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공격형 미드필더인 이청용 천수는 지금은 국내 K리그의 울산에서 뛰고 있지만 그전에 그는 카타르 월드컵에서 맹활약한 국가 대표 손흥민과 황희찬 선수가 뛰고 있는 영국의 프리미어리그(EPL)에서 주전으로 활약하였습니다. 당시 그가 그 리그에서 마지막으로 뛴 구단은 손흥민 선수의 토트넘 홋스퍼와 마찬가지로 런던을 연고로 하였는데 그 팀의 이름은 크리스탈 팰리스(Crystal Palace)였습니다. 다소 예외적이고 독특한 팀명을 가진 그 팀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이청용 선수의 팬들에겐 우리말로 해석된 수정궁으로 불렸습니다.
손흥민 선수로 인해 우리에게 익숙해진 토트넘 홋스퍼는 북런던을 연고로 합니다. 그 팀이 위치한 지역 이름이 토트넘(Tottenham)이라 그대로 팀명이 된 것이지요. 우리로 치면 강북구나 도봉구 정도가 되려나요? 토트넘에 따라붙는 홋스퍼(Hotspur)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4세>에 등장하는 기사인 헨리 퍼시 경의 별명에서 유래합니다. 그는 역사 속 실존 인물인데 얼마나 용맹스럽게 달리고 싸웠으면 식을 일 없는 그의 말에 부착된 수탉 모양의 뜨거운 박차가 그의 별명이 된 것입니다. 그 박차는 그대로 식지 않은 채 토트넘 지구 구단의 이름이 되고 그 박차 모양의 수탉은 고개를 쳐든 채 구단의 앰블럼이 되었습니다. 헨리 퍼시 경이 토트넘 지역과 연고가 있는 인물이라 그렇게 지었습니다. 그래서 토트넘의 팬들은 그처럼 매우 뜨겁습니다. 손흥민 선수가 2019~2020 시즌 번리와의 경기에서 80미터나 되는 긴 거리를 그 기사처럼 용맹스럽게 폭풍 드리블로 달려가 골을 넣었을 때 그들이 얼마나 열광했겠습니까! 자랑스러운 우리의 선수입니다.
이렇듯 대개 축구 구단은 이름에 연고지가 들어가 있습니다. 한때 우리 기업 삼성이 후원했던 런던의 또 다른 전통의 명문 구단인 첼시는 최고 부촌인 첼시 지구를 주요 연고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청용 선수가 있었던 크리스탈 팰리스는 보듯이 구단명에 연고 지구가 드러나있지 않습니다. 그 구단은 런던 남부 지구를 연고로 하고 있는데 그 주소지인 사우스 노우드 대신 그들은 크리스탈 팰리스를 구단명으로 선택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그곳에 그곳의 랜드마크라 할 아름다운 크리스탈 팰리스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 아니 있었습니다.
크리스탈 팰리스는 버킹검 궁전과 같은 왕궁의 이름이 아닙니다. 1851년 영국 런던의 하이드파크에서 개최된 제1회 만국박람회의 전시장 이름입니다. 이름에서처럼 수정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고 유리로 지어졌습니다.
당시로는 획기적인 첨단 공법인 철골과 유리로 무려 장장 564미터나 되는 거대하고 투명한 전시장을 건축한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그 큰 건축물 완성에 들어간 시간은 설계 확정 후 불과 5개월밖에 안 걸렸습니다. 당시 조셉 팩스턴이라는 건축가의 획기적인 설계 아이디어도 그렇지만 과연 산업혁명을 이룬 국가답게 판유리를 대량으로 찍어내는 기술이 있어 그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그 만국박람회엔 무려 60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신분을 막론하고 런던과 영국 전역, 그리고 해외에서 몰려들었습니다. 전시장에 전시된 전시물보다 전시장이 더 화제가 되어서 그랬습니다. 언뜻 사람들 눈에 그 전시장은 초대형 온실로 보였을 것입니다. 길이가 564미터인 것은 전시가 열린 해인 1851년을 기념하기 위해 영국의 단위인 1,851피트로 맞춰지었기 때문입니다.
1851년 런던에서 열린 제 1회 만국박람회 개회식, 조셉 내쉬 (1809~1878)
1851년 제1회 만국박람회는 18세에 즉위한 빅토리아 여왕 재임 14년 차의 대형 이벤트였습니다. 세계로 뻗어나가는 대영제국의 위용을 그 박람회를 통해 유감없이 보여준 것입니다. 산업혁명으로 이룬 기술 문명과 부의 결과물들이, 그리고 바다 건너 외국의 진귀한 상품들이 그 투명하고 넓은 전시장 안에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런 세계적인 박람회로 인해 사람들은 이제 먼 지방과 외국을 나가지 않고서도 지방 특산물과 해외 상품들을 한 곳에서 모두 볼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많은 사람들을 실어서 옮겨줄 교통수단의 발달도 그것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줄여서 부르는 엑스포(Expo, exposition)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그전에도 로컬에서 크고 작은 박람회는 있었지만 엑스포 연대기에서 1851년의 이 런던 만국박람회는 제1회 엑스포로 그 리스트의 맨 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라 불리는 영국의 전성기에 그것을 지휘한 빅토리아 여왕은 이후 50년을 더 대영 제국의 군주로 세계를 호령하였습니다. 재임 기간 64년을 기록해 절대로 깨지지 않을 것 같았던 그녀의 기록은 최근 2022년에 서거한 엘리자베스 2세의 70년 재임으로 1위 자리를 넘겨주었습니다.
크리스탈 팰리스의 전경이 담긴 런던 엑스포를 알리는 홍보물, 1851
크리스탈 팰리스는 하이드 파크에서 6개월의 전시를 마치고 해체되어 1854년 런던 남부의 시드넘 공원으로 옮겨지고 개축되었습니다. 일회성 이벤트인 박람회의 전시장을 런던 도심의 공원에 둘 수 없으니 그렇게라도 해서 남긴 것입니다. 그렇게 크리스탈 팰리스는 런던의 남부로 옮겨졌지만 도시의 랜드마크가 되어 계속해서 이름을 날렸는데 1936년 화재로 전소되어 그 역사적인 건축물은 지상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이후로는 전처럼 다시 개축되지 않았습니다. 크리스탈 팰리스가 옮겨진 그 지역의 프로 축구팀이 바로 위에서 등장한 크리스탈 팰리스입니다. 그 구단은 1905년에 창단되었으니 그때는 그 지역에 수정궁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역사적인 그 크리스탈 팰리스는 사라졌지만 그 이름은 여전히 축구로 남아 런던은 물론 영국 전역을 누비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세계인에게도 기억되고 있습니다.
크리스탈 팰리스 내 신생국가 미국의 전시 부스, 1851, 조셉 내쉬 (1809~1878)
1851년 런던 엑스포를 보러 온 외국인들 중 그것을 가장 경이로우면서도 긴장하며 참관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프랑스인들이었습니다. 바다 건너 좁은 도버 해협을 사이에 두고 역사적으로 서로 으르렁 거리며 유럽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오늘날까지도 모든 분야에서 앙숙 관계인 두 나라니 그것은 숙명적으로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프랑스인들은 돌아가는 즉시 그들의 엑스포를 준비합니다. 준비하되 그들의 엑스포는 영국의 그것보다 더 멋지고 화려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오게 하려면 크리스탈 팰리스 이상 가는 볼거리를 제공해야만 했습니다. 스펙터클한 그 무엇, 그것을 힘으로 생각하는 것은 역사상 과거나 오늘날이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 이전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로마의 콜로세움이 그랬었고, 오늘날엔 두바이의 버즈칼리파나 우리 서울의 롯데월드타워 등에서 보듯이 세계는 스펙터클한 마천루 경쟁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습니다.
예상대로 4년 후인 1855년 파리에서 두 번째 엑스포가 열렸습니다. 하지만 그곳엔 런던의 크리스탈 팰리스와 같은 화제성 볼거리는 없었습니다. 프랑스는 이후에도 두 번 더 파리 엑스포를 거행했습니다. 당시 다분히 허세성이 있어 보이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엑스포를 국가적인 사업으로 간주한 듯합니다. 그리고 네 번째인 1889년, 드디어 그들은 런던의 크리스탈 팰리스를 압도할만한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파리에 준비해 놓고 전 세계의 손님을 맞습니다. 도저히 19세기의 건축물 같지 않은 거대한 철탑이 파리 시내에 등장한 것입니다.
에펠탑의 출현입니다. 324미터의 당시로선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탑, 그 이전 런던 엑스포의 크리스탈 팰리스가 564미터에 달하는 많은 유리의 길이로 승부했다면 파리 엑스포의 에펠탑은 얇고 가는 철골의 높이로 승부한 것입니다. 엑스포가 열린 그 해 1889년은 프랑스의 역사를 바꾼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였으니 이벤트 효과도 만점인 엑스포였습니다. 그 해에 맞추어 거대한 에펠탑을 언베일링한 것입니다.
파리 엑스포를 밝히는 에펠탑의 화려한 야간 조명 쇼, 1889, (출처, 요다위키)
사실 에펠탑으로 인해 그 엑스포의 결과는 달콤했지만 그 탑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너무나도 험난했습니다. 한 남자가 그의 경력과 재산 등 그의 모든 것을 걸고 이루어낸 결과이기에 그렇습니다. 대신 일개 건축가였던 그 남자는 엑스포가 끝났음에도 이후 130년이 넘게 파리의 랜드마크로 우뚝 선 그 탑에 그의 이름을 붙이는 불멸의 영예를 안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미래로 얼마나 더 갈지 모를 그 이름입니다. 그 이름은 바로 귀스타브 에펠입니다. 당시 파리 엑스포 조직위원회는 공모를 통해 에펠탑을 선정했으나 그 반대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특히 세계 예술의 수도 파리답게 알렉산더 뒤마, 에밀 졸라, 기 드 모파상, 샤를 구노 등 파리에 둥지를 틀고 있는 문화예술인들의 반대가 매우 심했습니다. 그들 눈엔 아름다운 파리 하늘에 올라가는 그 탑이 추악하고 흉물스러운 쇳덩이 고철로 보였을 것입니다.
파리의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에펠탑, 1888. 5
조직위 내부에서의 반대도 심해 건축가 에펠은 공모에 선정되었음에도 건축비의 20프로만 받고 작업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나머지 80프로의 비용은 자비로 충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완공 후 20년 간의 관광수입으로 그 나머지를 알아서 보전받고, 이후 철거하는 불평등한 조건으로 그는 사인을 했습니다. 즉 에펠은 설계를 한 건축가로서, 시공을 맡는 시공사의 대표로, 그리고 그 돈을 대는 투자자로서 그 위험한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이었습니다. 사고의 위험도 다 떠안아야 했습니다. 이것은 이익을 떠나 신념이 없이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에펠탑은 에펠의 지휘에 따라 파리의 하늘을 뚫고 올라가 결국 오늘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완공되었습니다.
에펠탑의 역사와 함께 한 귀스타브 에펠 (1832~1923), 피라미드와 크기를 비교한 신문 기사, 르 템스, 1887. 2. 14
1889년 파리 엑스포에 모여든 관중은 200만 명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후 130년 넘게 그 탑을 보거나 올라가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은 얼마나 될까요?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 오랜 기간 동안 한 번도 사고가 없던 에펠탑이었습니다. 과연 위대한 건축가 에펠입니다. 그는 탑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해 그 탑에 오르는 관광 수익으로 3년 만에 투자한 건축비를 건졌으며 이후 17년 간의 수입으로 막대한 돈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철거가 안 된 그 탑을 오늘날 프랑스 국민과 파리 시민은 얼마나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에펠도 결사 반대했지만 송신탑으로도 쓸 수 있으니 그냥 놔두자는 일부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철거의 위기를 면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엑스포의 스펙터클한 랜드마크의 싸움에선 파리의 에펠탑이 런던의 크리스탈 팰리스를 이겼습니다. 당시 엑스포를 보러 온 군중 수에선 600만 대 200만으로 런던이 이겼으나 오늘날까지 보면 파리의 승리입니다. 능력과 집념이 남다른 한 개인이 개인의 성공은 물론 도시와 국가 간의 경쟁에서도 승리하게 한 것입니다.
1889년 파리 엑스포를 알리는 광고물 (출처, 요다위키)
엑스포가 시작된 지 142년 만인 1993년 우리나라에서도 처음으로 엑스포가 열렸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이어 대전에서 열린 엑스포였습니다. 5년 전과 같이 또 온 나라가 시끄러워졌습니다. 외국인들을 보기 힘든 나라였는데 올림픽 때부터 우리나라에 세계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 제가 다닌 광고회사 오리콤에선 이 엑스포를 위해 기존 프로모션 부서의 인원으론 인력이 부족해 추가 직원을 채용하고, 타 부서 인원까지 차출해 가며 그 국가적인 행사의 대행사로 참여했습니다. 그 결과 오리콤은 선경(SK)관, 포스코관, IBM관, 후지쓰관, 동아오츠카관 등 5개 사의 전시장인 파빌리온 건축을 수주하고 엑스포 기간 동안 운영 대행을 맡았습니다. 담당자는 아니었지만 저도 이런저런 업무 협조로 대전 엑스포 현장으로 출장을 가곤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엔 행사 진행자인 도우미라는 개념이 없었는데 엑스포로 인해 그때부터 그 비즈니스가 활성화된 것으로 압니다. 그 당시 회사에서 각 전시관의 도우미 면접이나 교육이라도 있는 날이 되면 온통 시끌벅적하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후 우리나라는 2012년에 여수 엑스포를 개최함으로써 엑스포를 두 번 유치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흔히 올림픽, 엑스포, 월드컵을 가리켜 세계 3대 이벤트라고 하는데 우리나라가 이 세계적인 3대 이벤트를 모두 거행한 나라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쉽고 모자라는 것은 우리가 실시한 두 번의 엑스포는 인정박람회(Recognized Exhibition, International Expo)라고 해서 엑스포 등급상 두 번째에 해당되는 엑스포였습니다. 첫 번째 등급인 등록박람회(Registered Exhibition, World's Fair)는 아직 유치한 적이 없습니다. 올림픽에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있고, 월드컵에 국제축구연맹(FIFA)이 있듯이 엑스포도 그것을 주관하는 국제박람회기구(BIE)가 있는데 그곳에서 이런 기준과 룰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최고 권위의 등록박람회는 5년마다 한 번씩 열리고 있는데 요즘 우리나라가 한창 열을 올리고 있는 2030년 부산 엑스포가 바로 그 등급의 엑스포입니다. 그래서 부산 엑스포 홈페이지엔 "대한민국 최초의 세계박람회"라는 슬로건이 걸려있습니다. 이것이 진짜 엑스포라는 것이지요. 2030년에 열리는 것은 등급박람회는 0과 5로 끝나는 해에만 열리기에 그렇습니다. 마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메이저 골프 대회인 브리티시 오픈이 0과 5로 끝나는 해에만 골프의 성지라고 불리는 스코틀랜드의 세인트앤드류스 올드코스에서 열리듯이 이 엑스포도 그와 같은 해에만 열리는 것입니다. 그간 두 번의 엑스포를 치른 경험이 있는 우리나라는 현재 부산 엑스포의 유치를 위해 유치 신청을 낸 타국의 경쟁 도시들과 진검 승부를 벌이고 있습니다. 국가 차원에서 대통령은 물론 유관 정부 기관과 부산 지자체, 그리고 세계에 진출해 있는 우리 대기업의 총수들이 앞장서서 발 벗고 유치 활동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부디 모두가 애써 노력하고 있는 만큼, 그리고 우리 대한민국이 안팎으로 또 한 번 큰 걸음을 껑충 뛰기 위해서라도 꼭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