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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May 20. 2023

꽃 지기 전에와 행복한 남자

제게 행복이란 키워드를 더 생각나게 하는 날입니다. 그 친구는 정확히 1년 전인 2022년 5월 20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1년 후 오늘인 그날보다 하루 앞당겨 행해진 어제 그의 1주기 추모 미사와 행사에 다녀왔습니다. 그는 제가 그의 선종 시 추모 글에서 ‘천사가 된 검사’라 칭한 권용석 행복공장 설립자이자 이사장입니다. 그에 관한 라이프 스토리는 제가 이곳에 두 편에 걸쳐 쓴 <행복을 만드는 공장> 1, 2에서 소개를 하였습니다. 그가 만든 행복공장은 성찰과 나눔으로 행복을 만드는 비영리 사단법인입니다.

    

1주일 전 1주기를 기념하는 그의 유고집 <꽃 지기 전에>가 나왔습니다. 권용석 변호사가 생전에 써놓은 시와 수필에 사후 그의 아내인 노지향 대표가 당시 그녀의 심경을 회고하며 그의 조각 글들에 답을 달아 펴낸 책입니다. 어쩌면 그 글들은 그 부부가 생전엔 나누지 못한 대화일 수도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글을 다 보았지만 남편은 아내의 글을 하나도 보지 못했으니까요. 이윽고 그가 암 발병으로 죽음으로 치달을 때 부부의 글은 슬픈 연가가 됩니다. 하지만 다 읽고 나면 그 숭고하고 아름다운 사랑에 마음이 정화되는 선물과도 같은 책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이야기한 행복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행복공장은 그가 그의 생 어느 작심일로부터 일생의 사업으로 모든 것을 쏟아부어 홍천에 건립한 수련원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부부가 함께 했습니다. 현재 그 공장은 그의 유지를 받들어 여전히 힘차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행복공장 설립자인 권용석, 노지향 부부의 글모음집 ‘꽃 지기 전에’

     

사람이 타인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는 위의 권용석 부부와 같이 직접 행동으로 베푸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그런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마음으로 베푸는 것입니다. 이때 마음으로 베푼다는 것은 마음만 먹거나, 기도만을 하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기부나 후원 등으로 그가 할 수 없는 행동을 그렇게나마 대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마음의 선행자가 행동의 선행자로까지 가지 못하는 이유는 시간이나 상황이 안 돼서이거나, 아니면 그런 여유가 있음에도 게으름이나 껄끄러움으로 몸이 움직여지지 않아서일 것입니다. 아마도 행복공장의 경우에도 저를 포함해서 후원금만을 내는 후원자들은 이런 두 번째 부류에 속할 것입니다. 그만큼 선한 일을 시간을 내어 몸을 쓰는 행동까지 직접 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까지 이르지 못하는 마음의 선행자들은 그런 행동의 선행자들에게 때론 존경심과 함께 미안한 마음을 갖곤 합니다.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생전에 행복을 입에 달고 살아온 권용석 변호사였지만 정작 그가 행복한 남자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른 나이에 가족을 비롯하여 진행하던 많은 일을 남기고 떠났으니 그 순간은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일반인라면 떨쳐버리기 힘든, 그에게 자동으로 주어진 세상의 권력과 재물을 뒤로하고 진정으로 그가 하고 싶은 일을 하다 갔으니 적어도 살아있는 동안은 행복한 남자였을 것입니다. 자라나는 청소년과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 그가 하던 일이었습니다.

     

아래의 글은 어떤 행복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영화 속 남자입니다. 이렇게 오늘 행복을 위해 살다 간 제 친구로 인해 행복이 크게 떠올라 일전에 써놓은 영화 <행복한 남자>의 감상문을 리터치해 이 글에 붙입니다.                   


         

국내 극장에서 개봉하지 않은 이 영화의 제목은 <행복한 남자>입니다. 하지만 막상 보고 나니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는 그 남자의 일생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처럼 인생은 그렇게 행복한 것도 불행한 것도 아니라는 결론성 일갈과도 거리가 있어 보였습니다. 영어 제목은 <A Fortunate Man>이니 '행운아' 정도로 번역했으면 그래도 수긍가는 줄거리라 했을 것입니다. 2018년 만들어진 덴마크 영화인데 덴마크어로 원제는 <Lykke-Per>, 일단 지금 두드리는 자판에 없는 이상한 알파벳이 안 나와 다행입니다. 동그라미에 사선 그어진 그런 북구의 글자 제목이었담 난감했을 테니 말입니다. 검색해보니 Lykke는 영어로는 Lucky입니다. Per, 페르는 이 영화의 주인공 남자의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행복한 남자이든 행운아는 주인공인 그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넷플릭스를 서치하다 아무 정보 없이 우연히 발견한 영화, 그런데 러닝 타임이 무려 167분이나 되어 끝까지 볼 자신이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 보다가 재미없으면 그만 보고, 재미있으면 다음 날 보자는 심경으로 플레이를 누른 영화였습니다. 넷플릭스의 영화 소개에 꽂혀서 리모컨 재핑을 멈춘 것이었습니다.  

   

칸느 영화제 황금종려상 2회 수장자인 빌레 아우구스트 감독의 작품, 노벨상 작가인 헨리크 폰토피단의 원작이란 대표 소개 평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사실 두 사람 다 이름은 처음 들어보지만 그들의 익숙하고 훌륭한 커리어가 무식한 저의 지적 흥미를 유발한 것입니다. 순간 과거 같은 경로로 사전 정보 없이 봐서 성공했던 켄 로치 감독의 칸느 황금종려상 작품인 아일랜드의 독립운동을 다룬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도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때 같은 성공을 기원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대단하게 저를 몰입시켜 늘어만 가고 있는 저의 초저녁 잠을 무력화시켜 결국 러닝타임 끝까지 러닝을 멈추지 않고 완주를 하게 하였습니다. 저의 바람대로 성공한 것이지요. 2021년 12월 끝자락에 생각지 않게 올해의 영화이자 인생 영화 리스트에 올려도 좋을 만한 명작을 발견한 것입니다. 영화의 주인공 페르만큼은 아니겠지만 그 밤은 저도 Lucky-Guy가 되었습니다. 그 여운으로 이렇게 감상문까지 쓰고 있으니 말입니다.  


‘행복한 남자’로 번역되어 2018년 개봉한 넷플릭스의 덴마크 영화


<행복한 남자>는 주인공 페르의 청소년기부터 중년기까지를 다룬 말 그대로 인생 영화입니다. 그런데 이 안에 참 많은 것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만나고 겪으며 고민하고 갈등을 겪는 테마(theme)와 테제(thesis)들이 페르의 삶을 통해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페르는 그런 많은 것들 앞에서 그의 이익을 위한 타협이나 복종을 택하지 않고 아집이라 불러도 전혀 심하지 않을 그만의 신념대로 그의 생을 살아갑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그런 그를 이해하기보다는 그 이전에 보인 전력으로 이미 파악이 된 그였기에 새로운 사건과 마주칠 때마다 조마조마하는 마음으로 아슬아슬한 그의 인생을 따라가게 됩니다. "페르, 제발 이번엔 그러지 마라" 하는 주문을 외며 말입니다.   

  

주인공 페르는 우리에겐 매우 이국적인 나라인 덴마크의 유틀란트 반도의 한 시골 목사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성직자인 아버지와의 갈등, 공무원인 형과의 갈등을 거쳐 끝내는 안 그럴 것 같던 자애로운 엄마와도 그는 조화롭지 못한 생을 살게 됩니다. 기독교 집안에서 적 그리스도 같은 존재로 생각하고 행동했기에 이런 갈등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이렇게 가족과 종교에 관한 문제가 나오는데 그것은 평생 그를 따라다니게 됩니다.     

페르는 천재 공학도입니다. 19세기 말 정도로 보이는 시대가 영화의 배경인데 당시 덴마크는 거친 바다와 바람 등 자연환경과 싸우는 그렇게 이국적으로 보이지 않는 나라였습니다. 그는 이런 국가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장애 요소인 물과 바람을 수력과 풍력 에너지로 바꾸는, 당시로는 획기적인 아이디어와 설계 능력을 가진 청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청운의 꿈을 품고 그에겐 있을 곳이 못 되는 집을 떠나 큰 물인 수도 코펜하겐으로 갑니다. 거기에서 그는 전문 공학교를 가난 속에 매우 힘들게 다니며 그의 꿈을 펼쳐 나가게 되는데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그의 성격으로 인해 그것을 사업화하는 데에 매우 애를 먹게 됩니다.         


가족과의 갈등으로 고향을 떠나 코펜하겐으로 향하는 페르

     

그리고 동시에 여러 여인과의 연애가 등장합니다. 그는 그가 목표로 하는 여인에겐 집요할 정도로 집착하여 결국은 그것을 이루어 내곤 합니다. 복잡다단한 연애로 동거, 이별, 약혼, 파혼, 결혼, 별거 등을 거치는 세 명의 여인들이 영화 속에서 등장합니다. 보기에 따라 네 명이라 해도 될 것입니다. 한마디로 요즘 말로 치면 그는 나쁜 남자이고 바람둥이입니다. 제가 사감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은 영화를 보면 남녀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공감할 것입니다. 긴 영화 시간 동안 관객은 충실하게 그의 연애사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세한 연애사를 떠나 전반적인 영화의 흐름은 과감한 생략과 스킵으로 긴 상영 시간에 비해 늘어짐과 지루함 없이 그의 중년을 향해 달려갑니다. 이렇게 그가 만난 여인 중 한 여인으로 인해 그의 아이디어가 드디어 사업적으로 크게 결실을 맺을 뻔하기도 하지만 개버릇 남 못 준다고 그의 별난 성격으로 인해 다 잡았던 성공을 망쳐 버리기도 합니다. 화면 밖에서 "이번엔 그러지 마라"는 저의 주문이 또 먹히지 않는 안타까운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연인의 심경은 복장이 터질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그가 만난 여인들 중 그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인이 있나 할 정도로 그는 출세와 종교적인 문제를 오가며 그의 연애를 이어갑니다.

        

사실 이 영화엔 주인공이 한 명 더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연인 중 한 명으로, 흡사 클림트의 명화 <유디트>의 모델인 유디트를 쏙 빼어 닮은 부유한 유대인 명문가의 여식 야코베입니다. 그러고 보니 유디트, 그녀도 유대인이었네요. 아름다운 그녀의 관점에서 보면 이 영화는 여성 영화라 해도 될 정도로 그녀 시점에서도 많은 스토리가 전개됩니다. 그녀의 가족과 연애, 결혼에 대한 사적인 견해를 비롯하여 여성이 나설 수 없던 19세기의 벽을 극복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주체로서 그것을 수행하며 영화를 커다란 사회적 담론으로까지 이끄는 역할을 하니까요. 하지만 정작 남자 주인공 페르는 그녀와 연루되며 양가의 기독교와 유대교,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과 같은 존재로 분리되며 그의 어긋난 정체성은 더욱 악화됩니다.

 

영화의 남녀 주인공인 페르와 야코베의 투샷

     

결국 코펜하겐의 야코베에게조차 행복을 찾지 못한 페르는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고향인 시골 유틀란트로 돌아옵니다. 그곳에 목사의 딸인 다른 한 여자가 있었고 그녀와 결혼해서 소박하게 가정을 꾸린 그는 비로소 평화와 안정을 찾은 것 같지만 작가는 여기에서도 그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결론만큼은 같은 남자로서 다소 통속적으로라도 해피엔딩을 기대하고 기원했는데 그것이 그렇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것이 인생이겠지요. 거센 풍파를 거치며 행복하지 못하게 살아왔다고 해서 그 사람의 마지막이 무조건 행복하란 법은 없으니까요. 그래도 작가는 박제가 된 천재 페르에게 걸맞은 정리하는 법을 제공하여 하나 남은 그의 숙제를 마치게 하고 그만의 안식을 찾게 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끝나지만 긴 여운이 이어집니다.

     

이렇듯 페르는 2시간 47분 내내 화면 속에서 마치 전쟁터에서 전사가 싸우듯 치열하게 부딪치고 깨지고 돌파하며 좌충우돌 살아갑니다. 그를 품을 수밖에 없는 가족과, 덴마크의 거친 자연환경과, 그와 이질적인 종교와, 그를 사랑하는 여인들과, 그리고 그가 이루고자 했던 사업적 성공과 맞서며 말입니다. 하지만 그가 속한 사회는 그런 그의 능력은 인정하면서도 그를 부적격한 부적응자라고 밖에 볼 수 없었습니다.

  

고향인 유틀란트로 돌아가서 시골 교회 목사의 딸과 결혼한 페르


주인공 페르에게 가학적이다 싶을 정도의 언유주얼한 삶을 부여한 원작자 헨리크 폰토피단을 검색해보니 덴마크인인 그는 191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특이하게도 같은 덴마크인인 칼 기엘레루프라는 동갑내기 작가와 공동으로 수상을 하였네요. 작가인 헨리크 폰토피단도 작품 속 주인공 페르처럼 목사의 아들이었으며 전공도 같은 공학도였습니다. 하지만 페르와는 달리 그는 학업 후 공학 엔지니어로 가지 않고 교직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래도 그의 삶은 그의 소설 속 주인공인 페르란 남자에 투영되어 있을 것입니다. 작가란 그가 창조한 피조물에 이입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끝으로 저는 <행복한 남자>로 번역된 제목을 동의하기 힘들다고 앞에서 밝혔지만 한 가지 면에서 만큼은 페르는 행복한 남자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의 인생을 그가 선택한 대로, 하고 싶은 대로, 그리고 멋대로 살았습니다.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남자의 행복(Glück)이라고 정의한 “Ich will (I will)” 인생을 산 것입니다. 그의 입장에선 행복한 'My Way'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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