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리케, 서양과 동양을 잇다 <상>

포르투갈의 대항해 시대

by 마하

아프리카 서북단 마데이라 제도에 시댁이 있는 한국 여인이 있습니다. 20세기 말에 결혼한 그녀는 시댁 첫 방문 시 그 섬을 방문하는 최초의 코리안이 되겠구나라고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에게 생경한 마데이라는 포르투갈의 영토이지만 이베리아 반도 본토에서 남쪽으로 1,000km나 떨어져 있고 그 섬의 바다 동쪽 아프리카의 모로코와도 520km나 떨어진 절해에 있으니 충분히 그럴만했습니다.


하지만 마데이라에 도착한 그녀는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그곳에 이미 정착한 코리안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무려 400년 전에 그들이 살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긴 세월을 내려오며 그 후손들의 이름이나 모습에서 대한민국 코리아를 찾기는 어려워졌지만 그곳에서 만난 주민들이 연주한 음악은 우리 농악과 너무나도 흡사해 깜짝 놀랐다는 것입니다. 풍습은 그렇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섬에 최초로 발을 디딘 코리안은 17세기 초 임진왜란이 끝나고 노예로 끌려온 조선인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포르투갈의 본토에서 1,000km 떨어진 마데이라 제도, 수도는 푼샬 (출처, 구글)


포르투갈의 마데이라는 우리 제주도가 2006년 제주특별자치도로 변경 시 모델로 삼은 섬이며 그 연으로 인해 현재 두 섬은 자매결연을 맺고 있습니다. 역시나 우리의 제주도와 마찬가지로 지금은 유명 관광지가 되어 포르투갈은 물론 유럽 각지의 많은 셀럽과 일반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이 마데이라를 더욱 유명한 핫 플레이스로 만든 인물은 바로 포르투갈의 축구 영웅인 호날두입니다. 그의 고향이 그 섬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섬의 공항이 그의 이름인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공항일 정도로 마데이라에선 왕 부럽지 않은 칙사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축구 스타로서 그의 이름값이 높기도 하지만 그가 고향인 그곳에 강한 애착을 갖고 지속적으로 투자와 사업을 하고 그곳 도민들에게 선행을 베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위에 등장한 마데이라에 시댁이 있다고 하는 여인은 제가 최근 포르투갈 여행 시 만난 현지 가이드였습니다. 그녀는 제가 살면서 지금까지 경험했던 투어 가이드 중 가장 프로페셔널한 분이었습니다.


저를 비롯한 우리 일행이 탄 비행기는 이제 이스탄불을 거쳐 리스본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아시아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에 도착한 비행기에서 내려 갈아탄 비행기가 이제는 유럽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을 향해 가고 있던 것입니다. 이스탄불엔 동양과 서양, 아시아와 유럽이 다 있으니 이것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인천 공항에서 이스탄불까지 12시간 가까이 날아와 3시간 대기 후 올라탄 비행길이라 제 몸은 이미 파김치가 된 상태였습니다. 이윽고 도착한 리스본, 서울 집에서 출발한 시간부터 따져보니 24시간이 넘게 걸린 여행길이었습니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 대한민국에서 반대 편 서쪽 끝 포르투갈에 도착한 것입니다. 지도상에서 위도와 면적도 비슷한 두 국가는 그 지도를 절반으로 접으면 아마도 데칼코마니처럼 딱 대칭으로 겹칠 것입니다. 전처럼 리스본까지 직항이 있었다면 그 여행 시간은 절반으로 줄었겠지요.


그 피곤한 여정 때문인지 포르투갈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한 인물을 떠올렸습니다. 저보다 백만 배는 더 피곤했을 인물입니다. 그는 우리 역사 속에 실존은 했지만 우리 이름은 남아있지 않고 그림 속에서만 보인 조선인입니다. 그의 이름은 그가 정착한 이탈리아에서 지은 이름으로 보이는 안토니오 꼬레아(Antonio Corea)이고, 그가 등장하는 그림의 제목은 <한복을 입은 남자(Man in Korean Costume)>이며, 그를 모델로 작품을 그린 화가는 벨기에의 루벤스였습니다. 루벤스는 17세기 초에 활동한 화가로 이 그림의 제작 연도는 1617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대체 400년 전 그 코리언은 어떻게 해서 유럽에 가고 루벤스 앞에까지 서게 된 것이었을까요?


'한복을 입은 남자', 파울로 루벤스, 1617


유력한 추론은 그가 포르투갈인에 의해 유럽으로 팔려갔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 시절 기독교 말살 정책을 펼쳐 1637년 그 땅에 와있던 포르투갈인들을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본국으로 다 추방했습니다. 당시 막부가 넌더리를 낸 포르투갈인은 기독교 포교로 민심을 뒤흔든 신부들뿐만이 아니라 일본인들을 상대로 노예무역을 일삼던 노예상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매매한 노예들 중에 조선인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실제로 많았습니다. 전쟁은 평소에는 생각지 못한 비극들도 양산하니까요.


일본에 1543년 조총을 전수해 준 포르투갈인이 일본을 오가던 그 시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때 약 10만명 정도의 조선인이 포로로 끌려갔는데 그들 중 전후 포로 송환 시 고국으로 돌아간 자들도 있었지만 나머지 조선인들은 일본에서 뿌리를 내린 도자기공 이외에는 행방이 묘연했습니다. 그들 중 많은 조선인들이 포르투갈 노예상들에 의해 그들의 본거지인 유럽이나 그들의 식민지로 팔려갔습니다. 인구가 적었던 포르투갈이었기에 당시 그들의 본국은 물론 인도나 브라질 등의 식민지에선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렇게 끌려간 조선인들 중 하나가 그 희소성으로 인해 루벤스 앞에까지 선 것으로 알려진 이탈리아의 코리언이고, 식민지로 끌려간 조선인들 중 하나가 포르투갈의 마데이라에 정착한 코리언일 것입니다. 루벤스의 코리언은 1983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당시 금액으로 드로잉 사상 최고가인 6억 6천만원에 팔려 현재 그 그림은 미국 LA의 폴 게티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사실 안토니오 꼬레아란 조선인이 그 당시 이탈리아에 정착한 것은 맞지만 그가 루벤스 그림 속 인물과 정확히 일치하냐는 것엔 논란이 있습니다. 만약 그가 그라면 그는 그 옛날 살아선 노예로 헐값에 팔려 인도양을 건너 힘겹게 유럽에 왔겠지만 죽어서는 귀하신 몸이 되어 영국을 거쳐 대서양까지 돌아 북아메리카에 도착해 그 대륙을 횡단해 서쪽 끝 태평양이 보이는 곳까지 가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진짜 드라마틱한 조선 코리언의 운명이고 역사입니다. 이렇게 조선은 17세기 초 동양의 바다를 휘젓고 다니던 포르투갈과 직접적인 인연은 없었지만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아 일본을 통해 비역사적인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포르투갈이 아시아의 동쪽 세계에 관심을 갖게 하고, 결국 그곳까지 가게 만든 인물은 마르코폴로일 것입니다. 그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영토가 된 코르출라 섬 출신으로 13세기 말 중국 원나라를 방문해 쿠빌라이 세조의 가신이 되었습니다. 그때의 경험을 토대로 귀국해서 <동방견문록>을 저술한 것입니다. 아니, 그의 저술은 아니고 그가 귀국 후 제노아의 감옥에서 만난 감방 동기인 소설가 루스티켈로가 대필을 해줘서 그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코르출라 섬 마르코폴로의 생가 외벽에 걸려있는 그의 동방 여정 보드


책에서 마르코폴로는 동방으로 가는 실크로드 주변의 국가들과, 그가 세조 곁에 있을 당시 남송을 멸망시킨 원나라 중국과, 그 원나라의 일본 원정 시 신풍인 가미카제에 의해 정벌이 실패한 일본을 신비한 국가로 묘사하였습니다. 특히 그 당시 지팡구로 불렸던 일본에 대해선 가보지도 않고 집집마다 황금이 많은 국가로 묘사하였습니다. 이것을 비롯한 여러 이유로 <동방견문록>의 사실성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많지만 그래도 당시 중세를 마감하고 근세를 시작하는 유럽인들에게 이 책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각 나라로 퍼져나갔습니다. 한마디로 대박을 친 것입니다. 그런 이 책이 어느 날 세계에 대한 호기심 가득한 한 포르투기스의 손에 쥐어지게 되는데 그가 바로 대항해 시대를 연 엔리케 왕자였습니다.


1428년 엔리케 왕자는 외국에서 돌아온 둘째 형 페드루 왕자로부터 한 권의 책을 선물 받았습니다. 형은 일찍이 항해에 미쳐있는 동생을 응원하고자 그 책을 친절하게 포르투갈어로 번역해서 주었습니다. 사실 엔리케가 받은 그 책의 원제는 <동방견문록>이 아닌 <세계의 서술(The Description of the World)>입니다. 당시의 세계란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기 전이므로 그들이 살던 유럽과 문명이 부재했던 아프리카와 오리엔트의 아나톨리아 동쪽 인도와 중국 등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므로 마르코폴로의 입장에선 세계라고 표현한 것이 맞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이 책의 제목을 오늘날 기준으로 세계의 절반을 싹둑 잘라 <동방견문록>이라 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여전히 이 책을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포르투갈 대항해 시대를 연 엔리케 왕자, 1394~1460


드디어 만 하루 만에 포르투갈에 도착해 보니 과연 엔리케 왕자의 유명세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가는 도시 곳곳마다 그의 이름과 흔적이 있을 정도로 그의 자국 내 위상은 우리가 밖에서 보는 모습보다 훨씬 커 보였습니다. 태생적으로 그는 셋째 아들이라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으나 사나 오늘날까지도 영원한 왕자라 불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왕인 그의 아버지 주앙 1세와 그의 형인 두아르트 1세는 몰라도, 그리고 포르투갈 역사에 그들 말고도 어떤 왕들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엔리케 그만은 명확히 알고 있듯이 그는 왕보다 훨씬 유명한 왕자가 되었습니다. 아마 역사상 왕이 아닌 왕자 중에서 가장 출세한 인물을 뽑으라면 그의 1등은 따 놓은 당상일 것입니다. 하지만 한 나라에서 왕은 못 되었지만, 역사를 통 털어 어느 나라이든 그 나라보다도 훨씬 넓은 세계 바다의 왕을 뽑으라면 역시 그 분야도 그가 1등으로 선정될 확률이 높을 것입니다. 바다의 왕자 마린 보이가 아니라 바다의 왕 마린 보이로 엔리케가 선정될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리스본 도착 후 첫 방문지는 벨렘탑이었습니다. 그곳은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원정을 기념하기 위해 마누엘 1세가 1515년 세운 역사적인 유적지입니다. 하지만 제 눈엔 그 벨렘탑보다도 그 근처에 있는 조형물인 발견의 탑이 더 눈에 들어왔습니다. 엔리케 왕자 사후 500년을 기념하기 위해 1960년에 세운 기념탑인데 바다를 향해 출항을 하듯 그가 개발한 범선인 캐러벨을 본뜬 조형물에 포르투갈의 항해 역사를 쓴 인물들이 모두 한 줄로 승선하고 있었습니다. 포르투갈이 세계사에서 원탑으로 우뚝 섰던 대항해 시대의 역사엔 수많은 항해 영웅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는데 그 영광을 바스코 다 가마 한 명만이 벨렘탑에서 누리는 것처럼 보여 훗날 의미 있는 날을 택해 이 거대한 기념비가 세워진 것으로 보입니다. 벨렘탑과 발견의 탑은 도시 안으로 밀고 들어온 대서양과 바다에 다다른 타구스 강이 만나는 지점에 나란히 서있습니다. 수도 리스본에서 세계를 향해 뻗어 나가는 지점에 위치한 것입니다.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원정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벨렘탑, 1515
엔리케 왕자 사후 500년을 기념해 세워진 발견의 탑, 1960


그 발견의 탑 맨 앞에 선 자가 바로 엔리케 왕자입니다. 그의 양편 뒤로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발견한 바르톨로뮤 디아스(1488), 그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최초로 도착한 바스코 다 가마(1498), 최초로 세계를 일주한 마젤란(1522)과 이름 모를 포르투갈의 항해 역사를 쓴 각종 영웅들이 엔리케 왕자의 지휘를 받는 모습으로 그 뒤에 있습니다. 제 눈엔 그런 엔리케 왕자의 모습이 어느 한순간 마치 영화 <캐리비언 베이>에 나오는 잭 스패로우 선장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특이한 것은 그 열 맨 뒤에 프란체스코 하비에르 신부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포르투기스가 아닌 스페니쉬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는 이냐시오 로욜라와 함께 카톨릭 내 예수회를 창설하고 아시아 선교에 주력해 포르투갈인들이 개척한 동쪽 바닷길을 따라 1549년 가고시마에 도착해 일본에 기독교를 처음으로 전파한 사제입니다.


범선 모양의 발견의 탑 선봉에 선 항해의 왕 엔리케 왕자, 1960



* 다음 주말 <하>편에선 포르투갈 전국 각지에서 맹활약을 펼친 엔리케 왕자의 치적과 대항해 시대의 포르투갈이 근대 유럽 사회에 끼친 영향에 대해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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