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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Sep 21. 2024

프리덤 에버랜드 스코틀랜드 <상>

영원한 독립국 스코틀랜드

지난 7월 잉글랜드 중부 요크에서 출발한 기차는 북부 스코틀랜드의 수도인 에든버러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 영국 방문이지만 기차는 처음이었기에, 그리고 스코틀랜드도 처음이었기에 설렘을 안고 탄 기차였습니다. 요크까지는 버스로 이동했었습니다. 과거 90년대 중반 배낭여행으로 서부 유럽을 여행할 때 유레일 패스는 기차로 어디든 다 가고, 때론 배까지 탈 수 있었지만 영국만은 예외였습니다. 유레일 패스가 적용되지 않는 유일한 나라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영국까지 철도로 여행하려면 브리트레일 패스를 따로 끊어가야 했습니다. 배낭여행객의 주머니 사정상 그것은 어려운 얘기라 당시 영국은 대개 패스했습니다. 같은 유럽이라도 가기 힘든 나라였던 것입니다.


언제나 "레이디스 앤 젠틀맨!"을 외치고 이방인에게도 예상과 달리 친절한 영국인이지만 그래도 콧대가 높아서 그랬을까요? 그땐 EU 체제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브렉시트까지 한 상태라 안될까 싶지만 알아보니 그것은 아닙니다. 2019년부터 유레일 패스로 영국도 철도 여행이 가능해졌습니다. 2020년에 브렉시트를 결정했으니 1년 만에 다시 취소하기도 난망했을 것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산업혁명의 나라 영국은 기차와 철도의 종주국입니다. 스코츠맨인 와트가 증기 기관을 발명하자마자 잉글리시맨인 스티븐슨이 그것을 응용해 기차와 기찻길을 발명했습니다. 통합 국가 그레이트브리튼의 힘이 발휘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인류는 수천 년간 올라탔던 말의 등에서 내려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크역엔 이런 철도와 기차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철도 박물관이 있습니다. 시간이 없어 그곳을 방문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올라탄 에든버러행 기차였습니다. 철도의 나라답게 역내에 공항처럼 1등석 승객을 위한 전용 라운지가 있는 것이 이채롭게 보였습니다. 요크를 출발한 기차는 에든버러를 향해 계속 북진해 갔습니다. 기차 여행의 백미는 창밖 풍경입니다. 시원한 영국의 여름 자연이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정차할 때마다 창밖으로 크고 작은 도시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도 기차 여행의 매력일 것입니다. 유럽 고도들의 경우 철도역은 대개 중심가에 위치하기에 그곳을 눈으로 잠깐 보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관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코스 중 제 귀에 익숙한 도시 더럼을 통과할 때는 더 집중이 되었습니다. 영국에서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 이어 세 번째로 문을 연 유서 깊은 더럼 대학의 도시이니까요. 학교는 도시의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으나 차창 저편 언덕 위 큼직한 더럼 성당의 모습이 인상적으로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저는 보너스로 짧으나마 도시 더럼의 실경도 감상한 것입니다. 휘리릭 아이쇼핑입니다.

 

북진을 하며 제가 창밖으로 눈여겨 찾아본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드리아누스 방벽입니다. 그 방벽은 고대 브리튼섬을 침공해 브리타니아 속주를 개척한 로마 제국의 라틴족이 서기 60~70년 하드리아누스 황제 재직 시 세운 방벽입니다. 로마인은 그 섬에 먼저 들어와서 자리 잡은 켈트족을 북쪽으로 드리블하듯이 내몰며 브리튼섬 끝까지 깨끗하게 정복하고자 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어느 시점, 어느 지점부터는 우리나라의 휴전선 철조망처럼 120km에 걸쳐 상호불가침 경계선으로 그 방벽을 쌓은 것입니다. 122년에 있던 일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와 브리타니아의 국경선인 하드리아누스 방벽 (출처, pixabay)


하지만 로마 제국은 더 욕심을 내어 20년 후인 142년 안토니누스 황제 때 그 방벽 북쪽 160km 지점에 또 새로운 방벽을 구축했습니다. 위도상으로 오늘날 에든버러까지 올라간 것입니다. 이른바 안토니누스 방벽입니다. 어떻게 하든 브리타니아의 영토를 조금이라도 더 넓혀보려고 추진했던 일이었겠지만 그들은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저항이 워낙 거세어 그 방벽은 20년을 못 버티고 버려졌기 때문입니다. 로마인은 그곳에서 남으로 철수하여 다시 하드리아누스 방벽까지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하드리아누스 방벽은 410년 로마인이 브리튼섬에서 철수하기 전까지 스코틀랜드와 브리타니아의 부동의 국경선이 되었습니다. 이후 형성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국경선 조금 아래로 거의 유사한 선상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런데 에든버러행 기차의 선로가 동쪽 바닷가로 치우쳐 가서인가 그 방벽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로마인이 건설한 하드리아누스 방벽과 안토니누스 방벽의 위치 (출처, 위키백과)


그때 로마인들은 스코틀랜드를 가리켜 칼레도니아(Caledonia)라 불렀습니다. 이처럼 거칠고 강인한 그곳 사람들을 가리킨 칼레돈스(Caledones)에서 유래한 지명입니다. 이 이름은 스코츠맨에게 매우 영예로웠을 것입니다. 브리튼섬 완전정복을 원했던 천하의 로마 제국이 정복을 포기하고 휴전선까지 힘들게 쌓고 붙여준 이름이었으니까요. 사실 하드리아누스 방벽이 설치된 이후에도 로마 제국은 호시탐탐 스코틀랜드를 침공했습니다. 에보라쿰이라 불렸던 요크는 세베루스 황제 때인 207년엔 브리타니아의 수도로까지 지정되어 그곳에서 활발한 북방 정복 사업이 이루어졌으니까요.


330년 그의 이름을 딴 콘스탄티노플로 제국의 수도를 천도한 콘스탄티누스 1세도 황제 즉위 전엔 요크에서 아버지를 도와 스코틀랜드의 정복 사업을 진행 중에 있었습니다. 그 시대 오늘날 영국의 요크에서 튀르키예의 이스탄불까지 오갔던 콘스탄티누스, 정말 대단한 스케일의 로마 제국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300년 전인 하드리아누스 황제도 스코틀랜드 국경선에 세운 하드리아누스 방벽과 같은 그의 건축물을 튀르키예의 안탈리아에 세웠습니다. 지금도 건재한 하드리아누스의 문입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요크에서 아버지가 죽자 선왕을 계승해 서방정제로서 황제까지 오른 것입니다. 그 전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로마는 넓은 제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제국을 동방과 서방으로 나누고 각각 정제와 부제, 4명이 다스리는 체제로 바꾸었습니다. 그들 중 최고 실력자가 황제가 된 것입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그가 있던 브리타니아의 요크에서 황제 즉위식을 올렸습니다. 요크 민스터라 불리는 대성당 마당에 그의 동상이 서있습니다. 아니 황제라서인가 앉아있습니다.


에보라쿰이라 불린 요크에서 306년 황제로 즉위한 콘스탄티누스 1세


이렇게 로마 제국의 최고 실력자인 황제가 스코틀랜드의 턱밑에 있었어도 그 땅은 정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스코틀랜드인들이 거칠고 강인했던 것입니다. 칼레도니아 맞습니다. 결국 로마는 기원전 55년 바다 건너 갈리아의 총독이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브리튼섬에 첫 상륙한 이후 450년에 걸친 완전 정복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410년 브리타니아에서 완전히 철수를 하였습니다. 제국의 달이 기울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스코틀랜드는 로마 제국의 식민지 생활을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로마 제국이 침공했고, 수백 년 간 공을 들인 곳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끝내 정복하지 못한 지역일 것입니다. 스코틀랜드가 지역적으로 험준하고, 스코츠맨이 강성의 유전자를 지닌 영향도 있었겠지만 남의 지배를 불허하는 독립심과 자유를 갈망하는 염원이 이룬 결과로 보입니다. 그것은 로마 제국의 철수 후 잉글랜드 지역인 남쪽은 또 새로운 침략자들이 대륙으로부터 들어와 그 땅을 두고 다양한 민족이 여러 나라를 건설하며 흥하고 망하고를 반복했지만 그때에도 스코틀랜드는 변함없이 그들만의 독자성을 유지하며 그 시대를 무사히 넘긴 것에서도 인정이 될 것입니다. 물론 하이랜드의 험준한 지형으로 먹을 것이 별로 없어 보이는 척박함도 계속해서 그들의 안녕에 한몫을 했을 것입니다. 북구에서 내려온 바이킹족도 요크를 중심으로 그 남쪽 위주로 탐을 냈으니까요.


이런 저항의 역사를 거치면서 남쪽에서 로마인들에게 쫓겨온 켈트족, 브리튼섬에서 형성된 브리튼족, 몸에 문신이 있는 픽트족 등 스코틀랜드에 살던 여러 종족들은 하나의 스코츠(Scots)로 그들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형성해 갔습니다. 단일한 국가로 스코틀랜드 왕국이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다 중세 말 그들 왕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협하는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위협 세력은 브리타니아 폐쇄 후 중세 7왕국 시절을 끝내고 한 나라로 통일된 앵글로색슨족의 잉글랜드였습니다.


요크에서 2시간 20분을 달린 기차는 미들즈브러, 더럼, 뉴캐슬을 거쳐 드디어 에든버러의 중앙역이라 할 수 있는 웨이벌리역에 도착하였습니다. 해리포터의 역으로 유명한 런던의 킹스크로스역에서 동부 해안 철길을 따라 633km 북쪽에 위치한 에든버러의 중심가에 온 것입니다. 에든버러역은 지하에 위치해 역 주변 도시 경관이 보이지 않습니다. 인구는 50만을 갓 상회하고, 철길이 더 이상 이어질 곳 없는 북쪽 끝에 있는 것만 같은 도시의 역이라 적당한 크기에 한산할 줄 알았는데 역의 사이즈가 생각보다 크고 사람들이 많아서 놀랐습니다. 하긴 연간 1,300만 명이 방문하는 도시이니 그럴만하다는 생각을 하며 역 지상의 광장으로 올라섰습니다. 그리고 입이 벌어졌습니다. 비경! 비경이 펼쳐졌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어디선가 백파이프의 구슬픈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스코틀랜드입니다.


첫인상, 제 눈에 도시 에든버러는 마치 거대한 세트처럼 보였습니다. 영화나 게임, 또는 동양의 무협지나 판타지물에서나 볼만한 고대나 중세의 입체 배경처럼 보인 것입니다. 역을 중심으로 남쪽 구시가지에 검게 탄 고딕 양식의 첨탑 건물들이 즐비하게 일자로 늘어서 있었습니다. 그 건물들은 저지대에서 고지대로 전진하듯 사선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꼭짓점과도 같은 그 끝 멀리에 에든버러성이 보였습니다. 그렇게 중세풍의 건물들이 도시의 남쪽 전면을 채우니 그 정경은 커다란 병풍, 또는 작은 산맥처럼 보였습니다. 한낮임에도 알록달록한 색상은 꺼져있고 우중충한 명도만이 켜져 있는 에든버러의 올드 시티였습니다.


비경! 에든버러의 구시가지 로열마일 꼭대기에 서있는 에든버러성


잉글랜드의 수도 런던이 고급지고 크리미한 리젠트풍의 화이트 시티라면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는 검게 탄 잿빛의 울퉁불퉁한 블랙 시티입니다. 테임즈강을 끼고 완만하고 평온하게 자리 잡은 런던과는 달리 에든버러는 산악지대 언덕에 거대한 요새처럼 전투적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신화로 비교하자면 런던이 지상과 하늘의 제왕인 제우스의 화사하고 아름다운 올림포스 신전이라면 에든버러는 명부인 지하 세계의 제왕인 하데스의 음침한 신전처럼 보입니다. 그런 고지대와 많은 언덕으로 인해 에든버러는 북방의 아테네, 또는 북방의 로마라고도 불립니다.


역 광장엔 스코틀랜드의 대문호인 월터 스콧의 동상이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의 넬슨 동상처럼 높게 서있습니다. 누구든 스코틀랜드 도착 후 처음 만나게 되는 스코츠(Scots)인 스콧(Scott)입니다. 하지만 원통형 일자로 올라가 단조로운 넬슨의 탑과는 달리 월터 스콧의 탑은 다이내믹한 고딕 양식으로 세워졌고 크기도 넬슨의 탑을 압도합니다. 1843년에 세워진 넬슨의 탑보다 41년 늦게 세워져 모든 면에서 잉글랜드를 이기기 위해 그렇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검은 그 탑은 마치 그의 소설 <아이반호>에 나오는 흑기사처럼 위압감을 줍니다. 월터 스콧은 기념비 꼭대기에 서있는 넬슨과는 달리 기념비 중앙에 우아하게 앉아있습니다. 그 앞엔 아프리카 탐험가이자 선교사인 리빙스턴의 동상이 서있습니다. 당연히 그도 스코츠맨입니다.


에든버러역 광장의 월터 스콧의 기념탑. 앞은 리빙스턴의 동상


그리고 서편 멀리에도 높은 언덕이 보이는데 칼턴힐(Calton Hill)이라 불리는 곳입니다. 그곳에도 넬슨의 기념비가 있습니다. 그는 잉글리시맨이지만 스코틀랜드와 통합된 영국을 프랑스의 나폴레옹으로부터 구한 영웅이니 한편으론 스코틀랜드의 영웅이기도 합니다. 그 기념비는 런던 트라팔가 광장의 그것처럼 원통형으로 올라가지만 지름은 훨씬 굵습니다. 통이 큰 스코츠맨의 영향력이 작용했나 봅니다. 칼턴힐은 에든버러에서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모두를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비스타 포인트입니다. 멀리 북해 바다까지 보이니까요. 역 지상 광장에 오르자마자 들렸던 구슬픈 백파이프 소리는 그 광장 끝 버스킹 연주자의 연주였습니다. 그 소리는 이후 에든버러 어디를 가도 듣게 됩니다. 연주자는 모두 남자임에도 여기가 스코틀랜드임을 보여주는 타탄 체크의 킬트 치마를 입고 있었습니다.


에든버러 시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스코틀랜드의 전통 악기인 백파이프, 전통 문양인 타탄, 전통 의상인 킬트


이제 언덕 위 에든버러성을 향해 올라갑니다. 로열마일(Royal Mile)이라 불리는 길입니다. 우리로 치면 조선 시대 광화문 앞 육조거리와 같은 곳입니다. 길 양쪽으로 고색창연한 관공서와 교회, 그리고 각종 상점과 주택들이 줄지어 서있습니다. 모두 스코틀랜드의 역사가 서린 건물들일 것입니다. 상점 중엔 스코틀랜드의 특산품인 캐시미어 숍이 가장 많이 보였습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유명한 철학자인 데이비드 흄과 경제학자인 아담 스미스의 동상도 만나게 됩니다. 사람들에겐 존경의 대상이지만 비둘기들에겐 그저 화장실로 사용되는 그들의 동상입니다. 물론 백파이프 연주와 켈트족의 민요 버스킹도 계속해서 들렸습니다.


로열마일을 빛내고 있는 스코츠맨, 아담 스미스와 데이비드 흄 동상


로열마일에 많은 관광객들이 보였지만 제가 방문한 7월 그 시점으로부터 보름 후 열리는 8월 축제 기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세계적인 축제인 에든버러 페스티벌 기간엔 그 한 달에 무려 500만 명의 관광객이 몰린다고 하니까요. 축제도 다양합니다. 주최 측에서 하는 정식 축제도 유명하지만 초청받지 못한 예술가들이 벌이는 프린지 축제도 화제를 모읍니다. 미술로 치면 일종의 낙선전일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계 군악대들의 경연 대회인 밀리터리 타투는 에든버러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입니다. 로열마일을 군악대들이 화려한 퍼레이드와 함께 연주하며 행진할 테니까요. 축제도 역시나 호전적인 스코틀랜드입니다.    


드디어 언덕 위 에든버러성에 도착했습니다. 성문 앞마당엔 보름 남은 축제의 임시 스테이지와 스탠드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에든버러성은 과거 스코틀랜드의 왕들이 머문 궁전 역할도 했음에도 아름답고 화려한 성보다는 전투적인 요새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런던의 주중 왕가의 집무실이자 거주지인 버킹컴 궁전이나 주말 거주지인 윈저성과 비교하면 규모도 작고 분위기도 사뭇 다릅니다. 무릇 유럽의 성이나 궁전이라면 동화도 연상되곤 하는데 에든버러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조차도 스코티시 아이덴티로 무장하고 있는 듯합니다. 아마도 더 북쪽의 에버딘에 있는 왕가의 여름 궁전인 밸모럴성은 같은 스코틀랜드라도 좀 다를 것입니다. 근대 들어 평화기인 1856년에 왕족의 구미에 맞게 지어졌으니까요. 밸모럴성은 2022년 엘리자베스 2세가 머물다 서거해 더 유명해졌습니다. 에든버러성은 중세 말인 12세기 초부터 축성되었습니다.


로열마일 끝 고색창연한 에든버러성 전면


에든버러성의 메인 게이트 성문엔 두 명의 동상이 서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스코틀랜드의 위기 시 자유와 독립을 위해 잉글랜드와 싸운 최고의 영웅들입니다. 한 명은 민병대장이고 한 명은 왕입니다. 성문 좌우에 그들은 마치 보초를 서듯이 늠름하고도 비장하게 서있습니다. 과거 적이 침공 시 성 밖 주민들은 모두 에든버러 꼭대기에 있는 이 성 안으로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런즉 이들은 지금도 스코틀랜드 최후의 보루인 에든버러성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수문장 중 오른쪽은 스코틀랜드 독립의 씨앗을 뿌린 윌리엄 월레스이고, 왼쪽은 그를 이어 독립의 열매를 거둔 로버트 더 브루스(로버트 1세)입니다. 격동의 시대 14세기 전후에 살다 간 인물들입니다.



* 다음 주말엔 자유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브리튼섬 신흥 강국으로 부상한 잉글랜드와 싸운 스코틀랜드의 영웅 듀오에 대해 쓰겠습니다. 그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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