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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May 13. 2023

내 눈에 일본인

올해 3월 사망한 어떤 일본 음악가의 그 이전 생전의 한 모습을 보면서 전 꽤나 놀랐습니다. 그 일은 우리나라의 한 음악가와 상관이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제가 놀란 것은 그 일본 음악가가 보여준 반응이 놀랍기도 했지만 그 모습이 제가 그간 직간접적으로 접해온 일본인들의 모습과 무언가 유사한 일관성이 있어서도 그랬습니다. 여기서 일관성이라 함은 의외성에서 시작됩니다. 적어도 제겐 긍정적이고 신선하게 다가왔던 그들의 의외성입니다. 그런데 그런 류의 모습을 그 유명한 음악가가 또 반복하니까 또 놀란 것이었습니다. 물론 역사의 드러난 진실을 가리고 국가와 본인과 그가 속한 집단의 이익만을 위해 후안무치한 모습을 보여주는 일본 정치인들은 이들 그룹에 속해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완전 제외입니다. 또 제가 접하지 못한 나쁜 일본인들도 분명히 꽤나 많을 것입니다. 어디든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니까요. 우리 역사 속엔 그런 나쁜 일본인들이 더 많이 있었지요.


하지만 개인이든 단체든 객관적인 정체성으로 규정되는 그룹은 평균선을 중심으로 볼륨존에 걸쳐있는 다수의 일반인들인데 적어도 제가 보아온 일반 일본인들은 우리와는 다른 면이 있어 보입니다. 꼭 우리가 아니더라도

지구촌의 세계 인간들과 비교할 때도 그들은 달라 보입니다. 그래서 때론 전 그런 일본인이 진짜 그렇게 생각해서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일까라고 의심까지 하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 눈에 보인 그들은 인간의 보편적인 본능과 감정의 선과는 거리감이 있는 모습으로 말하고 행동하기에 그랬습니다. 특히 공공 앞에서는 개인의 진짜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일본인들, 그것을 냉철하고 이성적인 모습이라 평한다면 때론 그런 그들의 모습은 섬뜩하게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일찍이 근대화가 된 나라에서 일찍이 선진화된 언행이 훈련되고 베어서 그런 것일까요? 그렇다면 더 먼저 선진국이 된 구미의 국민들은 왜 그들처럼 하지 않을까요?그것에 더해 일본인만의 무엇이 작용하여 그럴 것입니다.


아래는 위의 내용과 연관되어 제가 그간 살아오며 접한 몇 가지 일본인의 모습입니다. 제겐 인상적이라 이렇게 기억으로 남아 기술하고 있을 것입니다. 언젠간 한 번은 써야지 하며 머릿속에 보관해 오던 내용이지만 대상이 일본인이기에 다소 조심스럽긴 합니다.



1992년, 오사카의 택시 기사


1992년 4월 저는 광고대행사 오리콤에서 일정 연차를 채운 입사 동기들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큰 일본의 덴츠라는 광고대행사로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일전에 제가 쓴 <일본 근대화의 시작과 끝, 나가사키>란 글에서 그 사실을 밝힌 적이 있습니다. 우리 일행은 덴츠의 본사가 위치한 도쿄에서 6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오사카로 이동해 남은 3일 일정을 소화했습니다. 연수의 마지막인 출국일 전날 가까운 동기 3명과 함께 오사카 다운타운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좀 떨어진 호텔로 택시를 잡아타고 가는데 기사가 길을 잘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일행 중엔 일본어가 되는 친구가 하나도 없어서 주소가 찍힌 호텔 명함을 주고 탄 택시였습니다. 당연히 네비와 모바일폰이 없던 시절입니다. 택시 기사는 당황하고 미안해하며 쏘리를 연발했습니다. 그리고 짧은 영어로 "Time OK?"를 외치며 우리의 심기를 살피는 듯했습니다. 일과 후이기에 당연히 우린 문제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전전긍긍하며 헤매던 택시 기사는 어느 파출소 앞에 차를 세우더니 들어가서 경찰의 길 안내를 받았는지 편안한 모습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더니 이젠 됐으니 걱정 말라며 호텔로 무사히 우리를 안내하였습니다. 반전은 그다음에 일어났습니다. 당시 미터기에 1,700엔 정도의 요금이 나왔는데 한사코 비용을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잘못해서 늦었으니 안 받겠다는 것이었습니다. "Meeting time, Sorry"를 외치는 것으로 보아 자기가 우리의 중요한 회의 시간을 놓치게 했다는 것입니다. 우린 문제없다며 감사를 연발해도 그는 진심 어린 표정과 말로 손사래를 치며 요금을 거부하였습니다. 결국 우린 안 받겠다는 그의 손을 피해 택시 앞자리에 그 돈을 던지듯 밀어 놓고 호텔로 들어갔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실랑이였습니다.


당시 매일경제신문에 일본의 경제학자인 오마에 겐이치가 핵심 기술이 없는 한국은 일본의 백년 하청국이 될 것이다라고 기고했던 글이 떠오릅니다. 우리가 일본을 가면 당시 우리 연수 일행들도 그러했듯이 도쿄의 아키히바라 전자 상가에 들러 일제 가전제품과 카메라 등으로 여행 가방을 채워오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양상은 오마에 겐이치의 예언과는 다르게 흘러갔습니다. 삼성전자 혼자서 소니, 파나소닉, 도시바, 산요, 샤프, 아카이 등 그 많고 쟁쟁했던 일본의 전자회사들을 모두 물리친 것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한국과 일본의 국력차가 심했던 시절에 모자까지 쓴 근사한 정복을 입은 일본의 택시 기사가 파릇한 한국인들에게 진심을 다해 서비스를 펼친 것입니다.


아마도 그 당시 우리나라 택시 기사라면 요금 거부는 고사하고 손님이 원하는 목적지를 못 찾을 경우 오히려 상기된 얼굴로 더 광폭하게 차를 몰았을지도 모릅니다. 제겐 그런 경험이 몇 번 있었습니다. 또한 저는 총각 시절 본가인 인천에서 회사를 다녔었는데 야근이 많았던 그 시절 총알택시라 불리던 심야 택시를 타면 그것은 말 그대로 서울에서 인천까지 도로도 좋지 않은 국도를 총알처럼 달려 뒷자리에 않은 손님들은 전후좌우로 짐짝처럼 흔들려 등골이 서늘해지곤 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우리나라 TV의 저녁 9시 뉴스엔 외국인들에 대한 택시 바가지 요금이 사회 문제로 빈번하게 나오곤 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우리나라도 택시 서비스가 많이 개선되어 그런 후진 일들은 옛이야기가 되었지만 30년 전 일본 오사카에서 경험했던 그 택시의 서비스는 지금도 잊히지 않고 있습니다. 단 한 번 본 그 기사의 얼굴 모습과 표정도..    



1995년, 고베 지진의 이재민


1995년 1월에 일어난 일본 효고현 고베 지역의 지진은 진도 7로 6,400명의 사망자를 낸 대재앙이었습니다. 지진이 흔하게 발생하는 일본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강력한 대지진이었던 것입니다. 지진은 화재로 이어져 고베의 피해는 더 커져만 갔습니다. 당시 많은 사망자들 중엔 우리 교포와 유학생들도 100여명 이상 포함되어 있어 우리나라에서도 관심을 갖고 방송사 뉴스 앵커를 그곳에 파견해 고베의 상황을 현장에서 직접 보도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비규환의 상황에서도 일반 일본인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침착하게 보여 그것이 뉴스에서 주된 뉴스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재난을 취재하는 우리 보도진이 보기에 의외의 모습으로 보여서 그랬을 것입니다.


일단 그런 상황임에도 편의점이나 마트에서의 사재기 모습이나 범죄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거의 도시가 무너지고 교통이 끊겼음에도 평상시와 똑같이 출근하는 고베 시민의 모습이 뉴스에서 보였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제 기억에 남아있는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학교 운동장에 줄을 서있는 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끝에서 끝까지 선 아주 긴 줄이었습니다. 이재민들이 식량을 비롯한 구호품을 받기 위해 그렇게 긴 줄을 선 것인데 거기엔 그 상황을 통제하는 인력이나, 순서를 안내하는 바닥 선이나 안내봉 등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단 한 명의 이탈자 없이 스스로 그렇게 길게 일자로 줄을 맞춰 서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한겨울인 1월에 일어난 재해라 추위와 배고픔이 엄습하는 상황이었을 텐데도 그들은 그렇게 질서 정연하게 꼿꼿이 밖에서 서서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통상적인 다른 나라의 재난 방송에서 보던 구호품 배급의 모습과는 천양지차로 다른 일본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의 그런 모습은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에 전파를 타며 해외에서도 화제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 모습이 주는 이미지는 질서 정연한 일본인보다 무서운 일본인이라는 인상을 더 강하게 심어주었을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느꼈듯이 말입니다.



2015년, IS에 아들이 참수된 부모


2015년 1월에 아들이 이슬람국가(IS, Islam State)의 무장 세력에 의해 참수된 일본인 아버지의 인터뷰 기사가 언론에 소개되었습니다. 그의 아들은 일본 정부에게 2억불을 내주면 살려주겠다는 IS에 의해 참수를 당한 것입니다. 액면적으로는 일본이 IS가 요구하는 시간 내에 2억불을 주지 않아서 그 일본 청년은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안타까운 비보를 전해 들은 아버지의 일성이 저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정말 안타깝다. 아들이 일본 정부와 국민에게 폐를 끼쳤다. 고토의 무사귀환을 바란다"라고 그의 심경을 표하였습니다. 기사를 읽다가 제 눈이 멈춰 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반응을.." 적어도 제 상식과 감정으로는 무어라 설명하기 힘들었습니다. 정부가 나섰으면 살 수도 있었던 자기 아들이 죽었는데 그는 이렇게 대답을 한 것입니다.


또 놀란 것은 그 와중에도 보듯이 고토를 염려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무사귀환을 바라는 고토는 그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들 유카와는 시리아에서 이미 참변을 당했고, 고토는 그 이전 유카와가 억류되었다는 뉴스를 접하고 그의 행방을 추적하러 사지에 뛰어든 기자로 그때까지 살아있던 다른 일본인 인질이었습니다. 하지만 유카와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고토도 일본 정부가 손을 쓰지 못해 며칠 후인 2월 초 참수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고토의 어머니 인터뷰가 또 저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녀 역시 국가나 정부에겐 어떤 원망도 하지 않고 "같은 일본인을 돕기 위해 시리아에 간 아들의 선량함과 용기를 알아주기 바란다"라고 밝혔습니다.  


그 이전인 2004년 우리나라도 이와 유사한 일을 겪어 나라가 온통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 국민을 살해한 이슬람 단체는 알카에다였고 장소는 이라크였습니다. 모 무역회사 직원이 그곳에 들어가 미군에게 식자재 납품 일을 했었는데 알카에다에 의해 그가 납치된 것이었습니다. 당시는 위험 지역 여행금지제도가 발령 전이기도 해서 기업이 그런 위험한 곳에도 돈을 벌러 나간 것입니다. 그때 알카에다는 인질 석방 조건으로 우리 정부에게 이라크 철군을 요청했었는데 기일 내에 협상이 진척되지 않아 그는 위의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살해를 당하였습니다. 국가 전체의 이익과 국민 개인의 목숨 사이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때 그의 부모 반응은 위의 일본인 부모와는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국가와 정부를 원망했고 매우 힘든 조건을 요구하였습니다. 빈소에 노무현 대통령이 보낸 조화도 빈소 밖으로 밀어낸 기억이 납니다. 그만큼 아들을 잃은 분노가 크기도 하고 국가가 무기력해 보여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리적으로 근접한 두 나라에서 비슷한 사건을 대하는 일반 국민의 태도가, 그리고 자식을 잃은 부모의 반응이 판이하게 다름은 놀라울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인이 놀랍다는 것입니다. 사고를 대하는 우리 국민의 감정을 앞세운 행동과 태도의 표출은 인지상정이기도 하고 다반사로 보아왔기에 그렇게 놀랍지 않은데, 그렇게 하지 않는 일본인의 행동과 태도는 역시 또 놀랍다는 것입니다.



2022년, 표절을 대하는 뮤지션


2022년 7월 우리나라 음악계를 뒤흔든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뮤지션이자 기획사 대표를 맡고 있는 영향력 있는 대중 음악계의 유명 인사가 세계적으로 그보다 더 유명한 일본 뮤지션의 음악을 표절했다는 논란이 터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일본인은 위의 인트로에서 지난 3월 사망했다고 한 그 뮤지션입니다. 사실 그 사건은 표절 논란도 놀랍지만 계속된 그 논란에 침묵으로 일관했던 일본의 그 뮤지션이 밝힌 공식적인 반응이 더 놀라웠습니다. 그 사태에 대해 종지부를 찍은 침묵을 깬 그의 일성, 그것은 걸작이라고 할 만큼 아주 인상적이고 의외성 넘치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왠지 아무 상관도 없는 저를 무색하게도 만든 대답이었습니다. 아래는 그때 그가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입니다.


"모든 창작물은 기존의 예술에 영향을 받는다. 거기에 자신의 독창성을 5~10% 정도 가미한다면 훌륭하고 감사할 일이다. 저도 제가 사랑하고 존경하며 많은 것을 배운 바흐나 드뷔시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은 여러 곡을 가지고 있다" (한겨레신문 2022. 7. 11)


피아노 앞에서 그의 곡을 연주하며 지휘까지 하는 사카모토 류이치,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2014


이미 여러 뉴스에서 밝혀진 대로 그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할리우드 영화 음악의 거장으로도 활동한 사카모토 류이치입니다. 그런데 그의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표절을 했다는 건가요, 안 했다는 건가요? 과연 또 제가 지속적으로 당해오고(?) 있는 일본인스러운 태도와 어법을 그는 대답에서 보여주었습니다. 사실 저는 당시 이 기사를 보고 약간 짜증이 나기까지 했습니다. 창작을 하는 예술가와 작가는 경계가 애매하기도 한 유무형의 크리에이티비티가 생명이라 그것에 매진하고 때론 정신과 육체를 모두 하얗게 불사르기까지 하기에, 그들과 그들이 만든 작품을 보호해 주기 위해 사회적인 합의를 통해 만들어진 지적재산권(지식재산권)을 인정해 주는 것인데, 사카모토 류이치는 마치 공자님 말씀하듯이 남의 일처럼 안락하고 편안한 대답으로 그 사태를 종결시켰기 때문이었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분노할 수도 있고, 돈으로 보상받을 수 있는 법적 공방으로 시비를 가리자고 할 수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과거 국내 모 대기업의 캘린더에 들어간 사진에 대해 영국인 작가가 자신의 사진을 표절했다고 주장하며 국제적인 송사로 확대시킨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사카모토 류이치가 인터뷰에서 그가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바흐나 드뷔시는 표절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음악가들입니다. 사후 70년이 지나면 지적재산권은 소멸이 되니까요. 제가 그의 대응에 무색하고 짜증까지 났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보다는 예술과 다른 예술가를 대하는 그의 애티튜드에 신선한 충격을 받은 것이 더 먼저였습니다. 그가 일본인이라 그렇게 대응한 것은 절대로 아닐 것입니다. 아니면 시한부 인생으로 죽음을 앞둔 상황이라 세상의 것에 연연하지 않고파서 그런 멋스러운 모습을 보인 것일까요? 그는 그렇게 입장을 정리하고 8개월 후인 올해 3월 사망하였습니다.



쓰레기와 일본인


최근 쓰레기와 관련한 일본인 이야기가 해외 토픽으로 종종 등장하곤 했습니다. 가장 최근엔 올해 초 벌어진 야구의 월드컵 격인 2023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출중한 실력으로 일본팀을 우승으로 이끌고 대회 MVP로 뽑힌 오타니 쇼헤이와 쓰레기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더그아웃을 비롯한 야구 경기장 내에 떨어져 있는 쓰레기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무조건 줍고 간다고 합니다. 실제 그런 장면은 그가 현재 속한 프로야구 구단인 LA에인절스의 경기 TV 화면에 종종 잡히곤 합니다. 심지어 그는 타자로 나서서 포볼을 얻어 1루로 뛰어가는 도중에도 고개 숙여 쓰레기를 줍기도 하였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훈련이 되어서 자연스레 몸에 밴 것인데 그는 그 행위에 대해 태연하게 남의 운을 줍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공익이 아닌 그 자신을 위한 일을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남이 버린 쓰레기에 운이 있을 수 있을까요? 금이나 돈을 버렸으면 모를까요. 미신도 아니고.. 과연 대선수다운 행동이고 대답입니다.


메이저리그에서 경기와 연습 도중 쓰레기를 줍는 오타니 쇼헤이의 모습들


또한 작년인 2022년 카타르 월드컵 때에도 일본 축구 국가대표 선수들과 쓰레기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축구 경기를 마치고 떠난 경기장의 라커룸이 세계적인 화제가 된 것입니다. 너무 깨끗해서였습니다. 90분 이상을 땀 흘리며 경기를 뛰고 들어와서도 그들은 떠나기 전 그곳을 깨끗이 청소하고 들어올 때와 똑같이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떠났던 것입니다. 아, 그때 그들이 환경미화 하듯이 하나 남기고 떠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예쁜 종이학이었습니다. 역시 또 행운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흔히 일본인은 집 담장 안에 있는 쓰레기를 담장 밖으로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담장 밖에 있는 쓰레기를 집 안으로 가져온다고 합니다. 제게도 일본에서 그와 같은 쓰레기 경험이 있었습니다. 2018년 메이지유신 150주년이 되던 해에 제가 관여하고 있는 인문학교실에서 일본 메이지 유신의 태동지인 야마구치현의 하기 마을로 답사를 갔었는데 거기에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이런저런 답사를 하는 와중에 그 작은 도시의 운동장에서 축제가 열려서 구경을 하며 테이크아웃 커피 한 잔을 샀는데 그것을 마신 후 도무지 그 빈 종이컵을 버릴 쓰레기통을 찾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운동장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그렇게 부산스러운 축제의 현장임에도 그곳엔 쓰레기통도 없었고, 그것을 버릴만한 장소도 없었습니다. 어딜 봐도 너무 깨끗해서 차마 버릴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화장실엔 있겠지 하며 화장실까지 그 빈 컵을 들고 갔는데 그곳에도 역시 휴지는 있어도 휴지통은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그것을 계속해서 들고 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오래된 마을 어디에도 쓰레기통과 버릴만한 지저분한 장소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호텔까지 들고 들어와서야 비로소 저는 그 빈 종이컵을 제 손에서 떠나보낼 수 있었습니다. 집 담장 밖 쓰레기를 집 안으로 가져온 것입니다. 제 평생 쓰레기와 가장 친하게 보낸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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