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의 마지막 상속자 안나 마리아 루이자는 3남매의 장녀였습니다. 그 3남매 모두 자녀가 없어 메디치 가문의 대가 끊어진 것입니다. 먼저 동생인 장남은 양성애자여서 난잡한 생활로 성병이 있어 애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 아래 차남은 한술 더 떠 동성애자로 동성 애인을 가까이하고 부인은 멀리해 애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똑똑했던 장녀인 그녀는 남편이 매독을 옮겨 그 후유증으로 임신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메디치는 메디치답지 않은 종착역에 다다렀습니다. 하지만 안나 마리아 루이자는 1743년 죽으며 그 가문이 소유한 모든 예술품을 피렌체 시에 기증하였습니다. 단, 그것들을 시 외부로 내보내지 않는다는 조건이었습니다. 과연 메디치다운 피날레였습니다. 이로써 15세기 초부터 350여 년간 피렌체의 권세가로 르네상스를 이루어 낸 메디치 가문은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때 메디치가 남긴 컬렉션은 그대로 오늘날의 우피치 미술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회화, 조각, 건축 등에 아낌없는 지원을 하고 예술가를 양성해 온 메디치였지만 있을 법도 한 그 목록에 하나 빠진 것이 있었습니다. 만약 역대 메디치 중 최고 전성기를 구가한 15세기 말의 로렌초 메디치가 중국의 명나라를 공간 여행하여 다녀왔다면, 또는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의 유럽으로 시간 여행을 다녀왔다면, 그는 그가 지원한 여러 예술품 리스트에 분명히 그것을 추가하려 애썼을 것입니다. 메디치 리스트에는 없는 예술품이지만 훗날 온 유럽이 열광했던 예술품, 그것은 바로 도자기입니다. 유럽의 도자기는 천신만고 끝에 메디치 가문이 끝나가는 1708년 비로소 처음으로 유럽 땅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전까지는 차이나라 불린 중국의 도자기만을 바라보며 살던 유럽의 왕족과 귀족들이었습니다. 마르코폴로가 동방을 다녀온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는 유럽으로 흘러들어 갔습니다. 특히 도자기 중에서 푸른빛이 감도는 명나라의 청화백자는 하얀 금이라 불리며 당시 유럽의 저택과 맞먹을 정도로 값이 비쌌습니다. 하지만 유럽은 13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워지는 도자기를 만들 기술이 당시엔 없었습니다. 그 아래 온도에서 만들어지는 자기나 유리 등의 집기만을 자체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럽은 그 비싼 물품을 사기 위해 그들이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힘겹게 채굴한 은을 중국에 대량으로 갖다 바쳤습니다. 수요와 공급이 안 맞는 시장이었습니다. 17세기 말 중국 청나라의 강희제, 옹정제 시절은 유럽과의 이런 도자기 무역만으로도 부강할 수 있던 것이었습니다.
리움미술관의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 전시회에 출품된 조선 초기의 청화백자 매죽문 호(국보 219호), 2/28~5/28
결국 도자기 공급을 늘려야 하는데 그러려면 유럽에서 기술력을 높여 도자기를 자체 생산하거나, 중국 도자기에 버금가는 퀄리티를 가진 해외 공급처를 추가로 찾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라마다 왕실이 앞장서서 도자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데 그들 중 가장 먼저 성공한 지역이 독일의 마이센이고 그때가 1708년이었습니다. 드레스덴을 통치하던 강성왕이라 불린 아우구스트 2세가 고용한 연금술사 출신 뵈트거가 유럽 1호 도자기를 마이센 지역 가마에서 구워낸 것입니다. 그리고 드레스덴 옆 작은 마을이었던 마이센은 도자기를 원산지인 차이나라고 부르듯이 그 지역명이 곧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유럽 최고의 도자기로 평가받는 마이센이 된 것입니다.
그 마이센 뒤로 유럽 각 나라에서 후발 주자로 비엔나(오스트리아, 1718), 세브르(프랑스, 1756), 로열코펜하겐(덴마크, 1775), 헤렌드(헝가리, 1826) 등의 명품이 줄줄이 태어났습니다. 바야흐로 유럽의 도자기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모두 다 지역명입니다. 잘 알려진 영국의 웨지우드(1759)나 로열덜튼(1815)은 소뼈를 갈아 넣은 본차이나이기에 같은 도자기라도 계보가 다릅니다. 뼛가루가 들어가서 강도가 세고 가벼우면서도 질긴 도자기가 되었습니다. 브랜드 네임도 탄생 지역명이 아닌 창업자의 이름을 따랐습니다. 영국은 언제나 특이하니까요. 그런데 이 본차이나도 역시 아메리카 신대륙에 영향을 주었는데 그 도자기에 들어가는 소뼈를 구하기 위해 북미의 들소인 버펄로가 대량으로 희생이 되었습니다. 그 소는 인디언의 식량이기도 했습니다. 북미에선 들소가, 남미에선 은이 도자기를 위해 유럽에도 가고 아시아까지 간 것입니다.
공급 확대를 위한 또 다른 대안인 신흥 공급지로는 일본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17세기 초부터 일본의 도자기가 유럽에 흘러들어 갔는데 이 도자기에 유럽인들이 브라보를 외쳤습니다. 그런데 그 도자기를 만든 도공은 일본인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 글에 등장하는 사람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일본으로 끌려간 우리 조선의 도공들이 유럽으로 가서 이름을 날린 그 일본 도자기인 야키(ya[燒]ki)를 만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훗날 일제강점기인 1937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조선의 손기정 선수를 떠오르게 하는 이전의 역사입니다. 조선의 도공들이 일본 땅에서 세계에서 인정받는 메이드 인 재팬 도자기를 만들어낸 것이니까요. 아마도 그들이 일본에 잡혀가지 않고 조선에 있었다면 우리 도자기가 메이드 인 코리아란 이름으로 그 시절 유럽에 갈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역대 심수관 가문이 제작한 명품 도자기. 가고시마 심수관요 박물관
이때 일본에서 도자기를 수출할 때 그것을 싼 포장지에 그려진 우키요에도 유럽에 함께 들어갔는데 그것 또한 유럽의 예술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특히 인상주의 계열 화가들에게 어필되었습니다. 그들 눈에 도자기를 비롯한 동양의 것들은 웬만하면 신비해 보일 수밖에 없었는데 다소 만화 같은 화려한 우키요에는 세상에서 처음 보는 이국적인 스타일의 그림이었을 것입니다. 고흐, 고갱, 마네, 드가, 로트렉 등의 화가들이 그것에 반하여 그들 작품에 우키요에를 차용하였습니다. 유럽 예술계에 도자기에서 시작된 자포니즘(Japonism)의 바람이 분 것입니다.
일본 도자기에서 유럽으로 우키요에가 페어로 들어갔다면 먼저 진출한 중국 도자기에선 차가 페어로 들어갔습니다. 중국의 차는 유럽인에게 매혹적인 음료였으니까요. 특히 영국인은 바다 위 배 속에서 오랜 이동 시간 중 산화되어 검어진 이 차에 열광해 티타임이란 시간과 용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도자기는 물론 차사랑에 빠졌습니다. 홍차를 영어로 레드티가 아닌 블랙티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이 찻값도 만만치 않아 결국 영국인은 차의 해외 유출을 엄격히 통제하던 중국에서 몰래 차 종자를 빼내와 그들의 식민지인 인도 본토와 실론섬에서 차 재배에 성공하였습니다. 그 이전 고려말 우리의 문익점이 목화씨를 붓두껍에 넣어 중국에서 빼오던 것과 같은 전설적인 수법이 동원되어 홍차의 꿈이라 불리는 실론티가 탄생한 것입니다.
이 글은 지난 글인 <메이지 유신의 프리퀄, 세키가하라 전투>와 연관성이 있는 글입니다. 지난 2월 초 메이지 유신의 고향으로 가고시마를 답사했을 때 그곳에 있는 일본 도자기의 유력 발생지도 이어서 답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글은 그 글처럼 가고시마 현의 맹주로 지난 600년 이상 그 지역에서 권세와 부를 누리며 살아온 시마즈 가문과도 역시 또 관련이 있습니다. 그 글에서 1598년 크게 보면 임진왜란, 쪼개서 보면 정유재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당시 오늘날 가고시마 현인 사쓰마 번의 다이묘인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순신 장군을 대적하는 적장으로 참전해 우리 역사와 관련이 있다고 했는데, 그는 그 침략 전쟁에서 조선의 도공과도 관련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역시 또 나쁘게 관련이 있었습니다. 패전으로 귀국하며 그냥 돌아가지 않고 심당길과 박평의를 비롯한 조선의 도공 43명을 귀국하며 납치해 갔기 때문입니다.
1598년 사쓰마 번의 번주인 시마즈 요시히로에 의해 끌려온 조선 도공 심당길. 가고시마 심수관요 박물관
그들 중 본명이 심찬(沈讚)인 심당길은 본관이 경상도 청송이지만 경기도 김포에 살았고 난리통에 병사로 참전해 전라도의 남원 전투에서 포로로 붙잡혀 끌려갔습니다. 그래서 지금 조선은 사라지고 대한민국이 된 우리나라에 세 군데 연고가 있는 그의 집안입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심당길과 조선 도공을 그의 영지인 사쓰마 번으로 끌고 가 그의 계획대로 멋지게 도자기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오늘날 사쓰마야키(薩摩燒)라 불리는 가고시마 도자기의 원조가 되게 한 것입니다. 그 이전에 일본엔 도자기가 없었습니다. 역시 위에서 설명한 유럽의 예처럼 1300도 이하에서 구워지는 자기는 만들어도 그 이상의 고온에서만 가능한 도기를 만들 기술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심당길의 후손으로 잘 알려진 심수관과 관련해서는 국내 언론 기사와 여러 문건에서 다루어 많은 이야기가 나오지만 이 글에 소개되는 이야기는 지난 2월 초 그의 공방인 심수관요(沈壽官窯)를 방문했을 때 현재 심수관을 통해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심수관은 그 가문이 만든 도자기의 브랜드 네임이자 적통 후계자가 된 도공에게 붙여주는 세습 이름입니다.
현재 가고시마 히오키 시에 있는 심수관요를 총지휘하는 심수관은 15대 후손으로 그의 한국 이름은 심일휘(沈一輝)입니다. 명문 와세다 대학교 교육학부를 졸업하고 교토와 이탈리아,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도자기 공부를 한 도자기 장인입니다. 우리나라에선 전통 김칫독의 비밀을 풀고 만드는 법을 배우기 위해 30대 초 경기도 이천에서 1년 간 공부를 하고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로는 이천의 그 가마터는 하도 열악해 화장실도 없어 야외에서 따로 볼일을 해결할 정도로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조상의 나라 조국을 더 알기 위해 서울의 대학원 진학까지 타진했지만 면접 시 학교 고위 관계자의 돌발성 발언으로 그 계획은 접었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뒤에서 밝히겠습니다. 본래 기자를 꿈꾸던 그였지만 결국 일본인 어머니의 권유로 그는 가업인 도공의 길을 택했습니다. 아마 그렇게 그의 아들도 16대 심수관이 될 것입니다. 아, 두 아들 중 장남으로 결정되었다고 합니다.
2023년 현재도 불타오르고 있는 심수관요 내 전통 방식의 도자기 가마
1598년 사쓰마 번의 다이묘 시마즈 요시히로는 납치해 간 조선의 조선의 도공들에게 매우 뜻밖의 대우를 해주었습니다. 아주 후한 대우를 해준 것입니다. 그들 조국 조선에선 도자기를 구우며 군역을 비롯한 각종 부역에 시달리게 하면서도 농자는 천하지대본이라고 농민을 우대하고 그들과 같은 상공인은 천대했는데 일본에선 도자기 굽는 일에만 전념하게 하고 계급도 조선처럼 하층민이 아니고 성과에 따라 평민도 아닌 지배 계급인 사무라이 계급까지 올라갈 수 있게 해 준 것입니다.
아울러 시마즈 가문은 그들을 조선과 똑같은 환경에서 살게 하였습니다. 조선말을 쓰고, 조선 사람끼리 결혼하게 하고, 조선의 풍속을 그대로 지키게 하였습니다. 최적의 도자기 생산을 위해 환경을 거스르지 않겠다는 번주의 판단이고 결정이었습니다. 결국 심당길은 그의 고국 조선과는 물과 토양이 다른 일본이지만 그런 최적의 작업 환경에서 도자기를 굽는 데에만 열중해 결국 성공을 이루었습니다. 세계적인 명품 사쓰마야키가 조선 도공에 의해 탄생한 것입니다.
유럽인이 열광했던 심수관 가문의 화려한 사쓰마야키. 가고시마 심수관요 박물관
* 다음 주말 <하>편에선 심수관 가문 이외에 끌려간 조선 도공들의 이야기와 이후 그 도자기가 일본에 어떻게 기여했는지에 대해 쓰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조선 도공의 후예로 사는 현재 심수관의 심경과 국가관에 대해서도 정리해서 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