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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Apr 20. 2024

스페니쉬 콜럼버스 <하>

콜럼버스 & 이사벨

드디어 닻은 올려지고 돛은 펴졌습니다. 콜럼버스의 배가 인도로 향한 위대한 여정을 시작한 것입니다. 1492년 8월의 일입니다. 그는 세비야에서 과달키비르 강을 타고 내려가 바다와 만나는 항구 도시 카디스에서 기함인 산타마리아호를 타고 멤버들과 합류해 대서양으로 빠져나갔습니다. 모두가 동쪽으로 갈 때 유일하게 반대편인 서쪽으로 향한 것입니다. 이윽고 그와 그의 선단은 아무도 간 적 없는 대서양을 건너 그가 생각하는 인도에 도착했습니다. 70일간의 항해 끝에 이루어 낸 결과였습니다. 그 기간엔 아프리카 북서부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에서 머물며 물자 보급과 배 수리 등으로 보낸 1개월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콜럼버스의 인도에 첫 발을 디딘 선원들은 부둥켜안고 만세를 불렀을 것입니다. 산타마리아 보우하사 죽지 않고 살았다는 것에 안도했을 테니까요. 면책된 죄수로 구성된 일반 선원들은 망망대해 네모난 바다 끝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거나, 가도 가도 섬이 안 나타나서 굶어 죽을 것을 걱정했을 것입니다. 그랬던 시대였으니까요.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그곳은 인도가 아닌 카리브해 내 한 섬이었습니다. 그는 그 섬을 성스러운 구세주란 뜻인 산살바드로라 불렀고 그 지역을 에스파냐의 옛 이름인 히스파니아에서 따온 히스파니올라라 불렀습니다. 스페인은 에스파냐(España)의 영어명입니다.


가자 인도로! 항해 중인 콜럼버스의 기함 산타마리아호 (출처, 영화 '1492 콜럼버스')


1493년 3월 인도 항해를 마치고 7개월 만에 콜럼버스가 돌아왔을 때 이사벨 여왕은 흥분했을 것입니다. 그녀가 결정한 투자가 실패하지 않았음에 안심했을 것이고 그것을 이루어 낸 콜럼버스가 자랑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본격적인 개발을 위해 더 큰 투자가 들어갑니다. 투자자도 많아져 1493년 2차 항해 때엔 17척의 배에 1,200명이 승선해 콜럼버스를 따라 그의 인도로 향했습니다. 금을 찾기 위한 골드러시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지만 인도라고 불린 그곳엔 있어야 할 향신료도 없고 금도 많이 생산되지 않았습니다. 콜럼버스는 점점 초조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총 4차에 걸친 항해 중 2차 항해 때부터는 무리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본래부터 그런 악한 심성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잔혹한 수탈과 학살의 역사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의 이익도 달려있지만 투자자인 이사벨 여왕에게 본전 이상의 이익을 돌려주기 위함이 더 컸을 것입니다.


학식 높은 기독교도인 콜럼버스는 점점 무자비한 총독으로 변해갔습니다. 최초인 1차 항해 때엔 원주민과 서로 호의를 베풀며 사이좋게 지내고 돌아왔던 그였습니다. 물론 1차 항해 시 남겨두었던 그의 선원들 30여 명이 몰살되어 있는 것을 보고 그렇게 변한 면도 있을 것입니다. 그는 원주민들에게 할당량을 정하고 그 생산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가차 없이 처벌을 하였습니다. 저항하는 부족들은 무자비하게 학살을 하였습니다. 이후 악명 높은 벨기에의 레오폴드 국왕이 아프리카 콩고 고무농장에서 자행했던 것처럼 원주민의 손발을 자르기도 했습니다. 콜럼버스에 대한 역사의 평가가 크로스 되는 순간이 시작된 것입니다.


스페인으로 돌아갈 땐 원주민을 500명씩이나 싣고 가 이사벨 여왕에게 선물로 바치기도 했습니다. 향신료는 없고, 금은 모자라고, 못 보던 동식물 이외에 가지고 갈 게 별로 없으니 그렇게 노예라도 데려간 것입니다. 여자들은 성노예로 전락시켰습니다. 카리브해 노예무역의 시작입니다. 이후엔 원주민 학살로 노예가 부족해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수입해오기까지 합니다. 대항해 시대 해양 강국인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토르데시야스 조약(1493)과 사라고사 조약(1529)으로 세계의 바다에 줄을 긋고 마음대로 하던 시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스페인엔 유럽에서 최초로 아메리카 인디언까지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유럽의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이방인인 무슬림들이 800년간 살았던 스페인에 또 못 보던 신인류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과연 오늘날까지도 이래저래 이국적일 수밖에 없는 스페인의 역사입니다.


신대륙에서 콜럼버스 일행과 원주민의 조우 (출처, 영화 '1492 콜럼버스')


그가 그의 인도에서 총독으로 재임 시인 1498년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이룬 인도 항로 개척 성공도 그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곳 진짜 인도에선 유럽인이 찾던 향신료가 제대로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콜럼버스의 인도를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때맞춰 그의 전폭적인 후원자이자 투자자인 이사벨 여왕도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콜럼버스의 인도가 진짜인지를 가려낸 한 사람이 나타납니다. 세비야에 와있던 메디치 가문과 연관된 아메리고 베스푸치라는 피렌체 출신 상인입니다. 그는 콜럼버스의 뱃길로 대서양을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1503년 발간한 <신세계>를 시작으로 그곳이 인도가 아닌 신대륙임을 여러 아티클에서 밝힙니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그 신대륙에 아메리카라는 이름이 붙여지는 순간입니다.


콜럼버스의 마지막 항해가 된 4차 항해는 1504년 끝이 났습니다. 1492년에 시작된 항해였으니 12년간 대서양을 네 차례 오갔던 그였습니다. 그해 그의 투자자인 이사벨 여왕도 죽었습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콜럼버스의 히스파니올라 총독직도 박탈되었습니다. 물론 세습도 무효가 되었습니다. 그 이전부터 빚에 시달리고 사기꾼으로 몰려 옥살이까지 한 그였습니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그때까지도 그가 발견한 그곳을 인도라고 믿었습니다. 1506년 그가 죽을 때까지도 그랬습니다. 열정만큼이나 대단했던 그의 신념입니다. 물론 잘못된 신념입니다.


그가 만약 그의 인도를 인도가 아니라고 인정했다면 오늘날 아메리카는 콜럼비아 대륙으로 불리고 있을 것입니다. 북아메리카는 북콜럼비아, 남아메리카는 남콜럼비아로 말입니다. 아울러 미국은 USA가 아니라 USC(United States of Columbia)가 되었을 것입니다. 남아메리카의 국가 콜럼비아나 미국의 수도 워싱턴DC에 들어있는 콜럼비아, 뉴욕의 명문 콜럼비아 대학, 그리고 오하이오주의 주도 콜럼버스 등은 모두 콜럼버스의 이름을 따른 것입니다. 그만큼 아메리카 대륙 곳곳에 위대한 발견자인 콜럼버스의 흔적이 남아있고 그를 기리는 것입니다. 신대륙의 이름을 날로 먹은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은 그것 말고는 딱히 없습니다.


1492년부터 12년간 4차에 걸쳐 진행된 콜럼버스의 신대륙 항해 (출처, 두피디아)


하지만 스페인에 뿌린 그의 인도 씨앗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난 크기로 자라나 스페인이 유럽 최고의 부국으로 올라서는데 최고의 기여를 합니다. 생전에 그가 총독으로 통치한 지역은 오늘날 도미니카와 아이티가 있는 섬인 히스파니올라가 전부였지만 그곳을 시작으로 이후 아메리카 거의 전역이 스페인의 수중에 들어왔으니까요. 한마디로 이사벨 여왕의 투자가 그녀 생전엔 몰랐지만, 그리고 개발자인 콜럼버스도 몰랐지만 그들이 죽고 난 후 대박을 친 것입니다. 장기투자로 빛을 본 케이스라 하겠습니다. 이사벨 여왕이 고심 끝에 개인이 소장한 금붙이까지 팔아서 한 투자였습니다. 아마도 투자 역사에서 이 이상으로 성공한 투자는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그로부터 스페인은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채굴한 은과 각종 자원으로 16세기 100여 년간 유럽의 최강자로 군림했습니다. 1588년 무적함대가 칼레 앞바다에서 영국에게 박살나기 전까지 말입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중남미엔 스페인의 후예들이 원주민과 동화되어 여러 국가로 분할되어 스페인어를 쓰며 살고 있고, 그들의 뿌리인 스페인에 우호적인 것을 보면 콜럼버스가 뿌린 씨앗은 투자를 초월한 그 이상이라 할 것입니다. 미국 내에서도 히스패닉이 강세인 서부와 플로리다주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지도뿐만이 아니라 세계역사를 바꾼 콜럼버스입니다.


1506년 56세의 콜럼버스는 스페인의 고도 바야돌리드에서 죽었습니다. 쓸쓸한 죽음으로 사인은 매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대서양 건너 서인도 제도의 원주민들은 쌤통이다 하며 만세를 불렀을 것입니다. 악명 높은 그가 몹쓸 병으로 죽고 다시는 그곳에 올 수 없게 되었으니까요. 콜럼버스는 죽으면서 말년의 대우가 섭섭했던 스페인 왕실에 배신감이 커 스페인에 묻히길 원치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고국인 이탈리아로 돌아가기도 난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유해는 그가 묻히길 원했던 그의 왕국인 서인도 제도로 보내졌습니다. 1542년 오늘날 도미니카의 수도인 산토토밍고로 보내진 것입니다. 하지만 그곳을 프랑스가 점령하자 그의 유해는 쿠바의 수도 아바나로 또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1898년 쿠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자 그의 유해는 다시 본래 그가 죽은 스페인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생전만큼이나 파란만장했던 그의 사후 행보입니다. 아마 생전과 사후 이동거리를 따져 보면 기네스북에 오를만한 그의 기록입니다. 살아서는 투자 유치를 위해 전 유럽을 돌아다녔고, 항해 후엔 네 번이나 대서양을 왕복했고, 죽고 나서도 그 큰 바다를 건너갔다 오며 그의 생전처럼 서인도 제도 이곳저곳도 옮겨 다녔으니까요. 하지만 도미니카의 산토도밍고엔 여전히 콜럼버스의 묘지가 있어서 스페인과 무덤 정통성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도미니카의 말이 맞다면 사후 그의 마지막 대서양 편도 이동 거리는 빼야 할 듯합니다. 산토도밍고의 콜럼버스 묘지엔 그가 하느님의 벌을 받아 매독으로 죽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감정이 개입된 묘비입니다. 그들에게 콜럼버스는 침략자이고 수탈자이고 학살자일 뿐일 테니까요.  


스페인과 유해 진위 논쟁을 벌이고 있는 도미니카의 콜럼버스 묘지 (Faro a Colón)


1898년 콜럼버스의 유해가 스페인에 돌아왔을 때 그의 대우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356년 전 유해가 나갈 땐 쫓기듯 나갔지만 국가적인 영웅이 되어서 돌아온 것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메리카 대륙의 가치가 올라감에 따라 그의 가치도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콜럼버스라는 인물과 이름을 스페인이 소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국에, 아니 스페인에 돌아온 그는 세비야의 대성당에 안치되었습니다. 세비야는 당시 스페인에서, 아니 온 유럽에서 대서양을 오가는 아메리카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콜럼버스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많은 상선들이 그의 뒤를 따라 세비야 시내를 관통하는 과달키비르 강을 통해 대서양을 오갔습니다. 


그의 묘지가 있는 세비야 대성당은 이슬람 왕국 시절 세워진 모스크를 리모델링한 고딕 양식의 성당으로 유럽에서 베드로 대성당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성당입니다. 성당 둘레 4면을 다 돌아볼 수 있고 이슬람 양식인 중정까지 있어서인가 밖에서 볼 때 느껴지는 거대함은 그 두 성당 이상으로 커 보입니다. 내부 역시 넓은 공간에 많은 미술 작품과 금장식으로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런 유명세로도 전 세계에서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그 성당 안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콜럼버스의 묘지가 있습니다. 잘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묘지는 바닥이나 지하에 있지 않고 공중에 떠있기 때문입니다. 스페인 땅에 묻히길 원치 않은 그의 유언을 존중해 그렇게 떠있는 무덤으로 조성한 것입니다.


돌아온 콜럼버스의 유해를 안치한 세비야 대성당 내 콜럼버스 묘지. 그의 뜻을 존중해 떠있는 묘지로 조성

그런데 그의 관을 메고 있는 4명의 사람들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스페인 통일 시기 동맹국이었던 카스티야, 아라곤, 레온, 나바라 등을 다스렸던 왕들이 그 일을 하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왕들이 자국민도 아닌 외국인, 그것도 평민 출신인 콜럼버스의 관을 그렇게 영원히 힘들게 서서 지고 있는 것입니다. 스페인 역사상 외국인으론 가장 큰 칙사 대접을 받고 있는 그라 하겠습니다. 독일인이지만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활동해 그 도시에 묻혀있는 악성 베토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예우를 받고 있는 콜럼버스입니다. 그만큼 그에 대한 논란과 상관없이 그 나라에 기여한 것이 커서 그렇게 대우를 해주고 있을 것입니다.


콜럼버스의 비즈니스 파트너인 이사벨 여왕의 묘지는 그라나다 대성당에 있습니다. 그녀와 함께 스페인 통일을 이룬 남편 페르난도 왕과 함께 왕실 예배당에 나란히 누워있습니다. 그녀의 유언에 의해 당시 수도인 중세도시 톨레도나 중심도시인 세비야에 묻히지 않고 그곳이 지로 선택되었습니다. 그 성당 역시 세비야 대성당처럼 모스크를 개조해 리모델링한 성당입니다. 멀리 산 위로 이름처럼 붉게 물들어있는 아름다운 알함브라 궁전이 보입니다. 그 궁전에 살던 이슬람 최후의 왕조를 몰아내고 통일을 이룬 도시, 직접 작명한 성스러운 믿음이라 칭한 산타페 근처에서 영면하고픈 그녀였나 봅니다.


그라나다 시내에서 바라본 알함브라 궁전의 야경. 알함브라는 붉은 요새라는 뜻


1561년에야 수도가 된 마드리드엔 콜론 광장이 있습니다. 콜론 동상도 있습니다. 콜론(Colón)은 영어명 콜럼버스(Columbus)의 스페인어 이름입니다. 이탈리아에선 콜롬보(Colombo)입니다. 마드리드는 이사벨 여왕과 콜럼버스 생존 시엔 별 볼일 없던 도시였지만 스페인 중흥기를 이끈 펠리페 2세가 톨레도, 바야돌리드를 거쳐 이베리아 반도의 정 중앙인 그곳을 수도로 정했습니다. 그렇게 상징성을 고려해서 정한 수도입니다. 이후 500년에 걸쳐 마드리는 비약적으로 발전해 스페인 제 1위 큰 도시로 성장했습니다. 그런 연유로 상대적으로 역사는 짧아 유적지는 별로 없는 마드리드입니다. 하지만 콜럼버스와 연고가 없는 도시임에도 수도 마드리드는 그를 영웅으로 받들고 있습니다. 본래 다른 이름이었던 그 광장을 1893년 콜론 광장으로 바꾼 것이니까요. 아울러 그의 동상과 기념비도 세워 그곳을 콜럼버스로 도배해 놨습니다. 그리고 5년 후 해외를 떠돌던 그의 유해는 스페인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를 영접하기 위해 사전에 준비를 완료한 것으로 보입니다.


마드리드에 이어 스페인 제 2의 도시인 바르셀로나에도 콜럼버스 동상이 있습니다. 바르셀로나는 그가 1차 항해 후 돌아와서 그곳에 가있던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에게 결과 보고를 한 도시이기에 그것을 기념해 그의 동상을 세웠습니다. 지중해의 항구 도시 발렌시아가 커지면서 제 3의 도시 자리를 내준 세비야의 대성당엔 그의 유언을 따른 독특한 묘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세비야 근처 고대 로마의 도시이자 이슬람 시절 실질적인 수도 역할을 한 코르도바에도 콜럼버스의 동상이 있습니다. 그가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을 접견하는 3인의 동상입니다. 그리고 이사벨 여왕이 묻혀있는 그라나다에도 그의 동상이 있습니다. 성당 근처 이사벨 라 카톨릭 광장에 그 동상이 있습니다. 그녀가 투자를 결재하는, 소위 산타페 협약이라 불리는 모습을 재현한 동상입니다. 그렇게 그라나다엔 그녀의 무덤이 있고 근처에 콜럼버스와 함께 있는 동상도 있으니 그 둘은 죽어서도 개발자와 투자자로 영혼의 파트너가 된 듯합니다.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의 주역입니다.


그라나다 시내의 콜럼버스와 이사벨 여왕의 동상. 그에게 투자를 결정한 산타페 협약의 모습을 재현


이렇듯 스페인의 주요 도시엔 어디를 가도 이탈리안 콜럼버스의 모습이 보입니다. 스페니쉬라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콜럼버스이고 콜론입니다. 그래서 이 글 인트로에 소개한 1992년 엑스포 유치전에서 스페인과 똑같이 콜럼버스를 내세운 이탈리아는 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태어난 이탈리아엔 그의 고향 제노바의 중앙역에만 그의 제대로 된 동상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수도인 로마에서조차 그의 모습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만약 이탈리아가 콜럼버스의 유해가 해외를 떠돌던 356년 무주공산의 그 긴 시간 사이에 그의 유해를 그의 고국인 이탈리아로 가져와 묘지를 성대하게 조성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후회하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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