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8세와 어느 재벌 2세의 이혼

by 마하

역사상 인류가 배우자 수로 택한 결혼 제도로는 일부일처제와 일부다처제가 보편적입니다. 하지만 모계가 중심이 된 부족 사회에선 다부일처제도 있었습니다. 그밖에 실체 파악이 불가능한 원시 사회나 문명이 닿지 않는 아프리카나 아마존의 어떤 부족에선 그들의 필요에 의해 이부일처제나 다부다처제 등이 존속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론적으로도 가능하고 실제적으로도 가능한 결혼 제도들입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문명국가들은 일부일처제를 가장 보편적인 결혼 제도로 채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는 나라에서도 그것을 따르는 추세입니다. 일부일처제가 결혼으로 인해 새로 꾸려지는 가족 구성원들의 행복과 사회 발전을 위한 최적의 제도이기에 그렇게 정착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제도 하에서 결혼한 부부가 살다 보니 이런저런 이유로 부득이 그 계약을 파기하고 다시 서로 남이 되는 날을 맞게 되기도 합니다. 감정, 자유, 행복, 이익, 그리고 그에 따른 선택권이 보장된 인간이기에 이것은 불가항력적인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혼을 합니다. 역시 결혼과 마찬가지로 법의 테두리 하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글은 이혼과 관련한 두 개의 글입니다. 각각의 글은 서로 관련성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이혼이라는 공통 주제로 쓴 옴니버스 글로 보일 것입니다. 하나는 잘 알려진 과거 역사적인 이혼에 대한 사실이고, 또 하나는 요즘 국내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이혼입니다. 과거의 그 이혼은 남편인 남자의 관점에서 쓰고, 요즘의 이혼은 아내인 여자의 관점에서 씁니다.


역사상 가장 화제가 된 이혼은 영국의 국왕인 헨리 8세의 이혼일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이혼을 불허하는 카톨릭이 지배한 서구 유럽의 역사에 이혼의 시조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인물입니다. 이혼에 관한한 최초인 동시에 최고를 거머쥔 그였으니까요. 그렇게 그는 법으로는 원천적으로 불가한 이혼을 해냈고 이후 그가 보여준 가십성 재혼들로 인해 그의 역사적인 치적과는 별도로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첫 이혼 후 무려 다섯 번을 더 결혼했으니까요. 한번 이혼한 다음 이후 봇물이 터지듯 네 번을 더 이혼한 것입니다. 그중에서 2명의 왕비는 사형을 당했고, 첫째 왕비를 포함한 나머지 부인들은 당시 유럽 왕가의 관례와는 달리 거의 모두 직위를 박탈당한 채 빈털터리로 쫓겨났습니다. 그 화를 피한 것은 마지막인 6번째 왕비뿐이었습니다. 그가 죽음으로써 더했을지도 모를 이혼 행진이 멈춰 섰기 때문입니다. 과연 시대의 풍운아인 헨리 8세였습니다.


6번의 결혼과 5번의 이혼을 기록한 헨리 8세(1491~1547)의 초상화, 한스 홀바인, 1540


그의 첫 부인은 본래는 형의 부인이었던 캐서린입니다. 그녀는 당시 통일 왕국을 이룬 스페인의 동부 아라곤 왕국의 공주였는데 장미전쟁을 종식시킨 헨리 7세의 장자인 아서 왕자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왕비가 되기 위해 시집을 간 것인데 그것은 당시 유럽 모든 왕가의 결혼이 그러하듯이 엄청난 지참금을 들고 간 정략결혼이었습니다. 그런데 장남인 아서는 왕이 되기 전인 결혼 생활 20개월 만에 15세의 나이로 병사하였습니다.


차남인 헨리 8세는 그래서 왕이 되었고 미망인이 된 형수와 결혼을 한 것입니다. 워낙 빼어난 미인이기도 해서 난봉꾼인 헨리 8세가 좋아서 한 결혼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막대한 지참금 반환을 원치 않은 부왕 헨리 7세의 동의도 있어 이루어진 결혼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녀는 죽은 남편의 동생과 결혼을 해서 남자는 바뀌었지만 영국으로 건너올 때의 원안대로 영국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이 결혼은 당시 카톨릭 국가인 영국이라 로마 교회법을 따랐어야 했는데 교황청은 왕가의 근친혼이 만연했던 시기라 다소 무리는 있지만 동의를 해주었습니다. 진위를 가릴 수는 없지만 아서 왕자와의 짧은 결혼 기간 동안 동침을 하지 않았다는 캐서린의 주장도 인정이 되어서였습니다.


하지만 이랬던 이들의 결혼은 14년 만에 이혼으로 끝이 납니다. 정확히는 결혼 무효가 되었습니다. 헨리 8세가 캐서린을 버린 것은 그녀가 아들을 못 낳았고, 그는 다른 여자에 빠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이야 정부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고, 실제 얻기도 했지만 사생아는 왕위를 이을 수 없기에 그는 왕비의 아들만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겐 끝내 그 아들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때 헨리 8세는 다른 여자에게 눈독을 들이는데 그녀가 캐서린의 시녀였던 앤 불린입니다. 유부남인 그는 그녀에 빠져 당시로는 상상할 수 없던 이혼을 강행했습니다. 근거는 성서인 레위기 18장 16절에 명기된 형제의 아내를 범하지 말라는 구절이었습니다. 그래서 10년 넘게 살았지만 교회법에 어긋난 결혼이었으니 무르자는 것이었는데 교회의 수장인 교황은 그것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유럽의 국제 정세도 그렇지만 전임 교황인 레오 10세가 허용한 것을 뒤집을 수도 없어서였습니다.


결국 1534년 앤 불린에 눈이 멀은 헨리 8세는 최후의 수단으로 <수장령(Acts of Supremacy)>을 발동해 카톨릭과는 돌아올 수 없는 루비콘 강을 건너게 됩니다. 영국(당시 잉글랜드)에서 기독교의 수장이 로마 교황청의 교황에서 영국의 왕으로 바뀐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성공회라 불리는 영국국교회(Anglican Church)는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과연 역사를 바꾼 이혼입니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시 그의 95개 조를 반박하는 글을 써 교황에게 '신앙의 수호자(Defender of the Faith)'라는 칭호까지 받았던 헨리 8세는 이렇게 로마 교황청과 완전히 등을 돌렸습니다. 교황인 클레멘스 7세는 헨리 8세의 이 항명에 파문으로 응수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를 자유롭게 해주는 조치였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이룬 결혼에 비해 헨리 8세와 앤 불린과의 결혼은 불과 2년 9개월 만에 파경을 맞습니다. 역시 또 그녀가 아들을 낳지 못해서인데 그녀는 그렇게 버려짐과 동시에 간통죄목까지 덧씌워져

사형을 당했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인 <천일의 앤>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 헨리 8세는 또 그녀의 시녀였던 제인 시모어와 세 번째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꿈에 그리던 아들을 얻습니다. 그가 불과 9세에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6세이지만 그는 아버지인 헨리 8세의 피바람까지 일으킨 바람과는 달리 15세에 병사합니다.


그리고 왕위는 계승 서열에 의거하여 헨리 8세의 첫째 부인인 캐서린의 딸 메리로 이어졌습니다. 헨리 8세가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여왕이 된 것입니다. 카톨릭 교도인 그녀는 다시 시계를 카톨릭 국가로 돌려 많은 성공회 교도를 탄압해 블러드 메리라 불립니다. 그리고 그녀 역시 남편은 있었지만 후사가 없어 왕위는 헨리 8세의 둘째 부인인 앤 불린의 딸 엘리자베스로 이어졌습니다. 그녀가 영국과 결혼했다고 하여 처녀왕이라 불리는 엘리자베스 1세입니다. 이렇게 1명의 아버지와 3명의 엄마에게서 난 3명의 이복남매는 아버지인 헨리 8세 사후 순차적으로 모두 왕이 되었습니다. 아마 소설을 써도 이것보다는 더 막장이고 드라마틱할 수 없는 영국의 왕가 이야기입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당연히 후사가 없어 그녀의 할아버지 헨리 7세가 연 튜더 왕조는 3대로 단명한 왕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에서 온 제임스 6세의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됩니다. 아마 지하에 있는 헨리 8세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땅을 쳤을 것입니다. 그렇게 자손만대로 튜더 가문의 번성을 꿈꾼 그의 노력이 불과 그의 다음 대에서 그쳤기 때문입니다. 딱 3대만 간 것입니다. 헨리 8세는 아들을 낳은 세 번째 부인 제인 시모어 이후로도 끊을 수 없는 바람기로 세 번을 더 결혼했습니다. 그 3명 중 다섯 번째 왕비였던 캐서린 하워드도 과거 남자관계를 추궁 당해 둘째 왕비였던 앤 불린처럼 처형을 당하였습니다. 과연 나쁜 남자 헨리 8세입니다. 하지만 늙어가면서도 계속해서 젊은 6명의 왕비를 들였음에도 그에게 아들은 요절한 에드워드 6세 하나뿐이었습니다. 바람기도 바람기지만 그가 그토록 많은 아들에 집착한 이유입니다. 그의 형 아서와 그의 아들 에드워드 6세의 단명에서 보듯이 유사시에도 그처럼 등판할 아들까지 필요로 한 그였습니다.


헨리 8세의 6명의 여인들. 좌로부터 시계 방향, 1. 아라곤의 캐서린 / 2. 앤 불린 / 3. 제인 시모어 / 4. 클레페의 앤 / 5. 캐서린 하워드 / 6. 캐서린 파


이제 두 번째 이혼 이야기입니다. 제목에서 보이듯 요즘 우리 사회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어느 재벌 2세 총수의 이혼입니다. 그것을 지켜보며 불현듯 500년 전 헨리 8세의 무자비한 이혼이 떠올라 이렇게 인문교양을 다루는 제 글에 소환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쓰는 김에 그 재벌집의 이혼을 바라보는 제 주관적인 관점까지 이어서 덧붙이고자 합니다. 지난 연말 1심 선고가 끝난 그 이혼은 양자가 모두 불복하여 항소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쓰는 제 글은 재판과 법리적인 논점을 다루는 글이 아닙니다. 제가 법 전공자도 아니고 그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은 더욱 아니기에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법리적으로 이슈가 되는 위자료의 책정 근거가 되는 유책 사유와, 재산 분할의 가장 주요한 핵심인 양자 간 고유 재산, 공유 재산, 특유 재산 등에 대해선 언급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사회적인 통념인 도덕적인 관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는 사는 모습이 모두 다르고 이혼이라는 것은 내밀한 사생활이기에 타인이 왈가왈부할 사항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단, 위에서 언급했듯이 여성 배우자 관점에서 이 글을 씁니다. 뉴스에 나온 1심 선고 기사를 보고 법과는 상관없이 자연인으로서 왜 이런 것은 고려되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그 편에 쏠려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재벌 사모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을 하는 사모와 일을 하지 않는 사모가 있습니다. 이때 일은 집 밖에서 하는 직업적인 일을 이릅니다. 우선 일을 하지 않는 사모가 있습니다. 그녀는 집에서 가사와 육아에 집중을 합니다. 이것은 재벌 사모가 아니더라도 우리나라 기혼 여성이라면 누구라도 일을 하든 안 하든 주부와 엄마로서 부담을 가지고 대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물론 이 일을 함에 있어서 재벌 사모는 특수한 환경으로 인해 일반 여성과는 가사와 육아의 내용과 방법이 다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양자가 확실하게 동일한 것은 이것들이 제대로 안 되면 가정은 평화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특히 밖에 나가서 일을 하는 남편의 경우 가사와 육아라는 그녀들의 내조가 틀어지면 그는 밖에서 평정심을 가지고 일을 대하기 힘들어집니다.


조직 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출근 시 상사가 이유 없이 아침부터 짜증을 내는 날이 있는 날을 경험할 것입니다. 제 경험상 그것은 그 상사의 지위가 조직의 수장인 대표이사나 오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날은 대개 그 상사가 출근 전 집에서 뭔가 사달이 났을 확률이 높습니다. 부인에게 바가지를 심하게 긁혔거나 아이가 심기를 건드릴 날일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런 날 그 상사는 아침부터 일이 손에 제대로 잡히지 않을 것입니다. 다행히 마인드 컨트롤이 잘 되는 상사라면 금방 평정심을 찾겠지만 그의 심경을 건드린 악재의 내용에 따라 그 여파는 생각보다 오래가기도 할 것입니다. 제대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어떤 날 아침엔 그 상사가 이유 없이 표정이 밝고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면 그 분위기는 그 상사의 지위에 따라 개별 팀이든 조직 전체로 퍼져나가곤 합니다. 즐겁게 일이 손에 잡힌다는 것입니다. 그런 날은 대개 그 상사가 출근 시 집에서 좋은 기분으로 출발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부인이 평소보다 상냥하게 대해줬든 아이가 학교에서 상을 탔을지도 모릅니다.


이렇듯 크기를 정의하긴 어렵지만 상사의 업무 컨디션은 가정사와 분명히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이때 가정에서 아내가 수행한 정상적인 가사와 육아는 그에겐 내조가 됩니다. 위에선 미미하고 단편적인 예를 들었지만 아내의 내조에 따라 남편의 사회생활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재벌 총수든 구멍가게를 하는 영세업자든 모두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선인들은 가화만사성이라 하였습니다.


제가 그 이혼 선고의 기사 내용을 보고 첫째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런 여성 배우자의 내조인 가사와 육아를 남자의 기업 경영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상관성의 크기는 다르겠지만 상관성은 분명히 있어 보이는데 말입니다. 특히 자녀의 육아와 교육 문제에 대해선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대기업의 2세나 3세가 벌이는 각종 사고들을 뉴스의 사회면을 통해 종종 접하곤 합니다. 술집에서 싸웠다던가, 갑질을 했다던가, 그리고 요즘 부각되는 마약 문제 등이 그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재벌인 그들 부모를 속상하게 하고, 해당 기업의 임직원을 허탈하게 하며, 증시의 주가에 악영향을 끼치는가 하면, 사태에 따라 그 가문의 기업 경영까지 위태롭게 합니다.


하지만 현재 이혼 재판 중인 이 재벌 그룹의 3세 자녀들에게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제 기억으론 그렇습니다. 오히려 그 집의 딸은 요즘 우리 사회를 시끄럽게 하는 병역 비리는 고사하고 여자라서 아무 의무가 없는 병역까지 이행했습니다. 반듯한 국가관을 심어준 가정교육의 결과일 것입니다. 당연히 그 아버지가 회장인 대기업에 좋은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녀의 미담 뉴스엔 아버지 회사명도 늘 함께 따라다녔으니까요. 그 아버지 또한 당시 흐뭇한 기분으로 위에서 예를 든 상사처럼 회사 업무에 임했을 것입니다. 통상 애들은 그냥 자란다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가정교육이 그래서 중요한데 대개 이 교육은 아버지보다 어머니 역할이 큽니다. 아버지는 애들이 한창 자랄 때가 바깥일을 가장 왕성하게 할 때니까요. 그래서 애들 교육을 책임지고, 아울러 안살림까지 책임지는 엄마와 아내의 역할은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전 여성 배우자의 가사와 육아 등의 내조가 남편의 기업 경영과는 상관이 없다고 누군가 주장한다면 그것에 절대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다음은 일을 하는 재벌 사모의 경우입니다. 물론 일을 하는 그녀도 가사와 육아에 대해선 스트레스를 받으며 그것들을 병행합니다. 재벌 사모의 일은 그간 제가 보아온 바로는 세 가지 군으로 나뉩니다. 첫째는 남편이 회장인 그룹의 일입니다. 그 그룹의 사업군에 여성의 섬세함을 요하는 비즈니스가 발생할 경우 회장의 사모는 그것을 담당하기도 합니다. 호텔이나 리조트, 그리고 패션, 요식업 등 라이프 스타일 사업군에서 그녀들이 일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 그 일이 남편처럼 종신으로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호텔이 완공이 되고, 리조트 분양이 시작되면 그녀는 그 일에서 빠지곤 합니다. 주어진 역할을 완료한 것입니다. 즉, 그녀는 상근이 아니라 원 포인트로 그 그룹의 특화된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 그룹의 상속자인 딸이 아니라 사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그 사모가 일시적이 아니라 회장인 남편처럼 지속적으로 일을 하는 경우인데 그 일은 대개 그 그룹의 사업군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사회공헌 분야나 문화예술 분야의 일 등이 주로 그것입니다. 그중 사회공헌은 재단을 발족해 불우이웃을 돕거나 장학사업 등을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문화예술은 갤러리나 박물관 등의 일을 가리킵니다. 두 일의 공통점은 돈 버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재벌들은 대개 영리와 상관없이 이런 분야의 법인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 운영을 주로 회장 사모가 맡는다는 것입니다. 이사장이나, 대표 등의 명함을 가지고 말입니다. 하지만 사회공헌법인이든 갤러리든 일은 대개 그 사모를 대리하는 실무자가 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지속적이지 않고 산발적이기도 합니다. 갤러리란 문패만 걸어놓고 개점휴업인 곳들도 있으니까요.

현재 위 이혼의 당사자인 여성 배우자 노소영 관장은 위의 첫째 경우처럼 그룹 내부의 계열사에서 일정 기간이든, 일시적이든 근무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룹 외부에서 사회공헌과 갤러리 비즈니스 두 가지를 모두 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재계의 일부 사모들처럼 이름만 걸고 하거나 산발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 일에 모두 직접 관여하며 지속적으로 끊김 없이 일을 만들고, 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녀가 수장인 미래회는 정기적으로 국내에서 가장 큰 바자회를 통해 그 수익금을 기부해오고 있으며, 아트센터 나비는 국내 미디어 아트의 선두주자로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유명 갤러리로 성장했습니다. 그녀가 열심히 일한 결과일 것입니다. 또한 재능 있는 젊은 친구들을 지원하기 위한 크리에이티브 공간으로 타작마당이라는 곳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제가 아는 바 그녀는 국내 재벌 사모들 중 가장 활동량이 많고 열심히 일을 해온 사모입니다. 그렇게 이미 영향력이 있는 샐럽이 되어버린 그녀로 인해 그녀의 일은 언론에 자주 소개되고 그럴 때마다 그 그룹의 이름도 함께 따라다녔습니다. 제가 이렇게 그 연관성을 인지하고 있듯이 말입니다.


최근 미디어 아트에 종사해 온 본인의 20년을 회고한 책을 출간한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2022. 12


노소영 관장이 속한 SK그룹은 섬유에서 시작해 정유와 화학 계열의 수직화를 이루고, 이어서 무선 통신을 통해 국내 재계의 상위 랭커로 진입했으며, 최근엔 반도체 진출과 신규 바이오 비즈니스 등을 통해 미래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현재 자산 규모로 재계 2위인 빅 그룹이 되었습니다. 놀라운 성장세입니다. 언급하였듯이 그녀는 그간 열심히 일을 해왔지만 그 일은 그룹의 사업과는 상관이 없는, 아니 정확히는 없어 보이는 일들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벌여온 사회공헌과 문화예술 비즈니스가 진짜 그 그룹의 비즈니스와 상관이 없는 일이었을까요? 또 그 그룹의 가치 제고에 아무 기여도 하지 못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벌여온 일들도 SK그룹의 사회적인 가치와 문화예술적인 가치를 높여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돈과 비즈니스만 보일 수도 있는 경화된 그룹을 부드럽고 매력적으로 만드는 데에 일조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진적이고 세련되게 만드는 데에도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가치는 현재도 그렇지만 미래로 갈수록 더 빛날 가치일 것입니다. 후진국의 기업이 아무리 덩치가 커도 그것이 우리에게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그런 외연적 가치가 보이지 않아서 그럴 것입니다. 이렇듯 사회적이고 문화예술적인 가치는 기업을 밖에서 안으로 싸는 팬시한 포장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일을 결혼 후 지속적으로 해온 그녀가 기업의 경영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해서, 기업 가치 제고에 기여한 것이 없다고 누군가 주장한다면, 그것은 기업과 사회, 문화예술의 연관성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통섭형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노소영 관장이 설립한 타작마당 내 사과나무

오늘날 우리가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을 기억하는 것은 그들이 후원해서 일어난 르네상스의 대가들과 그들이 빚어낸 빛나는 예술 작품 때문이지 그 가문의 비즈니스인 양모업이나 은행업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폴 게티라는 이름에서도 그의 이름을 딴 미술관과 많은 사람들에게 무료로 베푸는 예술적인 혜택을 떠올리지 정작 그가 무엇을 해서 그 많은 돈을 벌었는지는 대부분 잘 모르고, 별 관심도 없을 것입니다. 사회적이고 문화예술적인 가치는 그런 것입니다. 노소영 관장은 위에서 보듯이 일에 관한한 열정적인 에너지와 그에 버금가는 역량으로, 또 정황상으로도 결혼 후 그룹 내에서 영리적인 다른 일을 선택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는 그 일을 선택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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