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03년 오늘날 도쿄인 에도에 막부를 열고 초대 쇼군으로 취임하였습니다. 일본 역사에서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에 이은 세 번째 막부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다이묘 체제를 전면적으로 개편했습니다. 270여 개에 달하는 크고 작은 번과 다이묘를 3개의 등급으로 분류한 것입니다. 신판(親藩)이라 불리는 1등급 다이묘는 이에야스의 친족들로 그들은 에도 지역에 거주하게 하였습니다. 2등급인 후다이(譜代) 다이묘는 본래 그의 가신 그룹으로 에도 외곽 주요 지역에 영지를 나눠주고 거주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3등급인 도자마(外樣) 다이묘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충성을 맹세한 그룹으로 에도에서 멀고 험한 지역에 배치하였습니다.
즉, 쇼군인 도쿠가와 가문 주변을 오리지널 충성 그룹으로만 배치해 유사시 호위 무사 역할을 하게 만든 것입니다. 물론 대우도 등급에 따라 나눠 다이묘의 힘을 나타내는 영지의 쌀 출하량도 그에 맞춰 조정해서 분배했습니다. 이런 정책으로 에도에서 멀리 떨어진 도자마 다이묘들은 갈수록 세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 3그룹에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이 속해있었습니다.
도쿠가와 막부의 에도 시대를 연 17세기 초 에도의 모습 (출처, 일본국립역사민속박물관)
중앙 막부(幕府)의 대장 쇼군(將軍)과 지방 번(藩)의 번주(藩主)인 다이묘(大名)들이 주종 관계로 상하 충성과 영지를 주고받으며 움직인 이 에도 시대의 정치 시스템을 막번체제(幕藩體制)라고 부릅니다. 막부는 다이묘들의 반란을 막고 충성심을 유발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결혼 정책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쇼군은 양녀를 들여서라도 지방의 여러 다이묘들과 사돈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이묘들의 주거도 통제를 하였는데 다이묘가 사는 성을 신축하거나 개축할 때는 반드시 막부의 허락을 득해야만 했습니다. 건축 설계도를 막부에 제출해 결재를 맡아야만 공사에 들어갈 수 있던 것이었습니다. 반역 시 그 성을 쉽게 치고 들어가기 위한 목적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다이묘 길들이기의 끝판왕은 참근교대(参勤交代)라 할 것입니다. 모든 다이묘들은 격년제로 2년에 1년은 막부가 있는 에도에 들어와 살아야 했습니다. 예상하듯 이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인지라 그 행렬이 이동하는 데에 매우 긴 시간과 큰 비용이 드는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다이묘들은 그들의 권위를 위해서도 에도 입성과 번으로의 낙향 시 화려하게 행렬을 꾸려야 했습니다. 에도에 머물 때에도 그와 그의 친족과 가신들이 머물 집이 있어야 하니 이것은 정말 큰일이었습니다. 오늘날 야마구치 현인 조슈 번도 혼슈 끝으로 멀지만 규슈 최남단인 오늘날 가고시마 현인 사쓰마 번의 경우는 이동 시간 만으로도 길바닥과 바다 위에 그 시간이 다 소요되었을 것입니다. 재정도 그만큼 더 크게 고갈되었겠지요. 이런 차별과 괴롭힘으로 그 둘의 불만은 이래저래 쌓여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막부에 대한 저항 정신이 계속 자라난 것입니다.
그러나 다이묘들의 참근교대는 역설적으로 일본의 발전을 초래했습니다. 북쪽 끝 아오모리부터 남쪽 끝 가고시마까지 전국의 모든 다이묘들이 이렇게 2년에 한 번씩 이동함으로써 도로와 교통이 발달하고 물자가 이동하며 경제가 활성화되어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통되는 화폐도 통일되어 에도를 중심으로 전국이 단일한 경제 시스템 하에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혼슈 북쪽 섬 홋카이도는 사람이 살기 힘든 땅이라 해서 막부가 눈독을 들이지 않아 번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후 러시아가 남하하면서부터막부도 홋카이도에 관심을 가지며 경계를 늦추지 않고 사람을 살게 한 것입니다. 물론 그 넓은 땅인 홋카이도엔 지금도 현이 설치되어 있지 않고 일본의 도도부현(都道府県) 행정체계의 두 번째 도(道)로만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마 미래 어느 날엔 그곳 홋카이도도 여러 개의 현으로 나눠질지 모르겠습니다.
에도 시대 다이묘의 참근교대 행렬 모습
난학의 발달, 선각자의 등장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시작된 막번체제는 대정봉환이 거행된 1867년까지 264년 간 유지되었습니다. 그 사이 세상은 계속해서 변해갔습니다. 막부는 직영 영지와 지방 다이묘들로부터 걷는 세입이 전통적인 수입원이었지만 갈수록 발달하는 상공업으로부터 얻는 수익도 상당했습니다. 특히 당시 일본 해외 무역의 창구였던 나가사키의 인공섬인 데지마를 통해 얻어지는 무역의 차익은 모두 막부가 독점하였습니다. 그 무역의 독점 파트너는 기독교를 포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손을 쓴 네덜란드였는데 이로 인해 네덜란드의 학문과 문물이 일본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일본에서 네덜란드 상선을 통해 유럽으로 들어간 수출품도 많았는데 그중 유럽인이 열광한 대표적인 상품이 도자기와 일본 전통 회화인 우키요에였습니다. 도자기에 대해선 다음 글에서 별도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기 네덜란드를 통해서 들어온 서구 학문을 통칭해서 난학(蘭學)이라 불렀습니다. 당연히 일본의 개혁파와 선각자들은 이 난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그리고 료마의 스승 중 한 명인 가쓰 가이슈 등이 그들이었습니다. 가쓰 가이슈는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1867년 대정봉환을 결정할 때 그의 곁에 선 가신으로 쇼군의 결정을 도와 하마터면 있을지도 모를 무력 충돌을 막고 무혈로 대정봉환을 이루게 한 자입니다. 막부 내부에도 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한 유력 인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885년 <탈아론>을 기고하며 일본 제국주의의 방향을 제시한 후쿠사와 유키치도 일찍이 난학을 공부한 계몽가였습니다.
번들 중에선 시마즈 가문으로 대표되는 사쓰마 번이 이 난학에 가장 적극적이었습니다. 그중 11대 번주인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다이묘임에도 가장 난학에 심취한 자로 급속한 개혁 성향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사쓰마 번 출신 유신3걸인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를 등용하고 가신으로 중용해 그들과 함께 일본의 근대화를 논하고 실행하였습니다. 그들 또한 그런 주군을 존경해 그의 가르침과 뜻대로 사쓰마 번이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되는 데에 앞장섰습니다.
사쓰마 번의 개혁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 (1809~1858)
이 글 인트로에 등장한 가고시마의 다이묘 별채인 센간엔(仙巖園) 바로 곁에는 쇼코슈세이칸(上古集成館)이라 불리는 유적이 있습니다. 이름에서 보듯이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단지인데 바로 공장 단지입니다. 번주인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1851년 서양식 제철, 제강, 조선, 유리 등의 공장을 일본 최초로 이곳에 세웠습니다. 쇼코슈세이칸이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으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우리 일행이 방문했을 때에도 유리 공예품을 만드는 공장은 지금도 전통적인 방법으로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사쓰마키리코(薩摩切子)라 불리는 유리 공예 명품이 태어나는 곳입니다.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조성한 일본 최초의 서양식 공장 단지인 쇼코슈세이칸(上古集成館)의 본관(상)과 별관(하)
사쓰마와 조슈의 근대화 평행이론
일본 근대화의 시작은 1853년 에도 앞바다에 출현한 미국의 거대한 흑선이었습니다. 그 흑선을 몰고 온 페리 제독이 막부를 압박해 1854년 불평등한 미일화친조약을 맺고 네덜란드가 독점했던 나가사키 이외의 다른 항구들도 개항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후 미일수호통상조약 등을 거치며 일본엔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서구 국가들이 물밀듯이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사쓰마 번은 이렇게 그 이전인 1851년부터 외세인 서구와 중앙 정부인 막부와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근대화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과연 메이지 유신의 고향이라 불리는 사쓰만 번이었습니다. 즉, 삿초동맹의 한 축인 조슈 번엔 요시다 쇼인이라는 사상가가 쇼카손주쿠(松下村塾)라는 학교에서 그 지역의 인재들을 양성했다면, 또 한 축인 사쓰만 번에선 시마즈 나리아키라라는 개혁 다이묘가 지역의 우수한 인재를 등용하고 산업화의 길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은 경쟁적으로 근대화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선진 문물을 배우자는 측면에서도 그 둘은 일치했습니다. 1860대 초반 그 둘은 그 번의 젊은 지역 인재들을 당시 최고 선진국인 영국으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막부가 금지한 사항임에도 그들은 그렇게 중앙 막부의 눈을 피해 선진화 작업을 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1863년 조슈 번에선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5인이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1865년 사쓰마 번에선 19명이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번에서 번주가 보내줬으니 번비유학생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빠른 서구화 행보를 보인 것엔 두 번 모두 서구 열강의 뜨거운 맛을 본 것도 공통적으로 작용하였습니다.
1863년 사쓰마 번에선 다이묘 아버지의 행렬을 말을 타고 가로막은 영국인들을 번의 호위 무사들이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막부가 미국과의 조약으로 개항하자 일본 이곳저곳에 서양인들이 들어오며 국부가 유출되는 과정에서 양이(讓夷)를 외치며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에도 시대에 사무라이는 재판 없이도 농민을 비롯한 평민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후 해명과 배상을 거부한 사쓰마 번과 영국 간에 사쓰에이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조슈 번의 경우도 1864년과 1865년에 걸쳐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연합국과 전쟁을 벌인 결과 역시 또 박살이 났습니다. 아무리 사무라이 정신이 충만해도 선진화된 무기 앞에서는 게임이 되지 않았습니다. 서양의 높은 벽을 절감한 이 두 전쟁은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의 개혁가들이존왕양이(尊王讓夷)라는 기치 하에 천황을 받들고 서양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운동에서, 서양을 배우고 막부를 물리치자는 도막운동(倒幕運動)으로 방향을 튼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가고시마 만에서 영국과 일본 사이 벌어진 사쓰에이 전쟁, 1863
세키가하라 전투의 시퀄, 메이지 유신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시작된 도쿠가와 막부에 대한 구원과, 1850년대 중엽 밀고 들어오는 외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도쿠가와 막부의 무능에 분개한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의 하급 무사 출신의 선각자들은 이제 대정봉환과 유신을 향해 본격적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려면 막부와 외세에 같은 쓴맛을 보고, 같은 목표를 가진 이 두 번이 힘을 합쳐야 하는데 그게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은 워낙 개성이 강하고 기가 센 번인 만큼 두 번의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강대 강이 손을 잡기는 더 어려운 법이니까요. 그래서 중재자가 필요했는데 그 틈을 바로 비집고 들어가 1866년 사쓰마와 조슈의 삿초동맹을 이끌어 낸 설득의 달인이 바로 사카모토 료마였습니다. 이렇게 절대 섞일 것 같지 않았던 이 두 번이 합침으로써 그 이듬해인 1867년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인 요시노부는 마침내 대정봉환의 결단을 내립니다.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이 동맹을 맺었단 소식을 들은 쇼군 요시노부의 머릿속엔 266년 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그의 선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굴욕을 당했던 조슈 번의 모리 가문과 사쓰마 번의 시마즈 가문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에야스에게 죽임을 당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편에 섰던 서군의 다이묘들까지 떠올렸을지 모릅니다. 대세가 넘어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대정봉환과 거의 동시에 막부로부터 권력을 이양받은 천황은 교토에서 에도로 입성해 그 이듬해인 1868년 왕정복고를 선언하고 연호를 메이지로 선포했습니다. 바야흐로 메이지 유신의 시작입니다. 그해 도쿠가와 막부의 역사가 서린 에도(江戶)라는 이름은 도쿄(東京)로 바뀌었습니다. 천황이 기거했던 교토(京都)의 동쪽에 있는 도읍지라는 뜻입니다.
이렇듯 메이지 유신의 역사엔 그것을 만들어 낸 사람들의 역사가 서려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뿌리까지 내려가다 보면 보듯이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가 있었습니다. 당시 그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편에 서서 불이익을 당한 자들이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문을 물리치고 메이지 유신을 이루어 낸 것입니다. 단 하루의 전투가 250여 년 후의 일본을 바꾸었습니다. 길고도 긴 와신상담이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보면 도쿠가와 가문을 끌어내린 메이지 유신은 과거 주군이었던 히데요시의 복수를 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반 도쿠가와파들이 때가 무르익어 막부를 끌어내렸는데 유신까지 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거사의 타이밍이 서구 선진국들이 일본에 물밀듯이 들어올 때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일본의 근대화를 이룬 유신까지 보너스로 챙겼다는 것입니다. 처음엔 개혁가들도 양이를 주장했으니까요. 역사의 운이 따랐던 일본이었습니다. 이렇듯 1860년 대 일본은 가장 역동적으로 시끄러웠습니다. 조슈와 사쓰마, 그리고 도사 번의 개혁가들이 일본을 바꾸기 위해 열도를 헤집고 다녔으니까요. 반대로 그 시기 우리의 조선은 너무나도 조용했습니다. 1863년 고종이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그의 아버지인 대원군이 나라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던 때였으니까요.
가고시마 만에 밀접한 다이묘의 별채인 센간엔과 그 다이묘가 세운 산업 단지 유적지인 쇼코슈세이칸을 답사하며 5년 전인 2018년 메이지 유신 150주년 때 방문했던 과거 조슈 번인 야마구치 현의 하기 마을이 생각났습니다. 하기는 요시다 쇼인이 그곳 출신의 젊은이들을 가르쳤던 학교가 있는 마을로 메이지 유신의 태동지라 불리는 곳입니다. 그곳에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쫓겨 내려온 모리 가문의 무너진 성터도 답사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번 가고시마 방문은 제겐 메이지 유신을 돌아보며 다른 한 짝 비어있던 공간을 채운 답사였습니다.
야마구치 현 하기 마을에 있는 일본 메이지유신의 산실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이 작은 학교에서 요시다 쇼인은 90여 명의 조슈 번 인재를 양성함.
사쓰마와 조슈의 정한론 평행이론
끝으로 그 두 지역은 공통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우리를 아프게 한 정한론(征韓論)을 가장 강하게 주장했던 인사들의 고향이라는 것입니다. 조슈 번의 요시다 쇼인은 일찍이 정한론을 주장한 인사입니다. 그의 많은 제자와 후예들이 이후 그의 뜻을 따라서 정한론을 실행했습니다. 사쓰마 번엔 정한론을 더 원색적으로 주장한 인사가 있었는데 그는 가고시마는 물론 모든 일본인에게 인기가 높은 사이고 다카모리입니다. 유신 초기 정한론을 주장하다 다른 유신3걸인 오쿠보 도시미치와 기도 다카요시에 막혀 권력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낙향한 그였습니다. 당시 그는 전국시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같은 해법으로 조선 정벌을 주장했습니다. 메이지 유신으로 인해 실업자가 된 사무라이들에게 일자리 제공을 위해서라도 그것을 촉구한 것이었으니까요. 과연 전국구 스타답게 오늘날 그의 동상은 수도 도쿄와 고향 가고시마에 모두 서있습니다.
가고시마 시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 중 차창 밖으로 보인 메이지 유신의 실력자 사이고 다카모리 (1828~1877)
해군력이 강했던 사쓰마 번은 일본의 남쪽 현관이라 불리는 지역으로 바다를 통해 세계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서양의 선박이 일본에 들어올 때 가장 먼저 보인 도착지였으니까요. 반대로 일본이 바다를 통해 해외로 뻗어나갈 때도 사쓰마 번은 출발지 역할을 톡톡히 하였습니다. 1607년 이루어진 류큐 정벌은 사쓰마 번이 독자적으로 감행한 것이며, 메이지 유신 초기인 1874년 감행한 대만 정벌 때에도 그들은 선봉에 섰습니다. 사이고 다카모리와 실업자가 된 그의 사족들이 그 정벌에 주력군으로 동원되었습니다. 결국 류큐 왕국은 1879년 일본 영토로 편입되어 이후 오키나와 현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육군력이 강했던 조슈 번은 일본의 서쪽 끝으로 그들은 그곳을 통해 대륙과 연결되었습니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1873년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에 반대하며 고향 친구에서 정적이 된 그를 낙향시켰지만 1875년 조선의 강화도에서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정한론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미국의 흑선이 일본에게 했던 방법과 동일한 프로세스를 밟았습니다. 즉, 그와 기도 다카요시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방법론에서 차이가 있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유신3걸 퇴진 후 이토 히로부미(1905 을사늑약 주도)와 야마가타 아리토모(1894 청일전쟁, 1904 러일전쟁 주도), 이노우에 가오루(1895 을미왜변 주도), 가쓰라 다로(1905 가쓰라태프트밀약 주도) 등은 1910년 한일합병을 통해 정한론을 완성했습니다. 대륙으로 뻗어 나갈 전초 기지를 한반도에 구축한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다 조슈 번 출신으로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입니다. 조슈 번의 시모노세키는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항구로 근대화된 일본에선 도쿄에서 기차로 시모노세키를 거쳐 페리로 부산으로 들어와 기차를 타고 경성에 도달하는 데에 60시간이 걸렸습니다. 막부 시대의 참근교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입니다.
일본 최초 산업화 단지인 쇼코슈세이칸 내 서양식 주택에 입점한 스타벅스. 현관 상단 표식은 시마즈 가문의 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