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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Dec 17. 2022

20세기 말 장학퀴즈 단상

20세기 말 단상 하나.. 당시 매주 일요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TV에서 힘차게 울려 나왔던 트럼펫 소리, 바로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3악장)>입니다. 당시 집집마다 걸려있던 TV 위 벽시계가 9시를 ~ 하고 치면 마치 늦잠에서 깬 나팔수의 기상나팔처럼 온 집안에 낭랑하게 울려 퍼졌던 팡파르, 그 곡은 MBC TV의 간판 프로였던 장학퀴즈의 시그널 뮤직이었습니다. 지금은 EBS TV로 옮겨가 프로그램이 살아는 있지만 인기와 흥행은 그 시절과는 비할 수 없습니다.


살기 힘든 시절이었지만 자식 교육에 모든 것을 바쳤던 당시 부모님들은 이런 프로를 통해 어린 용이 되는 남의 자식들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곤 하셨습니다. 우리나라 부모들의 교육열이야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만 그때는 당신들이 못 먹는 한이 있더라도, 그리고 소를 팔아서라도 자식만은 가르쳐야 한다는 시절이었으니 교육의 정서가 지금과는 다른 시절이었습니다. 그렇게 교육에 전력투구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지금보다는 개천에서 용이 빈번하게 출몰하곤 하였습니다. 오늘날 용의 문턱이 높아진 것이 정치가 잘못되고 왜곡된 사회구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제 생각은 과거보다 개천의 사이즈가 작아져서 그런 측면도 있다고 봅니다. 잘 사는 중산층이 늘어나다 보니 개천에 사는 가재, 붕어, 개구리들이 인구 대비 그 시절보다 훨씬 줄어든 것이지요. 반면에 과거 부모들이 거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했던 교육 지원 시스템과 인프라는 그때보다 훨씬 좋아졌습니다.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과 그의 '트럼펫 협주곡' 앨범


우리 사회에서 거의 한 세기를 지배해온 용이 되는 가장 높은 등용문인 사법고시가 2017년 마지막 합격자를 배출하고 폐지되었습니다. 용의 상징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런 단면적이고 석차로 인재를 평가하는 시대는 끝나고 다면적이고 제너럴한 인재가 환영받는 우리나라가 되어서 그럴 것입니다. 21세기에 들어서며 G7에도 초대받는 잘 사는 선진국형 국가가 된 것이지요. 과거에는 어디든 사람을 뽑는다면 시험을 통한 아라비아 숫자로 줄 세우는 석차가 최우선이었습니다. 그래서인가 그 시절 선경그룹인 SK그룹이 후원하는 장학퀴즈는 우리나라에선 인기가 전에 못 미쳐도 바다 건너 중국에서는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2000년 대도시 위주로 장웬방이란 프로로 시작한 그 프로는 높은 인기에 힘입어 2016부터는 국영 CCTV로 옮겨가 타이틀도 SK극지소년강(極智少年强)으로 바뀌어 전국권 프로그램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과거와 같은 발전 단계를 밟아가고 있는 것이겠지요.


어린 초등학교 시절부터 장학퀴즈는 저의 흥미를 자극했습니다. 그래서 일요일 아침이면 TV 앞에 앉아 그 프로를 흥미롭게 시청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그 모습이 흐뭇했는가 어느 때부터인가 장학퀴즈가 시작되면 종이와 펜을 드시고 제가 맞출 때마다 가채점을 하시며 TV 속 5인의 고등학생과 석차 경쟁을 벌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성적이 좋으면 상금으로 용돈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일찍부터 내공이 쌓여선가 고등학생이 되어 출연 자격을 획득한 저는 결국 장학퀴즈에 나가게 되었고 다행히 나름 좋은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대학 입학 때 후원사인 선경그룹으로부터 큰 장학금을 받았으니 말입니다. 결국 몇 년에 걸친 아버지의 용돈 투자는 대박 성공을 거둔 셈이 되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갑자기 카테고리와 사이즈는 다르지만 축구의 손흥민 선수와 그의 아버지가 생각이 나네요. 조기 가정교육의 승리입니다.


그런데 그 시절 장학퀴즈엔 오프닝 곡인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 말고도 그 프로그램을 상징하는 클래식 곡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세컨드 시그널 뮤직이라 불릴만한 곡입니다. 하지만 그 곡은 매주 들을 수 있는 곡은 아니었습니다. 주장원전에서는 나오지 않았으니까요. 그 곡은 5주에 걸친 주장원전을 통해 선발된 5명이 모여서 경합을 벌이는 월장원전과, 그 월장원 5명이 모여 최종적으로 대결하는 기장원전에서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월장원전과 기장원전은 나름 중요한 날이라고 음악 문제를 효과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당시 바이올리니스트 동석 씨가 이끄는 실내악단을 직접 출연시켰는데, 진행자인 장학퀴즈의 터줏대감 차인태 아나운서가 그 악단을 소개할 때 그들이 연주했던 실내악이 바로  곡이었습니다. 즉, 이 곡은 녹음으로 들려준 하이든의 트럼펫 곡과는 달리 TV를 통해 현악의 생음악 연주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헨델의 <왕궁의 불꽃놀이>입니다. 왕궁에서 왕족과 귀족, 그리고 외국 귀빈들을 위해 쏘아 올렸던 축제의 불꽃놀이가 연상되는 제목만큼이나 크고 화려하게 전개되는 야외 음악입니다. 이 곡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프랑스를 제지한 영국의 조지 2세가 런던에서 승전 축하 행사로 실시한 대규모 불꽃놀이에 사용할 요량으로 당시 영국에 거주하던 헨델에게 작곡을 의뢰해서 만든 곡입니다. 음악의 어머니 헨델은 독일인이지만 영국으로 귀화해서 음악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동시대 그의 조국 독일의 음악은 음악의 아버지인 바흐가 굳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불꽃놀이 행사 당일엔 런던 교통(마차)이 마비될 정도로 군중이 몰렸지만 정작 하이라이트인 불꽃이 제대로 터지지 않았고 화재까지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집가는 날 등창난 격의 김샌 날이 되었지만 이 음악은 지금까지 남아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유튜브에 가면 영국의 대표적인 음악 축제인 BBC PROMS에서 당시의 악기를 그대로 사용하여 원전 연주한 이 곡이 있습니다. 장학퀴즈에서 연주된 유명한 주제부는 전체 16분 중 13분 41초부터 나옵니다.


조지 프레드릭 헨델과 그의 '왕궁의 불꽃놀이' 앨범


https://youtu.be/fNqJ8mED1VE


1973년 2월 첫 방송부터 20세기 말에 융성했던 장학퀴즈는 21세기까지 그 명성이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이 프로의 존재조차 잘 모르고 있거나 사라진 프로로 알고 있습니다. EBS로는 1997년부터 옮겨와서 방영 중입니다. 시대의 변화로 MBC에서 시청률이 덜 나오니 그 이전 해인 1996년 종영을 해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방송국이 바뀌어도 SK그룹은 변함없이 장학퀴즈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런 장학퀴즈는 21세기 초 SK그룹의 위기가 찾아왔을 때 한번 실력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2003년 소버린 사태로 그룹 이미지가 안 좋아졌을 때 TV 기업PR 광고 소재로 1981년도에 방영한 장학퀴즈 기장원전의 영상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 광고에선 오랜 세월에 걸쳐 국가 인재를 키우는 장학사업으로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 SK그룹의 노력을 국민들에게 어필했습니다. 당시 광고 담당자는 마치 <삼국지>의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물리치는 것과 같은 심경으로 그 묵은 영상 테이프를 창고에서 끄집어냈을 것입니다.


장학퀴즈 론칭부터 제작과 송출의 풀 제작 스폰서를 결정한 당시 선경그룹의 고 최종현 회장은 사회공헌 사업의 일환으로 국가 십년지계인 나무심기와 백년지계인 인재양성에 팔 벗고 앞장서신 분입니다. 그래서 당시 장학퀴즈의 TV 광고는 선경그룹 계열사의 상품광고가 아닌 인재양성을 주제로 한 기업PR만을 내보냈는데 그 내용도 기업 냄새는 거의 없는 공익광고 형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SK그룹의 사이즈가 재계 2위로 올라선 요즘과는 비교하기 힘든 시절이었음에도 그렇게 국가의 미래를 위한 장학사업을 벌인 것입니다. 장학퀴즈 출신들은 지금 SK그룹보다는 사회 곳곳에서 각각 개개인의 역량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당시 고 최종현 회장이 쓸모없는 황무지에 심었던 어린 나무들도 무럭무럭 자라나 현재 남산의 40배에 달하는 크기의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광고에도 나왔던 장학퀴즈 13기 기장원전 모습, 1981


사실 장학퀴즈가 인기를 끌던 지난 세기엔 고교생들이 출연하는 TV 프로가 그것 말고는 거의 없었습니다. 매스 미디어의 영향력도 TV가 절대적이었는데, 그 TV도 케이블이나 종편은 없는 공중파 3사만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니 가정에서 오락물이라고는 TV 3개 채널이 전부였던 시절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시절이었기에 장학퀴즈가 청소년인 고교생들에게 더 각광을 받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보고, 응원하고, 환호하고, 해소할 만한 것이 부족했던 시절이었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웬만하면(?) 출연한 학생들의 학교로 팬레터가 전국에서 답지하기도 했으니까요. 스포츠 쪽에서 고교 야구가 어른이나 청소년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도 그와 유사한 현상이었을 것입니다. 지금 고교 야구의 인기는 거의 장학퀴즈만큼이나 하락세를 걷고 있습니다. 대신 청소년들에게 그 인기의 대상은 매스 미디어와 인터넷에 넘쳐나는 아이돌 스타로 바뀌었습니다. 충족지수 측면에서 보면 그들이 그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장학퀴즈처럼 우리 사회엔 20세기 말엔 화려했지만 21세기엔 사라지거나 시들해진 것들이 꽤나 많이 있습니다. 삼표연탄, 유엔성냥, 주택은행, 동춘서커스단, 종로서적, 역전다방, 온양온천장, 선데이서울, 고바우, 소년중앙, 이뿐이비누, 반달표스타킹, 별표냉장고, 월남치마, 낙타표연필, 범표운동화, 비둘기호, 포니, 원기소, 이명래고약  이런 상표들이 바로 추억의 그것들입니다(브랜드 출처, <20세기 브랜드에 관한 명상>, 윤준호 카피라이터). 그런데 21세기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브랜드들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과거 유행했던 브랜드들이 이어지고 발전해서 오늘날의 브랜드가 된 것이겠지요. 그래도 장학퀴즈만큼은 그때 그 모습으로 부활해 여전히 건재하길 기원해봅니다. 인재양성과 장학사업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니까요.



기억을 더듬어 봅니다. 1980년대 초 장학퀴즈 출연자에게 지급한 상품.

- 출연자 모두  : 선경 스카이텍스 여성 양장지, 선경 스마트 학생복지, 선경 스마트 보스턴백, 선경 오디오 테이프, 옥스퍼드 영한/영영 사전

- 주장원 : 상금 10만 원

- 주차석 : 선경 스마트 자전거

- 월장원 : 상금 20만 원

- 기장원 : 대학 전액 등록금

- 기차석 : 대학 입학금

1980년대 중반 15기부터는 월장원을 한 기장원전 진출자 모두에게 대학 입학금 지급. 기차석은 대학 2년 등록금(의대는 3년) 지급으로 장학금이 상향 조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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