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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Oct 05. 2024

샌디에이고에서 스페인을 생각하다

스페인의 북아메리카 진출사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하자마자 스페인은 전방위적으로 그 대륙을 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해에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무슬림 도시였던 그라나다를 정복하여 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이사벨 여왕이 그 이탈리안에게 투자한 본전을 뽑기 위함이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콜럼버스는 그곳을 인도로 생각했고 투자자인 이사벨 여왕에게도 그렇게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가 수학 계산을 잘못해서 일어난 오류였습니다. 오늘날 카리브해 서인도 제도의 한 섬에 도착한 그는 그곳을 여왕의 나라 이름을 따 히스파니올라라 불렀습니다. 당시 콜럼버스는 출항 전 맺은 계약대로 그곳 인도에서 대대손손 총독으로 부임하며 부귀영화를 누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고대 로마의 속주로 이후 스페인이 된 히스파니아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당시 인도는 유럽인이 열광했던 향신료의 나라였으니까요. 금은 보너스였습니다.


이제 콜럼버스와 스페인은 향신료를 찾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것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인도가 아니었으니까요. 콜럼버스는 4차에 걸쳐 원정을 했으나 갈수록 그의 입지는 좁아졌고 결국 그가 꿈꿔왔던 히스파니올라를 보지 못하고 1506년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사기꾼으로 몰려 옥살이까지 했던 그였습니다. 그가 죽기 3년 전인 1503년 그의 인도는 역시 또 어떤 이탈리안에 의해 신대륙인 아메리카로 판명된 상태였습니다. 선구자의 이름을 따 콜롬비아 대륙으로 불렸어야 할 신대륙이 뒤늦게 숟가락을 올린 한낱 피렌체 상인인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딴 대륙으로 바뀐 것입니다. 콜럼버스가 죽는 날까지 그곳을 신대륙이라 인정 안 하고 인도라고 우겼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수학 실력에 더해 무모한 확신으로 당한 불행한 불이익이었습니다.


하지만 스페인은 그곳이 인도에 버금가는, 아니 그보다 훨씬 가치가 높은 꿈의 땅 엘도라도라는 것을 곧 알게 됩니다. 향신료 따위에 비할 땅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콜럼버스도 죽었고, 그가 죽기 2년 전엔 이사벨 여왕도 죽었지만 히스파니올라 주변 개척에 박차를 가합니다. 콜럼버스가 상륙한 서인도 제도 아래로 그곳보다 훨씬 큰 남아메리카 대륙이, 위로는 북아메리카 대륙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대항해 시대를 연 포르투갈에 이어 스페인의 전성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게 신대륙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된 스페인은 카리브해 히스파니올라까지 쫓겨간 콜럼버스의 유해를 다시 고이 모셔와 세비아 대성당에 안치했습니다. 그가 출항을 하고 귀항을 했던 도시입니다. 더 큰 영웅이 되어 돌아온 그의 관을 무려 4명의 스페인 왕이 메고 있는 공중 무덤입니다. 말년 대접을 섭섭히 한 스페인의 땅엔 묻히지 않겠다는 그의 유언을 존중해 조성한 묘지였습니다.


과거 회사에서 출장으로 방문했던 미국의 플로리다주에 제가 주목한 도시가 하나 있었습니다. 세인트오거스틴이라는 곳입니다. 잭슨빌과 카 레이싱으로 유명한 데이토나 사이에 있는 고도입니다. 저는 스페인풍의 무언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 그 도시가 그냥 오래된 도시가 아니라 플로리다주에서, 아니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565년에 건설이 되었으니까요. 물론 스페인 사람들이 세웠습니다. 그들은 1513년 오늘날 미국땅인 플로리다에 처음 상륙했습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지 21년만입니다. 미국의 선조인 순례자의 아버지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에 상륙한 것은 그로부터 107년 후인 1620년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도시로는 뉴잉글랜드라 불린 그곳에 1630년 보스턴이 건설되었습니다.


1565년 플로리다에 스페니쉬가 세운 미국 최초의 도시 세인트오거스틴


스페인은 서인도 제도 주변인 동부 대서양 연안만을 탐하지 않았습니다. 빠르게 눈을 돌려 서부로도 향한 것입니다. 그들은 카리브해 서쪽 끝 멕시코에 상륙해 그곳을 정복하고 뉴스페인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너머에 태평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곳에서 배를 타고 북으로 향했습니다. 드디어 1542년 그들은 오늘날 미국땅 서부 최남단에 상륙하게 됩니다. 이탈리안인 콜럼버스가 그 대륙에 첫 발을 디딘지 50년 후의 일로 그 일은 포르투기스인 카브릴로가 해냈습니다. 용병을 잘 썼던 스페인입니다.


카브릴로는 그곳을 샌미구엘이라 불렀습니다. 오늘날 캘리포니아의 샌디에이고입니다. 그런즉 카브릴로는 역사상 1호 캘리포니안입니다. 샌디에이고시는 도시를 처음 발견해준 그를 기념하기 위해 해안선이 가파른 절벽(포인트로마, Point Loma) 위에 그의 기념관을 세워줬습니다. 한쪽으론 그가 발견한 도시 전체가, 반대쪽으론 그가 왔던 광활한 태평양이 모두 잘 보이는 곳입니다. 미국인 신분의 정착자들이 멀리 동부에서 역마차에 바람 먼지를 일으키며 캘리포니아에 처음 도착한 때는 그로부터 299년 후인 1841년이었습니다.


1542년 샌디에이고에 상륙한 카브릴로의 스페인 함대 (카브릴로 기념관 전시 액자)


이후 스페니쉬들은 캘리포니아 최남단인 샌디에이고로부터 태평양을 따라 북진을 하며 많은 성자와 성녀의 도시를 세웠습니다. 샌클레멘테, 로스앤젤레스, 산타모니카, 산타바바라, 샌호세, 산타크루즈, 샌프란시스코 등이 그런 도시들입니다. 이후 이 도시들이 있는 캘리포니아는 뉴스페인이라 불린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1821년 독립하며 멕시코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을 멕시코가 소유한 기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300년 가까이 소유했던 스페인과는 달리 불과 27년만 소유했으니까요.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변치 않고 유행을 타지 않는 인간 욕망의 노란 결집체인 금이 캘리포니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멕시코인들에겐 비극이라면 비극이었습니다. 동물 뼈가 필요한 영국의 본차이나 때문에 주요 양식인 버펄로를 빼앗긴 그 땅의 인디언들처럼 말입니다.


1841년 캘리포니아에 가장 먼저 들어온 미국인들은 그 땅을 팔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땅의 새 주인인 멕시코인들은 그것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래서 협상은 결렬되고 전쟁이 벌여졌습니다. 결국 캘리포니아는 1848년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인의 땅이 되며 리퍼블릭 오프 캘리포니아가 선포되었습니다. 1783년 동부에서 영국을 몰아내고 그 땅의 새로운 주인이 된 아메리칸이 서부에서 스페인을 몰아내고 그 땅의 새로운 주인이 된 멕시칸을 몰아내고 최종 승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해에 염원하던 금이 오늘날 캘리포니아의 주도인 북부 새크라멘토에서 발견이 되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서부로 몰려오는 골드러시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1850년 2년 동안 독립국이었던 캘리포니아는 미국의 31번째 주로 편입되었습니다.


바다에서 바라본 샌디에이고항. 왼편에 미드웨이 항공모함 보임 (출처, pixabay)


캘리포니아의 1호 도시 샌디에이고는 주 최남단의 도시로 멕시코 국경에 접해있습니다. 아름다운 항구 도시로 해군 기지가 있어 우리로 치면 남해의 진해와도 같은 도시입니다. 최근 들어선 프로야구 김하성 선수로 인해 우리 귀에 더욱 많이 들리는 도시입니다. 시즌 중반 부상으로 경기엔 나오지 못하고 올 시즌을 마감했지만 그의 소속팀인 샌디에이고 파드레스 전용 구장 주변 도로엔 하성킴이라는 그의 이름과 얼굴이 새겨진 깃발이 지금도 걸려있습니다. 화려한 기량으로 샌디에이고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그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파드레스의 홈구장인 펫코 구장(Petco Park)은 다운타운 중심 바닷가에 가까이 위치해 있습니다.


샌디에이고 다운타운 팻코 구장 앞에 걸린 김하성 선수 브로마이드


그 바다엔 요트만큼이나 많은 군함들이 보입니다. 짧은 바다 건너 야트막하게 떠있어 인공섬처럼 보이는 코로나도섬을 비롯해 그 섬으로 들어가는 다리 왼편에 군사 시설이 밀집해 있습니다. 오른편 항구엔 샌디에이고의 랜드마크와도 같은 전시용 항공모함인 미드웨이호가 떠있어 언제나 관광객들로 북적입니다. 연중 내내 청명한 하늘과 온화한 날씨가 이어져 살기에 좋은 샌디에이고입니다. 한겨울인 1월에도 PGA투어의 정규 골프대회인 파머스 인슈어런스 오픈이 그곳 바닷가에 위치한 토리파인스 골프장에서 열리니까요. 권위있는 US 오픈도 열리는 명문 골프장이지만 퍼블릭 코스로 시민과 관광객에게 완전히 개방된 공원과도 같은 골프장입니다.  


토리파인스 골프장에서 바라본 태평양 정경


샌디에이고 다운타운 뒤편 언덕 위엔 올드타운이 위치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다른 도시의 올드타운과는 다릅니다. 도시의 역사가 서린 오래된 마을은 맞지만 그 마을이 미국 마을이 아니고 멕시코 마을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도시이지만 멕시코 민속촌을 옮겨 놓은 것 같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샌디에이고는 위의 설명에서 보듯이 멕시코 영토였다가 미국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입니다. 정확히는 1769년에 스페인 선교사가 세운 스페니쉬 타운이 멕시코로 이어져 내려온 것입니다.


그래서 올드타운에 들어서는 순간은 마치 서부 영화 속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습니다. 영화에서 보던 멕시코풍의 목조 주택과 상점이 즐비하기 때문입니다. 어디선가 창이 넓은 모자를 쓴 카우보이들이 나와 결투를 벌일 것만 같은 분위기입니다. 골목 곳곳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들리는 버스킹도 멕시코풍의 경쾌한 노래들이 이어졌습니다. 물론 식당에서 풍겨 나오는 음식 냄새도 온통 타코풍의 스파이시한 냄새였습니다. 샌디에이고의 올드타운은 미국이 아니라 여전히 스페니쉬 멕시코가 진행 중입니다.  


샌디에이고의 멕시코 민속촌인 올드타운 입구


만약에 1848년 캘리포니아와 멕시코가 종전 협상 시 국경선을 샌디에이고 바로 북단으로 그었다면 오늘날 샌디에이고는 그 올드타운이 자연스럽게 보이는 멕시칸 시티가 되었을 것입니다. 삼성전자 등 우리나라 기업들이 많이 들어가 있는 샌디에이고 바로 아래 멕시코 도시인 티후아나처럼 말입니다. 미국과 멕시코의 그 두 도시가 어느 정도로 가깝냐 하면 우리나라 기업들의 임직원들이 매일 아침저녁으로 국경선을 넘나들며 출퇴근을 할 정도입니다. 일터인 회사는 멕시코의 티후아나에 있지만 거주하는 집은 미국의 샌디에이고에 있기 때문입니다.


스페인은 1821년 멕시코가 독립하면서 연쇄적으로 미국의 캘리포니아도 잃었습니다. 그들이 그 전쟁으로 잃은 것엔 캘리포니아뿐만이 아닌 텍사스, 뉴멕시코, 네바다, 유타, 애리조나 등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페인 점령지였던 그 땅들도 모두 멕시코의 영토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 1846년부터 1848년까지 벌어진 미국과의 전쟁으로 멕시코는 스페인으로부터 획득한 그 모든 땅을 30년도 안 되어 다 잃었습니다. 텍사스만 예외적으로 그 이전인 1845년부터 미국의 주에 편입되어 있었습니다. 역시 스페인을 승계한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1836년 독립한 것입니다. 텍사스는 그 당시 별도로 대통령까지 선출하며 10년간 독립국을 유지한 독특한 이력의 주입니다. 보듯이 스페인과 멕시코가 미국에서 개척하고 잃은 땅은 미국 본토에서 가장 큰 주로 랭킹 1, 2위인 텍사스와 캘리포니아가 들어가 있을 정도로 매우 광대한 지역이었습니다. 텍사스주의 경우 우리나라보다 무려 7배가 크니까요. 캘리포니아는 4배 크기입니다.


동부에서 스페인은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먼저 진출했던 플로리다를 돈을 받고 팔았습니다. 1819년 미국에 500만 불을 받고 매각한 것입니다. 이렇듯 스페인은 대서양 연안의 동부와 태평양 연안의 서부의 신천지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토지 보상을 받았어도 잃은 것은 잃은 것이니까요. 이후 폭풍처럼 올라간 그 땅들의 가치를 생각하면 전쟁을 더 열심히 하든, 돈을 더 받았어야 했습니다. 캘리포니아는 현재 미국 50개 주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이고 플로리다는 3위를 차지하고 있으니까요. 2위는 텍사스입니다. 미국의 인구 123등 도시가 모두 과거 스페인의 점령지였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많이 산다는 것은 그만큼 살기 좋거나 땅이 크다는 이야기입니다. 크기는 이미 위에서 언급을 했습니다. 경제력으로 보아도 캘리포니아주는 만약 초창기처럼 공화국으로 독립한다면 세계 6위의 경제 대국이 됩니다. 텍사스주도 8위권해당되는 경제 대국입니다. 그곳에 산재한 자원이 큰일을 해서입니다. 


미국은 1867년엔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720만 불에 매입했습니다. 그 이전인 1803년엔 프랑스 나폴레옹의 제안으로 광대한 루이지애나를 1,500만 불에 매입했습니다. 루이지애나는 현재 루이지애나주를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프랑스의 점령지 루이지애나는 미시시피강을 끼고 북부 캐나다까지 이어지는 광대한 영토였습니다. 가로막고 있던 그 루이지애나가 뚫렸기 때문에 서부 진출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참으로 부동산에 능한 미국인이었습니다.


미국의 영토 확장 지도. 서부의 검은 영역이 1848년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획득한 영토 (출처, '미국의 주인이 된 사람들', <Takeout 유럽역사문명>)


스페인은 콜럼버스가 발견한 서인도 제도를 베이스로 남북 아메리카로 동시에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군대로 치면 두 개의 전장에서 동시에 전쟁을 벌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남미는 수중에 넣었지만 북미는 위에서 보듯이 남미만큼의 정복 사업을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미국의 동부와 서부 남단 지역만 획득한 것이었으니까요. 물론 남미도 1494년 맺어진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싹쓸이를 하진 못했습니다. 그 조약에서 합의한 경계선으로 인해 동쪽의 광대한 브라질은 포르투갈에 양보해야 했으니까요. 스페인이 당시의 국력으론 그 정도가 한계였던 것 같습니다. 두 전장에서 모두 윈윈(win-win) 하긴 힘드니 한 곳으로 힘을 모은 듯합니다. 19세기 초 비슷한 시기에 미국 동부의 플로리다와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서부에서 모두 철수한 것을 보면 말입니다.


카브릴로 기념관에서 바라본 샌디에이고시 전경. 우측은 군사기지가 있는 코로나도섬


저는 지금 샌디에이고에 있습니다. 482년 전 샌디에이고에 첫 발을 디딘 카브릴로 기념관에 서있습니다. 그곳 포인트에선 동쪽으로는 아름다운 샌디에이고 전역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광활한 태평양이 보입니다. 아마도 카브릴로의 함대는 당시 동쪽 다운타운이 있는 샌디에이고만으로 입항했을 것입니다. 해군의 전함과 시민의 요트가 가득 정박해있는 곳입니다. 샌디에이고는 그곳에서 매일 관광객을 응대하고 있는 항공모함인 미드웨이호만큼이나 큰 도시입니다. 캘리포니아주에선 로스앤젤레스 다음으로 크며 미국 전체로는 8위에 해당되는 도시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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