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종묘제례(종묘대제) 기일이 되면 왕과 세자는 종묘에 입장하게 됩니다. 신령한 곳이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갔을 것입니다. 경내로 들어서면 그들에겐 각자의 길이 따로 있었습니다. 지상의 왕이지만 종묘에서만은 지하의 왕인 선왕들에게 밀려 걷는 길이 달랐던 것입니다. 본채라 할 수 있는 정전(正殿)과 별채 격인 영녕전(永寧殿)으로 향하는 흙길 가운데로 돌길이 이어져 있는데 그 돌길 중앙은 볼록하게 솟아 있습니다. 신로라 불리는 그 길은 혼백이 된 선왕들이 걷는 길입니다. 제사를 받으러 그들도 와야 했으니까요. 왕과 세자는그 볼록 돌길 좌우의 평평한 돌길로 걸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일반인은 돌길 좌우 흙길로 걸었습니다. 이 원칙은 제가 종묘를 방문한 그 겨울날에도 적용되었습니다. 지금도 그 돌길을 밟지 말라고 주의를 주니까요. 물론 그 돌길의 돌부리 하나도 과거부터 이어온 문화유산일 것입니다.
종묘엔 정전과 영녕전 이외에 제사와 관련한 부속 건물들이 있습니다. 외대문이라 불리는 정문을 지나면 가장 먼저 망묘루(望廟樓)가 나타나는데 이곳은 종묘 관원들이 업무를 보는 곳이며 왕이 오면 대기를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제사 전 선왕들을 생각하며 머문다고 해서 망묘루라 불린 것입니다. 그 옆엔 제사에 사용될 향과 축문 등 제물을 보관하고 제관들이 머물던 향대청(香大廳)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뒤로 의외의 건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공민왕의 신당입니다. 조선시대 왕들의 사당에 다른 왕조인 고려시대 왕의 사당이 있는 것입니다.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그에 대한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성계는 정상 국가로서의 고려는 공민왕까지로 평가해서 그렇게 입주시킨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후 들어선 우왕, 창왕, 공양왕은 그가 마음이 떠나 역성혁명을 꾀했던 왕들이었으니까요. 그렇게 고려와 조선이 이어짐을 상징하기 위해서 공민왕 사당을 한 편에 설치한 것으로 보입니다. 왕후들의 신주도 함께 있는 종묘의 룰에 맞추어 공민왕의 부인인 노국공주의 영정도 함께 있습니다.
정전으로 가기 바로 전 특이한 건물이 하나 있는데 왕과 세자가 목욕을 하고 대기를 하던 재궁(齋宮)이 그곳입니다. 제사를 지내기 바로 전 이렇게 진짜로 목욕부터 한 것입니다. 제사는 한밤중인 자시나 축시에 지냈을 테니 그전에 궁에서 목욕을 했더라도 종묘에 와서 제사 직전 목욕을 해야 했습니다. 목욕재계(沐浴齋戒)가 괜한 말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하는 종묘입니다. 통상 중요한 의식을 앞둔 사람에게 목욕재계 후 하라고 하는데 왕과 세자도 신줏단지를 모시기 전에 한 것입니다. 그날 여자인 왕후와 공주는 입장이 불허되었습니다.
정전과 영녕전 주변 외곽엔 종묘제례악을 위해 악공과 무용수들이 연습하며 대기하는 악공청(樂工廳)이 위치해 있습니다. 정전 안엔 역대 왕들의 즉위 시 공이 컸던 신하 83명의 위패를 봉안한 공신당(功臣堂)도 있습니다. 부자간의 효와 함께 군신간의 충을 강조했던 유교 국가 조선이라 왕의 사후에도 그 곁에 신하를 둔 것입니다.
종묘 안내 지도
종묘의 메인 건물인 정전엔 19개의 방이 있다고 했습니다. 방이라 표현했지만 따로 독방으로 구분된 것이 아니라 기둥 사이에 적정 면적의 신실로 신주가 놓이는 공간이 19개 칸으로 나눠져 있는 것입니다. 마치 사무실의 파티션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태정태세문단세를 외우며 손가락을 꼽아보면 27명의 왕이 등장합니다. 그렇습니다. 조선엔 27명의 왕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신주가 놓일 공간인 신위가 19개밖에 없으니 나머지 왕들은 어디에 신위를 놓은 것일까요? 게다가 종묘엔 그들 27명 이외에도 더 많은 왕들의 신주가 있고 신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1차적으로 왕위에 오른 적이 없는 태조 이성계의 직계 조상들이 있습니다. 효를 중시하는 유교 국가 조선이었기에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등 4대 조상까지를 왕으로 간주하고 종묘에 안치한 것입니다. 아버지부터 순서대로 환조, 도조, 익조, 목조가 그들로 이를 5묘제라고 합니다. 본인을 포함한 5대까지를 제사의 당사자로 보고 본인을 뺀 직계 4조까지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조선 후기 대한제국 시대엔 이 5묘제가 7묘제로 바뀌었습니다. 직계 6대 조상까지 제사를 지낸 것입니다. 이는 중국에서 유래한 것으로 천자의 국가는 7묘제, 제후의 국가는 5묘제에서 비롯된 전통입니다.
그러니 할 일 많았던 대한제국 시절의 고종과 순종은 고조할아버지를 넘어선 6대 조상까지 제사를 지냈을 것입니다. 참으로 까다롭고 복잡한 유교입니다. 태조 이성계가 어린 시절 4대조인 고조할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결혼과 출산이 늦어진 요즘엔 인간의 평균 수명이 길어졌어도 증조할아버지 보기도 매우 힘든 시대입니다. 세종 때 만들어진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목조, 익조, 도조, 환조 등 이 4대조에 태조와 태종까지 등장시켜 해동의 육룡(六龍)이라 칭하며 그들 여섯 왕을 기린 노래입니다. 세종이 한글을 발명한 후 테스트로 생전 본 적 없는 6대 조상까지 기리며 그들을 군왕인 용으로 표현하여 찬미했습니다. 잘난 것이 참으로 많은 세종은 이렇게 효행도 으뜸이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7묘제로 보이게 하는 용비어천가입니다.
조선시대 주요 왕과 왕후의 신위가 자리한 종묘의 정전 (출처, 문화재청)
이렇듯 종묘의 첫 입주자는 태조 이성계의 4대조로 4명이었습니다. 1395년 오픈과 동시에 신주를 모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종묘엔 토털 27명을 넘어 31명의 왕이 존재하게 됩니다. 정전의 방은 19개밖에 없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그 신주들이 놓일 새로운 재실이 필요했는데 정전 바로 옆 영녕전(永寧殿)이 바로 그 건물입니다. 정전을 본채라 하면 별채와도 같은 영녕전입니다. 그래서 19명의 왕들을 제외한 나머지 왕들의 신위는 영녕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물론 왕후의 신위도 지아비인 왕과 함께 그쪽에 있습니다.
종묘 입주와 관련하어 희비가 엇갈린 왕들도 있습니다. 바로 폐위된 왕들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왕이 아니니 종묘에 들어올 자격을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폭군의 대명사인 연산군과 광해군은 종묘에 신위가 없습니다. 조선엔 폐위된 왕이 한 명 더 있었는데 그는 바로 노산군입니다. 계유정난 시 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 왕에서 군으로 강등되어 귀양 가서 죽었지만 훗날 숙종 때 명예가 회복되어 본래의 단종 이름으로 종묘에 들어왔습니다.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물론 그를 폐위시킨 수양대군인 세조가 그런 이유로 종묘에서 방을 빼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종묘엔 왕위에 오른 적도 없으면서 그곳에 신위가 있는 왕 아닌 왕들도 있는데 바로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 같은 인물입니다. 영조의 분노로 세자 지위를 잃고 왕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그도 훗날 복원되어 장조로 추대되어 종묘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이런 왕을 추존왕이라 부릅니다. 위의 태조 이성계의 4대조도 추존된 왕이니 역시 추존왕입니다. 종묘엔 추존왕(追尊王)으로 목조, 익조, 도조, 환조 등 4명과 장조 이외에 덕종, 원종, 진종, 문조 등 5명의 신위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용상에 앉은 27명의 임금에 태조 이성계의 이름뿐인 조상왕 4명이 추가되어 31명, 거기서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이 빠지니 29명, 그리고 이후 추존된 5명의 왕이 추가로 들어갔으니 사후 종묘의 정전과 영녕전에 혼백이 입주한 조선의 왕은 모두 34명이라 할 것입니다.
조선시대 종묘의 정전에 입주하지 못한 왕과 왕후의 신위가 자리한 영녕전 (출처, 문화재청)
그런데 종묘엔 1명의 신위가 또 있습니다. 바로 고종의 아들이자 순종의 이복동생인 영친왕입니다. 그는 왕은 아니었지만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자격으로 종묘에 마지막으로 들어왔고 딱 하나 비어있던 영녕전의 마지막 방을 채웠습니다. 그래서 종묘는 공실 없이 모든 재실을 정확히 다 채웠습니다. 영친왕은 1970년 사망하고 1973년 입주하였습니다. 종묘엔 이렇게 조선시대 왕과 왕 대우를 받은 총 35명의 신위가 정전에 19명, 영녕전에 16명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러 왕비를 거느리고 살았던 왕들이기에 왕후의 숫자는 더 많습니다. 정전에 30명, 영녕전에 18명 등 총 48명의 신위가 있습니다. 일 잘하는 왕이 거느린 왕후의 숫자도 많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 모든 숫자만큼의 신주가 보관되어 있는 종묘입니다.
정전은 말 그대로 종묘의 메인 건물입니다. 칸 수도 많으니 그 길이만도 101m에 달해 우리나라 목조건물 중에서 가장 긴 자랑스러운 국보입니다. 서브 건물인 영녕전은 보물입니다. 그러면 왕들 중에서 어떤 왕은 신위가 정전에 있고 어떤 왕은 영녕전에 있을까요? 건물 이름이나 사이즈에서 보듯이 그것은 왕의 업적과 상관이 있습니다. 후대에 선대 왕을 평가해 그의 신위를 어디에 배정할지가 결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현존 왕은 본인이 죽으면 정전에 신위가 놓이기를 기원했을 것입니다. 인간이기에 죽으면서 그렇게 유언을 할 법도 하지만 조선은 실록을 비롯해 왕의 모든 것을 사실에 입각해 기록한 나라였으므로 그것은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경계하고자 최종적으로 신주를 어디에 모시는지는 4대손 때에 결정을 하였습니다. 위에서 설명한 5묘제의 영향입니다. 유교에 따른 제사가 끝났으니 그 처리를 해야 했던 것이었습니다. 즉 4대손 왕 때에 그 4대 선왕인 고조할아버지의 신위를 정전에 그대로 둘지, 빼서 영녕전으로 이동시킬지를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 지난 시기이면 왕이나 신하들이 선대에 엮인 이해관계가 사라져 4대 선왕의 업무 고과를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가장 먼저 정전에서 방을 뺀 역대 왕은 바로 태조 이성계의 직계 4대조였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사실일 수밖에 없습니다. 방이 남아돈다면야 모를까 모자라기도 하니 상징왕인 그들부터 방을 빼서 영녕전으로 이동시킨 것입니다. 묘지로 보면 이장을 하듯이 말입니다. 대신 그들은 영녕전의 가장 좋은 중앙에 신위를 배정받았습니다. 정전에선 좌측 끝인 태조 이성계부터 순서대로 신위를 배정받았습니다. 계속 우측으로 증축해 나가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정전의 나무 기둥은 그 연식이 다르다고 합니다.
현재 정전의 19명의 왕들은 태조, 태종, 세종, 세조, 성종 순으로 이어집니다. 유약한 정종과 문종이 빠진 것만으로도 4대 후손왕 때 제대로 업무 고과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의 신위는 영녕전으로 옮겨졌습니다. 왕후도 함께 따라갔습니다. 이렇듯 왕과 왕후의 신위가 영녕전으로 이동하게 되면 정전의 경내 공신당에 봉안되어 있는 신하들의 위패는 영녕전으로 가지 않고 그들의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일단 영녕전엔 공신당이 없습니다. 왕을 잘 만나야 사후 종묘에 남을 수 있었던 조선시대의 신하였습니다. 어쩌면 그래서도 왕을 잘 보필해야 했습니다.
정전에 자리한 19명의 왕과 왕후의 신위봉안도 안내판
하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이것은 공명정대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망국에 이르게 하거나 무능한 왕들도 다 정전에 신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3왕인 철종, 고종, 순종이 그들입니다. 그리고 그들 앞엔 왕위에 오른 적도 없던 추존왕도 한 명 들어가 있습니다. 그는 문조로 9명의 추존왕들 중 정전에 신위가 있는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는 효명세자로 순조의 아들이자 헌종의 아버지였으나 요절해서 사도세자처럼 왕위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훗날 고종 즉위 시 민가에 있던 그가 왕위를 잇도록 적통인 효명세자의 양아들로 입적이 되었기에 고종은 그를 문조라는 왕으로 추대한 것으로 보입니다. 본인의 정통성을 만들어준 양부였으니까요.
철종은 강화도에서 나무나 베며 농사를 짓다가 왕에 오른 인물입니다. 그는 왕이 된 후 세도정치를 못 견디고 여색에 몰두하다 33세에 병사했습니다. 정전에 이런 허약한 왕들의 신위도 있어 공평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이전 14대 임금인 선조도 임진왜란으로 인해 나라를 피폐하게 만들었으니 그가 정전에 있는 것도 부당해 보입니다. 조선 꼭대기 건국왕인 좌측 1번 자리에 있는 태조 이성계가 보면 언짢아할 방배정일 것입니다. 더구나 선조는 그가 조성한 신도인 한양을 버리고 도주해 그가 심혈을 기울여 건축한 종묘와 경복궁을 소실되게까지 하였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최종적으로 왜적을 몰아낸 임금으로 기록되어 정전에 신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을 일본에 빼앗긴 고종, 순종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종묘의 정전이 19칸을 갖춘 현재의 모습으로 확정된 것은 고종 재위 시절이었습니다. 그가 증축하며 만든 우측 끝 마지막 두 칸에 그와 그의 아들인 순종의 신위가 들어섰습니다. 이렇듯 추존왕인 문조와 철종, 고종, 순종은 나라가 망하여 그대로 정전에 신위가 존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대한제국 시절엔 7묘제로 바뀌었으니 6대 후손왕이 그들의 정전 존치 여부를 최종 결정해야 했는데 그럴 왕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랬다면 공평하게 영녕전으로 신위가 옮겨졌을 왕들로 보입니다.
올해 9월 공사 보수 공사 완료를 목표로 하고 있는 종묘의 정전
사직이 조선의 농본주의에서 비롯되었다면 종묘는 유교에서 기인할 것입니다. 즉 정치의 중심인 경복궁을 중심으로 좌우에 국가 경영의 두 축인 농업과 유교를 기리는 곳을 설치하고 실천한 것입니다. 유교의 핵심은 국가와 군왕에게 충성하고 부모와 조상에게 효도하는 충효사상에 기반하니 그래서 건국과 동시에 종묘를 설치한 것입니다. 즉, 종묘와 사직은 조선이라는 국가의 중심 사상을 상징하고 실천하던 곳이었습니다.
사극에서 신하들이 우렁차게 외치곤 하는 "전하~ 종묘사직을 생각하소서"나 "전하~ 종사가 위태롭습니다"는 종묘에 있는 조상들과 사직에 있는 땅과 곡물의 신을 호출한 것입니다. 왕위의 막중함을 알고 신중하게 처신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대개 성군보다는 폭군이 듣던 말이었습니다. 반대로 간신들의 세력이 클 때에 그들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유약한 왕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등장하곤 했습니다. 이렇듯 종묘와 사직은 경복궁과 함께 조선이 건국될 때 가장 먼저 세워진 건축물로 5백 년 이씨 조선의 역사와 함께 했습니다. 전쟁이나 화재로 소실되어도 이 3개의 건축물은 다시 세워지곤 해 오늘날까지 그 모습이 보존되고 있습니다. 일제에 의해 개방된 사직공원 안에도 사직단은 있으니까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의 중앙공원에 가면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요한슈트라우스, 브람스 등의 묘지가 있습니다. 그 도시를 빛낸 음악왕들이 한 곳에 묻혀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혼백은 오늘날까지도 그 도시에 남아 어둠이 내리면 그 도시 어딘가에서 열리는 음악회에 참석해 후대 음악가들의 연주를 돕고 있을지 모릅니다. 언제까지나 비엔나를 세계음악의 수도로 만들고 있는 음악의 조상들입니다. 지금 종묘에 있는 조선의 모든 국왕과 국모도 이 나라가 잘되기를 그곳에서 기원하고 있을 것입니다.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바뀌었지만 같은 국토이고 국민은 그 시대를 잇는 같은 후손들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그들을 위해 직계 후손과 국가가 주관하는 성대한 제사가 열리고, 서울의 중심가 그 비싼 땅에서 퇴거되지 않은 채 그들의 혼백을 편히 머무르게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 값을 하기 위해서라도 대한민국의 발전과 번영을 기원하고 있을 것입니다.
종묘의 종묘제례(종묘대제)의 모습 (출처, 위키백과)
그날 종묘를 한 바퀴 돌고 외대문을 나서며 스스로 약속을 하였습니다. 종묘를 또 오겠다는 것입니다. 일단 저는 중요한 두 가지를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는 현재 보수 중인 정전의 제 모습입니다. 정전은 현재 가림막으로 가려져 있습니다. 또 하나는 종묘제례가 열리는 모습입니다. 다시 갈 그날이 같은 날이 될지, 다른 날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이 두 가지를 보기 위해서라도 종묘를 다시 찾을 것입니다. 지난 1월 29일 우연찮게 입장하게 된 종묘였지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태정태세문단세를 백날 외우고 평생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많은 배움과 깨우침이 있는 방문이었습니다. 이렇게 글을 쓸 정도로 말입니다. 이름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날 오후 2시 20분 견학을 도와준 문화관광해설사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날 저를 종묘로 입장하게 한 그 선배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 그날 순라길의 점심과 커피도 사주셨네요. 채운 것이 많은 날이었습니다.
* 종묘 정전에 신위가 있는 19명의 조선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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