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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May 06. 2023

조용필:송호근=김창완:X

제목으로 올라온 이 기괴한 방정식을 풀 수 있는 사람은 출제자인 저밖에 없을 것입니다. 참고적으로 저는 수학을 잘 못합니다. 그러니 이 식은 성립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아래에 답을 보면 더 그럴 것입니다. 제가 최근 겪었던 어떤 일에 위와 같은 등호가 성립된다고 생각되어 이 문제를 낸 것입니다. 그로부터 2주에 걸쳐 이 수식을 완성했습니다. 과연 정답 X는 무엇일까요? 사람이 들어가야겠지요.


제가 관여하는 인문학교실에 2주 전 4월의 초청 강사로 사회학의 대가인 송호근 한림대 석좌교수를 모셨습니다. 그는 서울대와 포스텍을 거쳐 첫 교편을 잡았던 춘천의 그 학교로 돌아가 지금도 후학을 양성 중에 있습니다. 강의 중 그는 재미있는 과거 경험담을 들려주었는데 그것은 가왕 조용필님과 관련이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소설 3권을 포함하여 40여권의 책을 낸 송교수는 그의 화려한 이력에서 어느 날 매우 독특한 이력을 하나 추가했는데 그것은 조용필님의 2013년 19집 앨범인 <Hello>에 수록된 <어느 날 귀로에서>의 작사자로 이름을 올린 것입니다. 그 노래는 역시 같은 그해 초 송교수가 펴낸 <그들은 소리내 울지 않는다>라는 책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그 책의 시발점은 한 대리기사였습니다. 송교수는 어느 날 밤 술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호출한 대리기사의 이야기를 뒷좌석에서 듣다가 아예 차를 세우고 나와 그와 마주 보고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의 끝을 보았습니다. 그의 일당을 보전해줌은 물론이었을 것입니다. 그 대리기사는 중견 기업체에서 부장으로 50대에 퇴직하고 나와 재취업이 불가해 받은 퇴직금으로 자영업을 하다 망해서 그 일을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명색이 사회학자인 송교수는 그것을 지나치지 않고 경청해 들은 것이고 소리내 울지 않는 그를 비롯한 50대 한국남자들이 겪는 이러한 몰락과, 그들을 그렇게 모는 사회 부조리를 책으로 펴낸 것이었습니다.


우리 사회 교양인의 몰락을 강연한 송호근 교수, 2023. 4


송교수는 책을 출간한 2013년 당시 그 대리기사의 삶은 이 땅의 베이비부머인 1955년에서 1963년생까지 50대 전체의 이야기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인인 조용필님과의 만남에서 그 이야기를 전했고, 가왕은 가슴 아픈 그 50대의 이야기를 곡으로 만들었으며, 가사를 스토리의 원작자인 송교수에게 의뢰를 한 것입니다. 그렇게 야밤의 한 대리기사의 이야기는 <그들은 소리내 울지 않는다>라는 송호근의 책이 되고, 이어서 <어느 날 귀로에서>라는 조용필의 노래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정확히 10년이 지나 60대로 접어든 그 당시 50대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글쎄요.. 아마도 더 나빠지면 나빠졌지 나아지진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국가의 책임을 떠나 베이비부머들의 숙명이고, 나아가 노년으로 가는 자들의 숙명일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이미 알려진 이야기이지 2주 전 강의에서 송호근 교수가 들려준 재미있다고 한 경험담은 아닙니다. 그 이야기는 그가 <어느 날 귀로에서>의 작사자로 데뷔하게 된 조용필님과의 첫 만남에 대한 것으로 그는 가벼운 그 이야기로 강의 인트로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날 그가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한 강의의 제목은 그의 전공이라 할 <한국 지성의 몰락 : 대학, 언론, 종교>였습니다. 우리 사회를 끌고 가는 교양인 그룹으로 대학, 언론, 종교 종사자를 꼽은 것입니다. 몰락이라고 함은 그들 기관과 종사자들이 이런저런 이유들로 제 기능을 못한다는 것이겠지요. 그의 강의에 대해서도 할 말은 많지만 오늘 이 글은 그것과 관련 없는 글이니 그것은 다음에 기회가 되면 쓰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이 글의 제목인 수학 방정식도 그의 강의 주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송교수는 1980년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 노래를 듣자마자 전율을 느껴 그때부터 그의 열렬한 팬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신문 칼럼에 조용필님에 대한 찬사의 글을 썼는데 그다음 날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는 송교수에게 그의 이름을 밝히자마자 다짜고짜 "만납시다"라고 해 둘 간의 첫 만남이 성사되었습니다. 즉, 각각의 필드에선 최고 위치에 올라있던 두 사람이지만 6살 나이차인 그들은 전혀 모르는 사이였고 그들 사이엔 만남을 주선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유명 가수와 그의 팬인 한 칼럼니스트가 글을 통해 직거래로 연결된 것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소설이나 가요같이 만났지만 막상 중년의 남자 둘이 만나니 서로 어색해 침묵 속에 밥숟가락보다는 술잔을 더 많이 들다가 2차로 노래방에 가서야 말문이 터져 위와 같은 관계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다소 의외적인 유명인 간의 만남입니다.


이제 어설픈 이 글 제목인 수학 방정식을 풀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좌변의 조용필님과 송호근 교수는 그렇다 치고 우변의 김창완님은 왜 난데없이 그 자리에 소환되었을까요? 그리고 그 옆 송교수와 같은 동급의 X는 누구일까요? 아마도 제 글을 읽어온 분들이라면 짐작할 것입니다. 사실 전 송교수가 강의에서 그가 조용필님과의 만남을 이야기할 때 속으론 놀랐지만 겉으론 빙긋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송교수와 같은 프로세스로 김창완님과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세 번에 걸쳐 글을 쓴 <불후의 산울림> 1, 2, 3에서 소개했던 그와의 만남 사연입니다.


다시 간략히 소개하자면 저도 송호근 교수와 마찬가지로 김창완님에 대한 칼럼을 인터넷 언론사인 <뉴스버스>에도 게재하였습니다. 2022년 여름 코로나에서 처음으로 자유로워졌던 시기에 강릉 바닷가 야외 록 페스티벌에 출연했던 김창완밴드의 공연을 보고 쓴 글이었습니다. 그곳에 가서 직접 관람을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최한 KBS TV의 <불후의 명곡>의 녹화방송을 보고 쓴 글이었습니다. 그날 TV에서 오래간만에 본 김창완님의 산울림의 곡들이 저의 가슴을 때려 은혜를 받고 펜까지 들게 한 것이었습니다. 글을 쓴 작가와 게재한 매체의 인지도와 유명세의 차이는 있지만 여기까지의 과정은 저도 송호근 교수와 동일합니다. (고백하건대 작가로서 송교수에게 제가 밀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지만 아티스트의 역량에선 서로 합쳐 등호를 이룰 만큼 김창완님의 역량이 더 우세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ㅎ)


그런데 산울림과 김창완님에 대한 글을 쓰다가 공연을 직접 가서 보고싶은 충동까지 일어나 그의 공연을 검색해봤더니 그즈음 8월 안산 예술의전당에서 공연이 열리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완전 만원이라 기쁨도 잠시, 그때부터 그 예매 사이트를 뻔질나게 들락거린 결과 다행히 누군가 취소한 티켓을 겨우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취케팅에 성공한 그 기쁨을 제가 쓴 칼럼의 말미에 ps로 달았습니다.


드디어 문제의 아기다리고기다리던 공연이 열린 날, 연주 중간 멘트 때에 김창완님이 무대 위에서 관객석을 향해 저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제가 왔냐 하며 제 이름을 불렀습니다. 허걱!(1)입니다. 제가 쓴 <불후의 산울림-1> 글을 그 사이 읽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자석에 끌리듯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그는 관객들에게 저를 소개해주었습니다. 산울림과 김창완에 대한 글을 좋게 써줬다고 말입니다. 이윽고 공연이 끝나고 그냥 갈 수 없어 무대 뒤로 감사 인사를 하러 갔는데 김창완님은 저를 보자마자 그렇잖아도 저를 찾아오라고 스탭을 보냈다고 하며 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는데 대화 말미에 그는 저를 그의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또 허걱!(2)입니다. 광고일을 오래 해온 저였기에 그간 연예인을 보기는 많이 봐왔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김창완님은 연예인이라 하기에는 급이 다른 아티스트라 이건 얘기가 다른 일이었습니다.


김창완님과 처음으로 조우한 김창완밴드의 안산 공연, 2022. 8


저는 김창완님을 과거 르네상스의 천재들과는 다른, 그리고 오늘날 특정 전문 분야의 천재들과는 다른 비정형적 천재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불후의 산울림> 시리즈 글에서 충분히 공감이 되게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런 대 아티스트가 저를 알아봐주고 초대까지 해주었으니 연신 허걱하지 않을 수 없던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천하의 송호근 교수도 조용필님의 전화를 받고 초대를 받았을 때 비슷한 기분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유선상으로 전화를 받았고 저는 육성으로 불림을 당했습니다. "일어나라" 이렇게 말입니다.


그래서 "조용필:송호근=김창완:X"의 정답 X는 바로 저입니다.. 라고 저는 생각하며 이 문제를 출제하였습니다. 참으로 썰렁한 문제이고 답이지요. 그런 대가들 틈에 무명의 저를 비집어 끼워 넣은 것도 말입니다. 사실 좌변과 우변 간의 공통점은 또 하나 있습니다. 위의 두 아티스트가 사는 동네가 같다는 것입니다. 송교수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둘 다 그분들이 사는 서래마을로 호출을 당하였습니다. 모든 유명한 대중음악가가 누군가 자기에 대한 글을 썼다고 해서 그 글을 보고 일면식도 없는 그를 찾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서래마을엔 그런 기운이 있나 봅니다.     


이후 김창완님과 저와의 인연은 계속되어 올해 2월 그는 제가 관여하는 인문학교실에 강사로까지 와주었습니다. 4월 송호근 교수가 강의한 같은 장소입니다. 막내 동생뻘인 제가 무모하게 조르다시피 요청한 강의였는데 그것을 흔쾌히 들어준 것입니다. 또또 허걱!(3)입니다. 매일 아침 라디오 방송에, 전국 각지를 도는 공연에, 방송 출연에, 연기자로서 TV 출연에, 그 사이에 지금도 신곡을 쓰고, 가사도 직접 쓰고, 취미 이상의 그림도 그리고, 시도 쓰고, 취미로 자전거도 타고, 과외로 광고도 찍고 하는 바쁜 일정임에도 저와 계약이나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한마디로 저랑 잘못 엮이어 그의 커리어와 상관없는 작은 교실에 납시어 준 것입니다. 의리를 지켜준 것이겠지요. 제가 김창완님의 천재적인 재능과, 기념비적인 성과에 더해, 이런 훌륭한 인성까지 그분을 흠모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아름다운 이 밤 김창완입니다"에서의 김창완 아티스트, 2023. 2


2월의 그날 밤 김창완님은 음향 시설이 미비한 우리 인문학 교실에서 기타 한 대만을 대동한 채 음악과 관련한 그의 인생 이야기와 몇 곡의 히트곡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완성체로 50년 가까이 사는 아티스트임에도 지금도 도전하고 맹렬히 연습한다며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기타로 연주해주었습니다. 아마도 <월광>은 처녀 공연이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2월의 그 교실은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습니다. 강연인지 공연인지 모르게 지나간 그날 밤 그의 강의 제목은 <아름다운 이 밤 김창완입니다>였습니다. 이 글을 통해 김창완 아티스트께 또 감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우리는 살면서 익숙하게 알던 사람을 예기치 않게 슬픔 속에 보내기도 하지만, 반면에 또 새로운 사람을 예기치 않게 기쁨 속에 만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때로 그 새로운 사람은 전혀 의외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 인물이 평소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것도 어느 날 갑자기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는 행운인 세렌디피티(serendipity)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뒤늦은 인연이라도 그것이 서로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준다면 그 인연은 지속적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인연의 깊이와 강도는 시간과 빈도수에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요. 글로 단초가 된 저와 김창완님과의 인연도 그렇게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좀 뜬금은 없지만 송호근 교수와 조용필님과의 인연도 그렇게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름다운 이 밤 김창완입니다"가 열린 인문학교실, 2023. 2


아래 글은 이번주 월요일 5월 1일 근로자의 날 이른 아침, 김창완님이 카톡으로 보내준 글입니다. 이렇게 그는 그가 맡은 SBS FM 라디오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의 오프닝 멘트를 직접 쓰기도 하나 봅니다. 매일 아침 6시 20분 집을 나서서 자전거를 타고 여의도 방송국에 도착해 앉자마자 커피 한잔과 함께 이런 글을 쓰겠지요. 위의 그의 바쁜 일정에 또 한 가지 추가입니다. 제겐 너무나도 공감 가고 힘이 되는 멘트가 들어있어 원문을 소개합니다. 오늘 제가 이야기한 만남과는 다른 그의 이별 이야기도 들어있네요. 그날은 이 글을 먼저 읽고 9시에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잔잔하고도 따뜻한 김창완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길이 한산하네요. 다들 잘 쉬고 계시겠지요. 아침창은 생방송입니다. 토요일 대구 공연은 잘 마치고 왔습니다. 아양예술회관이 꽤 크던데.. 많이들 오셨더라고요. 늘 다가오는 일은 큰 일 같고 걱정도 생기고 하는데 막상 지나고 보면 그저 우표 한 장만 해요. 대구만 해도 거리가 좀 돼서 오고 가는 게 일이라 좀 힘들었는데.. 이렇게 화창한 월요일을 맞고 돌아보니 짧았던 봄꿈 같습니다. 산울림 데뷔하고 얼마 안 돼 찾았던 도시라 막내 생각이 자꾸 나서 혼났네요. <회상> 부르고 났는데 어찌나 먹먹하던지.. 형제란 게 그런가 봐요. 참 안 잊히네요. 그나저나 오늘은 뭘 해도 좋은 날일 것 같지요?    



https://youtu.be/sPJkFzckPq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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