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2일 미국의 세계적인 만화 회사인 마블 코믹스에서 한국인 히어로로만 구성된 영웅 사단 만화를 오는 11월 출시한다고 발표를 하였습니다. 쉽게 말해 마블을 대표하는 영웅 팀인 어벤져스와 같은 한국인만의 팀을 꾸리겠다는 것입니다. 리더 격인 태극기를 비롯하여 7인의 남녀로 구성된 그들 팀의 이름은 '타이거 디비전(Tiger Division)'으로 한국과 지구촌, 그리고 지구를 벗어나 우주의 과거, 현재, 미래의 악당(Villain)들과 싸울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들 히어로 캐릭터들은 전년인 2021년 발표됐지만, 그리고 한국인 히어로가 마블의 만화에 간간히 등장도 하였지만 이렇게 한국인만으로 구성된 히어로들이 팀으로 활동하게 되는 것은 처음입니다. 물론 만화 속 세계에서 입니다.
지난해 개봉한 마블의 영화 <이터널스>에서 한국계 배우로는 최초로 마동석이 길가메시라는 히어로를 연기했습니다. 하지만 길가메시는 한국인이나 한국계 히어로는 아닙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 바빌론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영웅의 이름이지요. 이렇게 지금 세상에 갓 탄생한 타이거 디비전이 당분간은 만화책에서만 활동하게 되겠지만 그들이 악당들을 많이 물리쳐 지구인들이 환호하게 되면 언젠간 영화에서도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타이거 디비전>이란 이름으로 <어벤져스>와 같은 영화로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상상이지만 그런 날이 온다면 어떤 한국 배우들이 그들 캐릭터의 실사판 주인공을 맡게 될지 그것도 화제가 될 것입니다. 마블이 이렇게 한국 영웅 팀을 조직할 정도로 히어로물과는 별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동양인 우리나라에 이렇게 공을 들이는 이유는 그들이 만든 영화들이 우리나라에서 대박을 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들 팬이 많다는 것이지요.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마블 히어로 캐릭터와 영화는 지속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한국인 히어로로 구성된 마블의 타이거 디비전 포스터
마블이 타이거 디비전 시리즈를 만화로 선보이는 것은 그들 마블의 뿌리가 만화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현대 대중문화 시장을 지배하는 영화로 바로 제작하지 않는 것은 성공의 확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다소 안전한 테스트 마켓 성격의 만화부터 시작하는 것이겠지요. 사실 아시다시피 지금 영화에서 맹활약을 벌이는 베트맨, 슈퍼맨, 스파이더맨, 원더우먼 등도 시작은 모두 만화책이었습니다. 영화가 없던 시절 그들은 만화책에서만 활동하였으며 당시의 인기는 지금 영화 못지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랬던 그들이 어느 한때 모두 개점휴업인 상태로 활동을 멈추고 죽어있던 불행한 시절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영웅들이 미국에 떠서 반갑기는 하지만 그 뉴스가 그렇게 반갑지만은 아닌 것은 그들 영웅들이 모두 한국인임에도 한국에 아무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인이 우리의 역사 속에서 발굴하거나 창조한 영웅이 아닌 미국인이 상상 속에서 오로지 상업적인 용도로만 발굴한 영웅들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들의 영웅들은 모두 과거 만화 속에서 그들 조국을 위해 활동했던 뿌리 깊은 영웅들인데 말입니다. 우리에게도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런 영웅들이 활발히 활동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뿌리는 있되 긴 세월 꽃을 피우지 못하고 중도에 죽어 부활하지 못한 안타까운 영웅들입니다. 아래 글은 그런 영웅들을 떠올리며 약 1년 전에쓴 글입니다. 마블의 한국인 영웅 출현 뉴스를 보고 오늘 아침 그들을 소환해봅니다. 조금 손도 보았습니다.
지난주 아주 오래간만에 만화를 보았습니다. 어린 시절 보았던 추억의 만화를 다시 본 것입니다. 추억의 만화지만 그 만화는 그때와 같은 종이 위의 만화는 아니었습니다. PC 화면에 <공포의 외인구단>만화가 무료라는 배너 광고가 떴길래 다른 만화도 아니고 광적으로 좋아했던 인기 만화인 데다 공짜라고 하니 한 번 다시 보자 생각하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클릭을 해서 온라인 월드로 입장을 했는데 이것이 5편을 넘어가면서 지금부터는 유료로 구독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떴습니다. 맛보기로 공짜로 5편까지 보여줬으니 더 보고 싶으면 돈을 내라는 것입니다. 이런.. 더 볼까말까 고스톱을 망설이며 고민하다 결국은 유료로 전환하여 끝까지 보았습니다.
이럴 경우, 저의 경우 고스톱 고민의 본질은 유료보다는 회원 가입입니다. 이 한 번을 위한 회원가입의 효용성도 그렇지만 그보다는 제 신상을 모르는 누군가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내키지 않아서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대개 "뒤로 돌앗!" 스톱을 선택하였지만 이번엔 제가 기억하는 한 처음으로 "전진 앞으로!" 고를 선택했습니다. 속된 말로 낚인 것입니다.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했겠지요. 다시 보고 싶은 만화를 끝까지 완독한 것도 그렇지만 이렇게 독후 글감이 되어 글까지 쓰게 되었으니 그 고는 충분히 해봄직한 시도였습니다.
<공포의 외인구단>에 등장하는 6명의 캐릭터. 주인공 오혜성은 좌에서 두 번째
사내아이들에게 어린 시절 눈으로 즐긴 최고의 놀이 기구가 만화책인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또한 독서였는데 만화는 일반 서적보다는 낮은 대접을 받던 시절이었습니다. 아이들은 한글을 깨치기가 무섭게 만화책을 손에 붙들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머니에 10원 지전 한 장이라도 생길라치면 만화 가게를 참새가 방앗간을 가듯 들락거리고 때론 집으로 빌려와 형제들과 또는 친구들과 함께 만화 삼매경에 빠지곤 하였습니다. 시험이라도 끝나는 날이면 학교 옆 만화 가게들은 자리가 없어 기다리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만화를 부모들은 어떻게 하든 아이와 떼어놓으려고 눈에 불을 켜던 시절이었습니다. 초등학교 아니고 국민학교라 불리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성장기 어느 한 때 아이들의 필수 코스로 굳어질 것만 같던 만화는 지금은 사라져 이렇게 흘러간 옛이야기로 바뀌었습니다.
지금 아이들로 치면 사라진 만화를 대체한 놀이는 바로 게임일 것입니다. 거의 모든 사내아이들이 부모 눈을 피해 틈만 나면 게임에 파묻혀 지내니까요. 만화와 게임을 대하는 부모의 공통적인 반대 시각은 그것들이 공부를 방해하는 불온물(?)에 기인합니다. 아이들은 그것들을 접하며 부모의 우려와는 반대로 지력이 성장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만화 세대인 저조차도 이상하게 우리 아이의 게임에는 야박하게 굽니다. 그 아이가 성인이 된 지금도 말입니다.
그만큼 중독성이 강하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중독성이 무서운 것은 그것을 할 때는 일체 다른 생각을 못하고 그것에만 집중하기에 그렇습니다. 공부를 하면서도, 친구와 대화를 하면서도 우리의 머릿속에선 다른 생각이 곧잘 떠올려지곤 합니다. 중독성이 없어서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도박이나 마약을 할 때는 다른 생각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중독 물질이거나 대상이기에 그렇습니다. 아이를 대하는 부모는 만화나 게임도 그런 부류에 들어간다고 보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요즘 그 게임을 만드는 몇몇 회사들은 국내 최고의 선망받는 대기업으로 우뚝 서 취준생이 가고픈 1순위의 회사가 되었습니다. 입사하면 그 아이의 부모도 매우 자랑스러워할 것입니다.
게임에 영웅(Hero)이 있듯이 그 시절 만화에도 영웅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 만화 주인공으로 작가인 만화가가 창조한 캐릭터입니다. 이런 주인공이 등장하는 만화책은 한 번에 전집형 완결본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잡지처럼 1권, 2권 순차적으로 나오기에 그것을 기다리는 어린 독자들은 애가 타곤 했습니다. 지금 정기 간행물처럼 정해진 날에 나오는 것이 아닌 엿장수 가위질처럼 만화가 맘대로인 시절인지라 - 제 기억엔 그렇습니다 - 만화 가게를 들러서 주인아저씨에게 어떤 만화 몇 편 신간이 나왔는지를 확인하며 나왔으면 쾌재를 부르며 눌러앉아 보고, 안 나왔으면 허탕 발길을 돌리곤 하였습니다. 그만큼 특정 만화가와 주인공에게 로열티가 높던 시절인지라 구독 팬이 많은 만화가와 주인공은 요즘 연예인처럼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정겨운 만화 가게 전경
아래는 제 기억 속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당시 만화책의 만화가와 주인공, 또는 기억나는 특정 요소입니다. 모두가 당시 어린이 월간 잡지 전성시대를 이끈 트로이카인 소년중앙, 어깨동무, 새소년에 연재되는 것이 아닌 소설책 같은 단행본 만화들입니다.
이외에도 성인물 신문 연재 만화로 인기를 끌은 방학기, 고우영 작가가 떠오르며 반면에 아이들 명랑 연재만화로는로봇 찌빠의 신문수, 맹꽁이 서당의 윤승운, 꺼벙이의 길창덕 만화가가 떠오릅니다. 그리고 순정 만화 영역에선 엄희자와 황미나, 유리의 성으로 유명한 정영숙 작가가 동화 속의 공주를 꿈꾸는 여자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물론 제 기억의 한계로, 또는 개인적인 호불호로 그 시대에 인기를 끌었음에도기억 못 하는 만화들과 이후 등장한 많은 만화들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위의 만화 중 오혜성이란 비련의 주인공으로 유명세를 탄 이현세 만화가를 마지막에 단정해서 놓은 이유가 있습니다. 위에서 제가 설명한 PC에서 낚인 <공포의 외인구단>의 인기 작가입니다. 사견이지만 저는 우리나라 만화를 누구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시대적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것은 이현세의 만화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만큼 그의 등장은 당시 제게 충격적인 재미를 주었습니다. 마치 그것은 대중가요로 치면 산울림의 <아니 벌써>를 처음 들었을 때와 같은, 영화로 치면 강재규 감독의 <쉬리>를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문화적 충격이었습니다.
이현세 작가의 데뷔작 <국경의 갈가마귀> 표지, 1982
만화가 충격적이라니요? 분명히 그랬습니다. 제가 대학 저학년 시절 보게 된 그의 첫 작품은 <국경의 갈가마귀>라는 만화였습니다. 처음 들어 본 작가인데 처음부터 우와~ 하는 탄성이 터졌습니다. 우선 압도된 것은 스케일이었습니다. 무슨 만화가 주인공이 한국, 일본, 중국을 돌아다니며 시차를 두고 스토리가 진행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작은 국배판 정도의 지면 위에 여러 칸으로 나뉜 좁은 사각 칸 안에서 주인공의 일대 서사시가 펼쳐지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한중일 합작 영화처럼 말입니다.
이전까지는 없던 만화였습니다. 당시 한 만화 했던 저로서는 당연히 문화적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팬이 된 저는 이후 이현세 작가의 만화를 한 편도 빼놓지 않고 다 보게 됩니다. <공포의 외인구단>이 출간됐을 때에는 중도에 제가 군에 입대했던 때라 휴가나 외출을 나오게 되면 만화방에 후딱 달려가 이후부분의 궁금증을 해소하였습니다.그들의 야구 경기결과보다는 엄지와 까치의 사랑이 어찌 됐는지..
당시 한국 만화를 천하통일했다고 봐도 무관할 정도로 이현세 작가의 만화는 재미있었고 잘 나갔습니다. 만화가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가수 정수라 씨가 부른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라는 만화 속 남주 오혜성의 대사를 가사로 한 그 ost는 지금도 왕왕 미디어를 타고 있으니까요. 이렇게 만화에 영화나 소설처럼 절절한 로맨스가 등장하는 것도 그의 만화가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기존의 만화들이 주 타겟층으로 한 어린이 만화와 성인 만화 사이에 비어있는 청소년층 만화를 개척한 그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주인공 엄지를 감동시키는 <공포의 외인구단> 만화의 한 페이지
그런데 어느 날 야설록이라고 하는 작가가 그의 만화 줄거리의 원작자는 바로 본인이라고 일성을 고합니다. 조금 놀랐지만, 그래서 우리는 인기 만화가 뒤에는 스토리 텔러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가수 조영남 씨의 그림처럼 말입니다. 어떤 장르든 산업화가 되면 이렇게 산하에 전문가를 채용하고 분업화되는 것이기에 그의 주장은 이현세 작가의 명성을 흔들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현세의 만화, 아니 대한민국의 만화는 거기까지였습니다. 불행히도 종이 만화 시대가 끝나가고 있었으니까요. PC와 인터넷, 그리고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독자들은 이제 그 안에서 웹툰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만화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시대의 발달에 맞춰 화려하고 고도화된 게임의 등장으로 이제 아이들은 더 이상 만화책을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만화보다 더 중독성이 강한 것이 나타났으니까요. 만화로 밥을 먹고살았던 기존의 만화가들은 이제 더 이상 만화로는 살기 힘든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붓을 놓게 되니 아울러 위에 열거한 종이 만화 속의 주인공인 우리의 영웅들도 홀연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다들 지하 명부의 세계로 사라진 것입니다.
신기술 신문명이 출현하는 새로운 시대는 필연적으로 이전 시대의 희생을 먹고 자라게 됩니다. PC와 인터넷, 그리고 이어서 따라온 스마트폰의 출현은 중국 후한의 환관 채륜이 종이를 발명한 이래로 2천여 년간 모든 문명과 시대의기록을담아온종이 산업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그중 만화의 타격은 신문, 잡지, 소설 등의 출판물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절멸 수준의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되었으니까요. 물론 이후 등장한 신진 만화가들은 종이에서 웹으로 무대를 옮겨 이름도 만화가에서 세련되고 트렌디한 웹툰 작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맹활약으로 우리는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웹툰 강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추억 속에 있는 독고탁이나 구영탄, 각시탈, 최고봉, 캐리, 오혜성 등의 만화 영웅들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거나 거의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아직도 종이 만화가 있다면 그들은 그 세계에서 여전히 활발하게 활약을 펼치고 있을 텐데 말입니다. 설사 원작 만화가가 세상을 떠도 인기 있는 영웅 주인공들은 그 만화가의 후계자 등에 의해 장수하고 있을 것입니다.
만화 대국 미국의 경우는 다릅니다. 다른 점은 아래에서 설명하는 결과이지만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절멸 위기의 과정을 겪었습니다.PC, 인터넷, 스마트폰을 출현케 한 종주국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다. 미국의 만화 하면 마블(MARVEL)과 디씨(DC) 두 회사가 떠오르는데 현재는 마블의 영향력이 압도적입니다. 두 회사 모두 1930년대에 탄생한 만화 회사(Comics)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 시절 철도와 고속버스 등 장거리 교통이 대중화되면서 광활한 북미 대륙의 지루한 이동 시간에사람들이 만화를 찾게 되어 터미널 가판대는 만화로 가득했습니다. 만화의 주요 유통 장소가 우리는 학교 옆 만화가게였다면 그들은 암트랙 기차나 그레이하운드 고속버스 터미널인 것이었습니다.
미국 만화의 양대 산맥 마블과 디씨의 로고
중간 과정은 생략하고 아무튼 우여곡절을 겪으며 성장하던 미국의 만화 산업은 TV, 영화, 게임, 인터넷 등 속속들이 등장하는 새로운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의해 쇠락의 길을 우리와 똑같이 겪게 됩니다. 이때 마블은 살아남기 위해 비디오 게임, 장난감, 캐릭터 등의 사업에 마구 진출하는데 결과가 영 시원치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망하기 직전까지 간 그들에게 구세주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바로 영화사였습니다. 그들이 종이 만화 속 주인공인 영웅 캐릭터와 스토리 판권을 사서 영웅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블은 이게 웬 떡이냐 하며 수십 년간 창고 속 먼지에 파묻혀 있던 특정 만화책의 판권을 하나하나씩 영화사에 넘기기 시작합니다. 마치 무덤 속에 잠들어 있던 시체를 꺼내 팔듯이 말입니다.
영화사가 사지 않았으면 아무리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만화 속 영웅이라 할지라도 영원히 미이라 상태로 파묻혀 있어야 할 그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마블은 소니픽쳐스에게 스파이더맨을, UPI에겐 헐크를, 20세기폭스엔 울버린, 엑스맨 등을 판매하며 가난한 살림을 이어갔습니다. 마치 살림이 곤궁해진 어머니가 시집올 때 친정에서 해준 금붙이를 시장에 하나둘씩 내다 팔듯이 마블의 영웅들은 그렇게 팔려갔습니다.
이런 그들을 쭈욱 눈여겨본 월트디즈니는 2009년에 마블을 전격 인수하게 되는데 인수가가 무려 40억 달러에 달했습니다. 당시 우리 돈으로 5조 원에 달하는 거금입니다. 1~2조의 스타트업 유니콘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탄생하고, 설왕설래하는 트위터 인수에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가 57조를 지불하려는 요즘 소프트웨어 자산에 이 정도의 빅 딜은 그렇게 커 보이지 않아 보일 수는 있으나 당시로는 엄청난 금액의 인수가였습니다. 마블 입장에선 망해가던 구닥다리 만화가게(회사)를 5조에 팔았으니 그들로선 대박을 쳤습니다. 하지만 월트디즈니의 셈법은 달랐습니다. 영화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달하는데 그들에겐 백설공주, 미키마우스 등 아기 캐릭터밖에 없어 성장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인 영웅 캐릭터가 필요했는데 그것을 영화 제작할 때마다 감질나게 한 명씩 인신매매하듯 영웅을 사 오느니 아예 통으로 그들이 살았던 집을 다 사버리는 게 더 이익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하면 마블의 여러 영웅 캐릭터들을 복수로 출연시키는 스토리 구성도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2018년 개봉한 영화 <어벤져스(Avengers, Infinity War)>엔 무려 67명의 다양한 영웅들이 등장합니다. 영웅호걸들이 중원의 주인을 가리기 위해 판을 치던 중국의 3국시대를 연상케 하는 블록버스터의 등장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이 한 편의 영화는 순식간에 인수가의 절반액인 2조 5천억 원을 전 세계에서 벌어 들이게 됩니다. 역대 영화 수입 5위에 해당하는 기록입니다.
마블의 대작 <어벤져스> 영화 포스터, 2018
그런데 마블의 종이 만화 속엔 아직도 출동 안 하고 쉬고 있는 이런 영웅 캐릭터들이 8천~9천 명이나 된다 하니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스토리의 영웅 영화들이 등장할지 모르겠습니다. 한마디로 무궁무진한 것이지요. 20세기에 태어난 그들은 지금 21세기 시대에 맞춰 트렌디한 영웅으로 몸을 만들고 출동 대기 중에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 와서 생각해보면 5조 원의 매각 대금은 결코 비싼 것이 아니었습니다. 크리에티브한 지적 재산을 우대하는 자본주의의 첨단 국가 미국의 블록버스터 영화 산업이 만들어낸 놀라운 결과입니다. 꺼져가는 만화 속 촛불 영웅들이 타오르는 영화 속 휘황찬란한 네온의 영웅들로 화려하게 부활한 것입니다.
슈퍼맨과 배트맨, 원더우먼, 아쿠아맨 등의 영웅 캐릭터를 보유한 디씨코믹스는 마블코믹스보다 먼저 타임워너에 인수되었습니다. 디씨 영웅들도 어느 날부터인가 복수로 나오기 시작하는데 이들은 마블의 어벤져스에 대응해 저스티스 리그(Justice League)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그들 영웅들이 활동하는 세계나 세계관을 가리켜 각각 유니버스(Universe)라 칭합니다. 마블 유니버스, 디씨 유니버스 이렇게 말입니다. 만화가 진화 발전을 거듭하여 삶의 철학과 인류의 미래 담론까지 얘기하는 유니버스로까지확장된 것입니다. 중국의 삼국시대나 일본의 전국시대를 벗어나, 서구의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뿌리 깊은 전쟁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만화 속의 세계입니다.
부럽습니다. 우린 우리의 과거 만화 영웅들을 모두 잃고, 잃어가는데 그들의 영웅들은 저렇게 멋지게 부활했으니 말입니다. 그것도 과거의 감옥과도 같은 좁고 답답한 종이 위 평면 사각 칸을 부수고 나와 지구는 물론 온 우주를 마음대로 헤집고 다니면서 말입니다. 물론 우리나라 과거의 만화 영웅들은 캐릭터의 성격이나 역할이, 그리고 펼쳐가는 그들의 스토리가 영화 스크린으로 이동하기엔부적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그들 모두가 허망하게 사라지는 건 마치 우리 과거의 한 축이 사라지는 것 같아서 아쉬움이 큽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세대가 지나가도 아래 세대 독자의 마음속에 윗 세대의 마음속 주인공처럼 남고, 또 그 아래 세대로 이어지는데 말입니다.
우리 아이 세대에 위에 열거한 과거 만화의 영웅 주인공들을 기억하는 아이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만화책 대신 게임기를 들고 자라고 스마트폰으로 웹툰에 등장하는 새로운 주인공들만을 보고 자라온 그들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만화책은 물론 어떤 미디어에서도 그런 주인공들을 본 적이 없을 테니 이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한마디로 우리의 만화는 미국의 만화처럼 산업화되지 못했습니다. 시장의 크기가 작고 그 시절 만화를 박대했던 우리의 인식도 한몫했을 것입니다. 만화란 만화가의 산고로 탄생한 엄연한 작품이고 크리에이티브한 창작물인데 말입니다.
지난주엔 인간의 신체적, 감정적 한계를 뛰어넘고자 애쓴 영웅들의 이야기 <공포의 외인구단>을 봤다면 다음번엔 구할 수 있다면 의협심으로 똘똘 뭉친 정의롭고 낙천적인 소년인 고 이상무 작가의 독고탁 군도 다시 한번 만나고 싶습니다. 그가 맹활약한 시대는 오래전 지나갔지만 혼탁한 이 사회에 정의감과 의협심으로 똘똘 뭉친 그는 여전히 유효한 우리들의 영웅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