된 것입니다. 12개 지파로 흩어져있던 유대인이 단일한 정체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유대인 공동체의 시작입니다. 물론 그들의 시련은 그 이후에도 역사 속 이곳저곳에 반복되어 그 힘은 점점 더 강화됩니다.


두 번째는 문명화이고 시스템화입니다. 바빌론이라는 문명국을 경험하며 그들도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깨닫고 배운 것입니다. 이곳에서 이들은 그간 휘뚜루마뚜루 살아왔던 과거 양치기 생활이나 종교 제례를 벗어나 유대교의 체계와 생활양식을 만들고, 경전도 집대성하는 등 선진적인 발전을 이룹니다. 그들이 포로 생활을 하던 바빌론은 구약의 선지자들 조차 황금의 도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묘사할 정도로 부강한 문명과 과학을 갖춘 도시였습니다. 인간의 허망한 욕망의 산물이지만 바벨탑을 건축했고, 네부카드네자르왕이 고국의 산천초목을 그리워하는 왕비를 위해 세계 7대 불가사의에 포함된 사막의 공중정원을 조성할 정도로 발전된 도시였으니까요.   


바빌론의 공중정원 상상도. 뒤로 바벨탑이 보임.


드디어 그들이 해방됩니다. 놀랍게도 구원자는 출애굽 했던 모세 때와 같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오리엔트의 새로운 맹주인 페르시아가 일어나 BC 539년 신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것입니다. 정복자는 키루스 대왕이라 불리는 자입니다. 성경에서는 페르시아는 바사, 키루스는 고레스로 명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기적과 같은 이상한 일이 발생되었습니다. 그가 정복하자마자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준 것입니다. 노예는 주인이 바뀌어도 노예인 것이 당연한데, 그래서 누가 와도 반가울 일이 없는데 바뀐 새 주인이 난데없이 노비문서를 다 소각해줄 테니 이제 그만 집으로 가라고 한 것입니다.


저는 이 사건이 너무 신기합니다. 저보고 세계 역사에서 가장 이해 못 할 사건을 으라면 전 이 일을 꼽습니다. 오죽하면 제가 이곳에서 쓴 <일본 근대화의 기수>에서 "단언컨대 아무리 선한 강대국이라도 약소국보다 더한 손해를 감수한 경우는 역사상 단 한 건도 없다"로 단정하며, 역사에서 강대국이 베푼 최고의 선의로 이 사건을 꼽았으니까요. 더구나 기계나 장비가 열악했던 고대 사회에선 사람이 최고의 노동력이고 전시엔 전투력으로도 동원되는데 페르시아의 키루스는 그것을 그냥 다 포기하고 쿨하게 유대인을 고국으로 돌아가라고 한 것입니다. 유대인 입장에선 "야훼 하나님 만세"를, 아니 "키루스 대왕 만세"를 외쳤을 것입니다. 그도 그런 것이 그 일로 인해 그는 이방인 중에 유일하게 유대인이 기름 부은 자, 메시아로 칭송한 자가 되었으니까요.


기독교나 유대교에 경도된 혹자는 키루스 대왕이 페르시아의 바빌론 정복을 예언한 70여 년 전 유대 선지자의 식견에 놀라 풀어주었다는 설도 제기하는데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상식적으로 그 예언이 그 이방인 왕에게 그렇게 엄청나게 들릴 만한 일도 아니었지만 당시 키루스가 풀어준 민족은 유대 민족뿐만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는 그 자체로 노예해방론자이고 훌륭한 사해동포주의자였습니다.


유대인의 바빌론 유수를 끝낸 페르시아의 키루스, 재위 550~529 BC


이렇게 키루스의 예상치 못한 은전으로 유대인은 60여 년간의 비빌론 유수를 졸업(BC 538)하고 다시 시온 언덕이 있는 그리운 본향 가나안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체계화된 율법으로 하나님 뜻에 어긋나는 나쁜 짓 안 하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해피엔딩으로 바빌론 유수는 막을 내립니다. 반면에 2천여 년 후 일어난 아비뇽 유수에선 프랑스의 아비뇽 교황청에서 7명의 교황이 70여 년간 복무하고 로마로 돌아간 후에도 계속해서 분란이 일어나 서방교회의 대분열이 일어났습니다.


바빌론 유수는 역사적으로도 그렇지만 성서적으론 더 비중 있게 다루는 사건으로 보입니다. 구약 성서의 여러 편에서 얘기되기도 하지만 후대에 쓰인 신약 성서의 첫 장부터 등장하기에도 그렇습니다. 첫 편인 마태복음을 펼치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누구를 낳고, 누구는.. 낳고, 계속 낳고..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선대로부터 주욱 대대로 나열되는데 특징적인 것이 중간중간 14대씩 끊어서 설명을 합니다.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14대, 다윗에서 바빌론 유수까지 14대,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빌론 유수에서 예수 그리스도까지를 14대로 끊고 있습니다. 총 42대까지 한 호흡으로 하기에는 숨이 벅차 저자인 마태오가 이렇게 끊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만큼 바빌론 유수는 종교 역사적으로 의미있다루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신약 성서의 마지막 편인 요한계시록에도 바빌론은 언급이 됩니다. 네거티브의 상징적인 장소로 그곳은 마치 소돔과 고모라 이상으로 나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타락, 증오, 악덕, 음행의 도시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긴 세월 동안 고통을 준 도시이고 국가이니 그것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우리가 일본을 그렇게 대하듯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계시록의 저자 요한은 그 시점 바빌론 유수가 600여 년 전의 조상들이 겪었던 일이었음에도 그 역사적 분노를 그대로 가지고 쓴 듯합니다.


바빌론 유수 시 포로로 잡혀가는 유대인


바빌론 유수엔 유대인의 역사 중 중요한 한 가지가 더 포함되어 있습니다. 디아스포라(Diaspora)입니다. 바빌론에 잡혀간 히브리 노예들은 그곳에서 자나 깨나 시온의 언덕으로 돌아갈 날만을 학수고대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보우하사, 아니 키루스왕이 보우하사 그들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런저런 이유로 돌아가지 못하거나 아니 간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전 바빌론 유수가 시행될 때 그 화를 피해 페니키아나 이집트 등으로 도피한 유대인들도 많았습니다. 이렇게 바빌론 유수 전후 유대인들이 고국을 떠나 돌아오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있는 것을 가리켜 디아스포라라고 합니다. 바빌론 유수는 그것의 시작으로 1차 디아스포라라 부릅니다.


이후에도 디아스포라를 촉발하는 몇 건의 비극적인 사건들이 유대 민족에게 또 일어납니다. 서기 60년대 유다 왕국은 로마의 식민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열찬 독립전쟁을 벌이는데 이때 예루살렘은 또 한 번 초토화됩니다. 결국 서기 70년 마사다 요새라 불리는 곳에 남겨진 최후 1천여 명의 유대인은 전세가 로마로 완전히 기울자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죽음으로 전멸을 당합니다.


유대교 율법상 자살을 할 수 없어 타살 형태로 죽기 위해 동족인 자국민을 찌르며 모두 전사한 것입니다. 전멸을 당한 것이 아닌 스스로 전멸식을 거행한 것입니다. 마지막 남겨진 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자살을 했거나, 아니면 그 바로 전 2인이 남았을 때 서로 동시에 찔렀을 것입니다. 이 시대에도 화를 피해 도피한 많은 유대인들이 있었는데 이것을 가리켜 2차 디아스포라라 부릅니다. 가장 최근엔 2차세계대전 시 독일 나치의 압박을 피해 전 세계 이곳저곳으로 도피한 많은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바빌론 유수는 베르디 이후 현대에 들어와 또 한 명의 음악가에 의해 전 세계에 알려집니다. 아, 멤버가 그룹이니 한 명은 아니네요. 1978년 독일의 그룹 보니엠이 발표한 <Rivers of Babylon>이 바로 그 곡입니다.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으로 크게 히트 친 이 곡은 흥겨운 레게 풍이지만 가사는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에 등장하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과 같은 슬픈 노랫말입니다. 제목에 등장하는 바빌론의 강은 유프라테스강을 가리킵니다. 그곳에 앉아 유대 히브리 노예들이 시온을 그리며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인데 가사는 구약의 시편 137편을 그대로 옮겨와 노래에 담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세대에선 바빌론 유수를 역사책보다, 그리고 베르디보다도 더 널리 알린 추억의 보니엠입니다. 


https://youtu.be/vYK9iCRb7S4


https://youtu.be/ntflUU_xmq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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