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설

by 마하

집에서 편히 영화를 볼 수 있는 OTT 서비스 시장이 팬데믹을 겪으며 크게 성장했습니다. 그것의 선두주자인 넷플릭스는 2016년 국내에 들어왔습니다. 본래 문명과 기계의 속도를 따라가는데 지극히 늦고 게으른 저는 뉴스에서만 그것을 접하다가 어느 날 드디어 스스로 넷플릭스를 찾게 되었습니다. 2년 전쯤 지인이 어떤 영화를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당시 저의 영화 관람 형태인 극장과 케이블 TV에서는 볼 수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그 영화가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의 저자로 알려진 마르코폴로의 일대기를 다룬 시리즈물 <마르코폴로>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넷플릭스를 찾게 되었고 첫 작품으로 그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마르코폴로>는 요즘 아이들 말로 저의 넷플릭스 입덕 작품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제가 기억하는 한 집에서 케이블 TV를 통해 영화를 본 적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이 영화가 좀 이상했습니다. 스토리도 좋고 스케일도 크고 화려해 볼거리가 많은 대작인반하여 어딘가 생경함이 느껴지고 어색해 보인 것이었습니다. 동양인으로서 같은 동양의 역사를 다룬 영화를 보면 처음 봐도 익숙한 느낌이 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영화의 특성상 허구가 필요해도 역사물이라면 사실감이 있어야 하는데 <마르코폴로>는 그보다는 마치 판타지물을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했습니다. 돈을 많이 쏟아부어 너무 화려해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서양인이 동양인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무대를 꾸미다 보니 미장센의 디테일이 떨어지거나, 반대로 오버해서 그랬을까요? 칭기즈칸의 후예인 몽골인은 우리와 가장 닮은 민족이라 딱히 거부감이 없고, 그들이 침공해 세운 원나라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의 왕조인 데다가 우리 역사인 고려와도 상관이 있어 이래저래 이질감이 없어야 하는데 <마르코폴로>는 뭔가의 막이 한 겹 눈앞에 있는 느낌으로 내내 그 시리즈를 시청하게 만들었습니다.


넷플릭스의 대작 <마르코폴로> 포스터, 중앙) 쿠빌라이 칸, 우) 마르코폴로, 2016 오픈


그럴 수밖에 없는 한 가지 확실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등장인물들입니다. 원나라의 세조가 된 몽골인 쿠빌라이 칸 앞에 좌우로 도열한 만조백관의 모습이 전통적인 중국의 그들과는 많이 달랐던 것입니다. 신료들의 숫자가 적은 것도 그랬지만 그 와중에 그들 중엔 외국인도 많이 껴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낯설게 보였을 것입니다. 절대 권력을 쥔 동양의 황제 앞에 선 신하들인데 통일되지 않은 피부 컬러와 외모, 그리고 제 각각 다르게 입은 복장 등으로 인해서 원나라 초기 그 조정의 모습은 꽤나 산만하게 보였습니다. 제 눈엔 마치 그런 황제와 신하들의 모습이 할리우드 마블 영화의 히어로 군단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영화적인 과장과 생략은 있었겠지만 이것이 틀린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몽골의 5대 칸이자 원나라를 세운 쿠빌라이 세조는 역사상 실제로 그렇게 했으니까요. 그래서 그는 국적을 가리지 않고 중앙아시아와 서방의 외국인들은 물론 당시 그들이 침략한 적국인 중국의 주류인 한족까지 그의 핵심 가신으로 삼아 곁에 세우고 제국을 통치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로 치면 정부 주요 요직에 다문화인들이 대거 있었던 것입니다. 쿠빌라이 칸은 그들의 종교 문제에 있어서도 불교, 도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 무엇을 믿든 전혀 개의치 않고 신앙의 자유를 보장했습니다. 과연 세계를 정복한 할아버지인 칭기즈칸의 손자답게 그는 그 시절 이렇게 글로벌 정치를 펼친 진정한 코스모폴리탄이었습니다. 눈의 색깔이 다르다 하여 색목인(色目人)이라 불린 외국인들, 그 안에 이 글의 주인공 마르코폴로가 있었고, 그가 칸의 총애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마르코폴로(1254~1324)의 모자이크 초상, 프란체스코 살비아티, 16세기 중엽


2022년 9월 말 저는 구 유고 연방의 일원 중 4개국의 여행을 떠났습니다. 꽃보다 아름답다고 하는 아드리아해에 접한 발칸반도의 국가들을 돌아보는 여행이었습니다. 일정 중 일행은 크로아티아의 스플리트에서 두브로브니크로 가는 길에 조그만 페리를 타고 어떤 섬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섬의 올드 타운은 주변 바다를 빙 둘러 피라미드 모양의 완벽한 중세 성곽 도시의 정형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성안은 처음부터 계획도시로 설계되어 중앙을 관통하는 큰 도로 좌우로 바다 쪽으로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들이 대칭으로 이어져 위에서 내려보면 마치 생선뼈를 연상하게 했습니다. 도로를 직각의 십자가 구조가 아니고 그렇게 일정하게 각을 살짝 틀은 헤링본 구조로 만든 것은 해풍 통과의 최적성을 기하기 위함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찍이 문명화된 이 섬에서 생각지 못한 한 인물의 이름을 듣고 놀랐습니다. 마르코폴로였습니다.


마르코폴로는 베네치아 국적이니 요즘 국경선으로 치면 이탈리아 사람입니다. 그가 살던 13세기 말과 14세기 초 베네치아는 독립 국가였습니다. 베네치아는 게르만민족 남하 시 쫓겨난 이탈리아인들이 세운 바닷가 끝 조그만 마을이었는데 계속 난민이 유입되어 자치 도시로 발전하더니 12세기 십자군전쟁 때엔 그 특수로 도시의 기운이 절정에 달했습니다. 동방 무역으로 큰돈을 벌어 그 경제력으로 해상을 지배한 것입니다. 당시 베네치아는 한때 그들을 지배해 온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할 정도로 맹위를 떨쳤습니다. 이미 오늘날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북마케도니아, 그리스에 이르는 아드리아해와 달마티아 지방의 주요 도시에 그들의 무역 거점인 식민지를 건설하고 국가 형태를 갖춘 베네치아 공화국이었습니다.


마르코폴로는 이 시기인 1254년 위에 등장한 섬 코르출라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즉 코르출라 사람이지만 베네치아의 국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두 도시는 오늘날 서로 마르코폴로의 연고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제가 방문했을 때에도 코르출라 거리 곳곳에서 마르코폴로의 얼굴과 이름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위) 마르코폴로의 고향인 아드리아해의 코르출라 섬. 아래) 마르코폴로의 생가, 오른쪽 사진 벽면에 그의 부조가 부착된 집이 과거 그의 집


하지만 오스만 제국의 부상으로 동방 무역이 막히자 베네치아는 힘이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18세기 말 나폴레옹이 유럽을 휘어잡았을 때에 국가는 해체되고 도시는 이탈리아의 영토로 편입되었습니다. 그렇게 역사의 수레바퀴가 몇 바퀴 더 굴러 마르코폴로의 고향인 코르출라는 금세기 크로아티아의 영토가 되었는데 그렇다고 크로아티아가 마르코폴로를 자국민의 선조라고 우기기엔 스스로도 아니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은 러시아 영토가 된 칼리닌그라드에 칸트가 묻혀있는 것과 유사한 모양새입니다. 칸트 생존 시 그 도시는 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였습니다. 이렇듯 자국의 민족과 상관없는 사람이 후대의 선조가 되는 이 현상은 강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계속해서 국경선이 변경되어 온 유럽 역사의 한 단면입니다.


코르출라 섬에서 어려서부터 바다를 보고 자란 마르코폴로는 15세가 되자 동방과의 무역을 해오던 아버지와 삼촌을 따라 동으로 동으로 육로를 통해 머나먼 몽골 제국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3년의 여정 끝에 1274년 드디어 쿠빌라이 칸을 알현하고 그의 신임을 얻어 관직을 받고 17년 간 그곳에 머물며 중국 대륙의 이곳저곳을 돌아보았습니다. 그가 칸을 만나기 3년 전인 1271년 쿠빌라이는 중국을 통치하기 위해 국명을 원나라로 하고 초대 황제인 세조가 된 상태였습니다. 거대한 중국 대륙을 다스리기 위해 역대 중국의 왕조처럼 중국화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5년 후 1279년 한족의 국가인 남송을 멸망시켜 이민족 중 처음으로 중국 대륙을 완전히 통일한 한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마르코폴로는 쿠빌라이 칸과 그 통일의 여정을 함께 한 것입니다. 넷플릭스의 영화 <마르코폴로>에 남송이 계속해서 나오는 이유입니다.


마르코폴로는 이런 원나라 초기에 색목인 우대 정책으로 특채된 것인데 다소 논란스러운 것은 이 당시 그의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원나라의 역사에도 나오지 않고 그곳에서 그가 쓴 책도 없습니다. 그의 저서인 <동방견문록>은 기록물인데 동방의 현장에 그가 있던 이 17년 기간 동안 쓰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기록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져 기억에 의존해서 남기긴 힘든데 말입니다.


몽골 제국의 5대 칸이자 원나라를 세운 세조인 쿠빌라이 (1215~1294)


<동방견문록>은 마르코폴로가 귀국 후 생각지 않은 시기와 장소에서 기록되었습니다. 원에 체류 기간 동안 그는 기회만 되면 고향으로 가고자 했지만 그를 총애하던 쿠빌라이 칸이 놓아주지 않아 그것은 번번이 좌절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는 페르시아 지역으로 시집가는 공주의 가이드 명목으로 우여곡절 끝에 1295년 베네치아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귀국 후 얼마 안 되어 그 시기 지중해 패권을 놓고 싸우던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전쟁에 나가 포로로 잡혔습니다. 동방으로만 가던 그가 이번엔 본의 아니게 서방으로도 간 것입니다. 참으로 고국에서 살 팔자는 못 된 마르코폴로였습니다. 하지만 그때 대반전이 일어나는데 1298년 감옥에서 쿠빌라이 칸에 이어 그를 역사적인 인물로 만들어준 또 한 명의 은인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그는 소설가인 루스티켈로였습니다. 그에게 마르코폴로는 동방에서 겪은 경험담을 들려주었고 그것을 받아 적어 책이 되어 나온 것이 바로 <동방견문록>입니다.


만약 마르코폴로가 감옥에서 루스티켈로를 만나지 않았으면 그 책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때까지도 쓰지 않은 책을 그가 이후에 쓸 리는 없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이 책이 대박이 났습니다. 유럽인들이 신기하고 신비롭게까지 생각하는 유럽 동쪽의 세계인 중국, 몽골, 중앙아시아, 인도, 페르시아와 일본 등의 지리와 민속에 대해 기록한 책이니 얼마나 화제가 되었겠습니까? 더구나 그곳에 17년 간 고위 관료로 근무했던 사람이 쓴 책이니, 아니 쓰지는 않고 말한 책이니 당연히 베스트셀러가 된 것입니다. 동양의 진귀한 물품들, 희귀한 동식물과 당시 서양보다 앞선 중국에 대한 신기술 등이 그 안에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역시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려면 아주아주 훌륭한 일을 한 위인이 되거나, 반대로 아주아주 나쁜 짓을 한 악인이 되거나, 또는 이도저도 아니면 책을 남겨야 합니다. 본인이 안 써도 말입니다.


<동방견문록>의 원제는 <세계의 서술(The Description of the World)>입니다. 당시의 세계는 유럽과 아시아가 전부였기에 그렇게 지었을 것입니다. 이 제목을 일본에서 <동방견문록>이라 번역하여 우리도 지금까지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마르코폴로가 들으면 섭섭해할 제목입니다.


<동방견문록> 이 책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아무도 마르코폴로를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당시에도 동양을 오가던 사람들은 많았으니까요. 당장은 그의 아버지부터가 동양을 오가던 서역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쿠빌라이 칸이 마르코폴로와 같은 색목인을 우대한 것처럼 유럽과도 맞닿은 그 큰 나라를 다스리려면 그가 채용한 다른 유럽인들도 분명히 더 있었을 것입니다. 훗날 우리 조선에 표류해 온 네덜란드인 하멜처럼 말입니다. 그도 <하멜 표류기>라는 책을 남겼습니다만 관심도는 <동방견문록>에 훨씬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동양의 신비가 많이 벗겨진 17세기 중엽인 데다가 조선이라는 나라는 중국이나 일본보다는 관심도가 덜 했으니까요.


동방견문록의 영문 번역본


하지만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은 그 사실성에 대한 논란이 많아 설(說)로도 남아있습니다. 직접 보고 듣고 쓴 견문록이라 하기엔 그가 묘사한 동방에 대한 내용에 상당히 허위성 있는 내용들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신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기괴한 동식물들이나 궁전 지붕이 모두 황금으로 뒤덮였다 등이 그런 것들입니다. 그리고 크기나 숫자도 실상보다 꽤나 부풀려서 묘사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뻥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책에서는 그가 양주라는 곳에서 행정관으로 3년 간 근무했다는데 원나라의 역사 기록에 그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도 이런 논란에 대해 불을 붙이고 있습니다. 즉, <동방견문록>은 마르코폴로가 동방을 가지 않고 그곳을 다녀온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재탕한 책이라는 것입니다. 당장 그의 곁에 그와 가까운 아버지와 삼촌이 있었습니다. 또는 그런 관점이라면 그가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동양에 관한 책이나 문서를 보고 이야기한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허위나 과장 부분은 감옥에서 마르코폴로가 허세에 절어 요즘 말로 라떼 얘기를 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남자에게 왕년이나 과거는 대부분 화려한 법이니까요. 그리고 역사가가 아니고 소설가가 받아 적은 것도 그렇게 내용이 과장된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소설도 연애 전문 소설가였던 감옥 동기 루스티켈로는 흥행에 도움이 될 내용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또한 인쇄술이 발달 안 된 14세기 초라 인쇄가 아니고 필사본으로 이 사람 저 사람 손을 타며 쓰고 번역되면서 내용이 더 부풀려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동방견문록> 같은 역사적인 책을 쓴 저자의 루스티켈로가 잘 알려지지 않은 점은 좀 특이합니다. 구술을 받아써도 그것을 구성하고 각색한 저자는 작가인데 말입니다. 마르코폴로의 유명세에 가려서인가요? 아쉽게도 지금 <동방견문록>의 원문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위의 마르코폴로의 생가 외벽에 부착된 그의 동방 여정과 귀로 여정 걸개 이미지


중요하고 확실한 것은 누가 썼든, 내용의 질이 어쨌든 <동방견문록>으로 인해 서구인들의 동양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그곳에 가고 싶다는 욕망을 부추겨 동양에 대한 탐사를 앞당긴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 오스만 제국의 출현으로 마르코폴로가 갔던 그 육로로는 유럽인이 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길은 바다밖에 없었습니다. 마르코폴로 사후 한 세기가 지난 1428년, 포르투갈의 어떤 남자가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온 형에게서 <동방견문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 형은 동생을 위해 그 책을 포르투갈어로 막 따끈하게 번역해서 건네주었습니다. 그 동생이 바로 항해술을 촉진시켜 대 항해 시대를 연 엔리케 왕자였습니다. 그 뒤로 그의 이름 뒤에 바르톨르뮤디아즈(1488, 희망봉 발견), 콜럼버스(1492, 인도를 가다 아메리카 발견), 바스코다가마(1498, 인도 도착), 마젤란(1522, 태평양을 돌아 세계일주 완성) 등이 이어졌습니다. 동양은 서양과 이렇게 이어졌습니다.



* 넷플릭스의 <마르코폴로>는 본래 시리즈 3까지 기획되었으나 시리즈 2를 마감하고 시리즈 3은 취소되었습니다. 시리즈 1과 2에 각각 9천만 불에 이르는 거액을 투자했으나 흥행이 그에 못 미쳐 내린 결정이라고 합니다. 개인적으론 매우 아쉽습니다. 같은 흐름으로 이어진 마르코폴로의 귀향 여정과 <동방견문록>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못 보아서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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