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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Sep 28. 2024

프리덤 에버랜드 스코틀랜드 <하>

영원한 독립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성의 메인 게이트 성문엔 두 명의 동상이 서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스코틀랜드의 위기 시 자유와 독립을 위해 잉글랜드와 싸운 최고의 영웅들입니다. 한 명은 민병대장이고 한 명은 왕입니다. 성문 좌우에 그들은 마치 보초를 서듯이 늠름하고도 비장하게 서있습니다. 과거 적이 침공 시 성 밖 주민들은 모두 에든버러 꼭대기에 있는 이 성 안으로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런즉 이들은 지금도 스코틀랜드 최후의 보루인 에든버러성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수문장 중 오른쪽은 스코틀랜드 독립의 씨앗을 뿌린 윌리엄 월레스이고, 왼쪽은 그를 이어 독립의 열매를 거둔 로버트 더 브루스(로버트 1세)입니다. 격동의 시대 14세기 전후에 살다 간 인물들입니다.


에든버러 성문의 두 독립영웅. 오른쪽은 윌리엄 월레스, 왼쪽은 로버트 1세


1995년 개봉한 <브레이브 하트(Brave Heart)>는 잉글랜드에 대항한 스코틀랜드의 독립전쟁을 다룬 역사극으로 호주 출신의 명배우 멜 깁슨이 감독을 맡으며 직접 주연으로까지 출연한 영화입니다. 그가 북도 치고 장구도 쳤습니다. 하지만 연기도 잘하고 연출도 잘하는 그 덕분에 <브레이브 하트>는 아마도 스코틀랜드를 배경으로 한 역대 영화들 중에 가장 화제가 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을 것입니다. 저도 이렇게 기억하고 있듯이 말입니다. 이 영화엔 위의 두 독립영웅이 모두 출연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죽어서도 오늘날까지 스코틀랜드의 심장인 에든버러성을 나란히 지킬 정도로 그 나라 역사상 두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애국지사요 독립영웅이지만 영화에서 그 둘의 모습은 완전히 다르게 나옵니다. 윌리엄 월레스는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초지일관 잉글랜드와 맹렬히 싸우는 전사로 나오지만 왕으로 즉위 전인 로버트 더 브루스는 기회주의적이고 우유부단한 귀족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훗날 실질적으로 독립을 완성한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지만 그때까지는 아직 윌리엄 월레스와 같은 브레이브 하트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일 것입니다.


1297년 스코틀랜드의 윌리엄 월레스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를 상대로 결전을 벌입니다. 장소는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멀지 않은 스털링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윌리엄 월레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독립의 여신이 스코틀랜드로 기우는 듯했습니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도 스털링 전투는 비중있게 나옵니다. 하지만 멜 깁슨 감독은 실제 역사와는 달리 전장을 스털링 다리가 아닌 스털링 평원으로 옮겨서 연출을 하였습니다. 그게 더 전투 장면이 실감나고 스펙터클한 연출이 가능해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영화에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가 윌리엄 월레스에게 사절로 보낸 공주 소피 마르소도, 아니 소피 마르소가 연기한 이사벨 공주도 역사적 사실과는 관계가 없을 것입니다. 전쟁 영화라도 귀한 신분의 미녀와 로맨스는 나와야 더 영화스러워지니까요.


1297년 벌어진 스털링 다리 전투. 윌리엄 월레스의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에게 대승을 거둠.


윌리엄 월레스가 세상에 알려지기 전인 1286년 스코틀랜드는 왕인 알렉산더 3세가 후사 없이 죽자 혼란에 빠졌습니다. 귀족 가문들이 임자가 없어진 왕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서로 치고 박고를 반복했던 것입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1세가 끼어들었습니다. 때는 이때다 하며 스코틀랜드의 내정에 간섭한 것입니다. 그는 귀족들을 포섭하고 마치 그가 스코틀랜드의 왕처럼 행세를 했습니다. 그리고 폭정으로 스코틀랜드인들의 자유를 억압했습니다. 거기엔 학살도 따랐습니다. 그래서 무명의 윌리엄 월레스는 분연히 일어선 것입니다. 그의 가족도 잉글랜드군에게 몰살을 당했으니까요. 기록은 불분명하지만 3개 국어를 할 정도로 인텔리인 그가 귀족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니 그는 우리 임진왜란 시 의병대장 같은 민병대장 신분으로 잉글랜드의 정규군과 맞서 싸운 것입니다.


스털링 전투에서 그는 얼굴에 파랗고 하얀 문양을 새기고 출정합니다. 스코틀랜드의 하늘과 구름을 보여주는 문양입니다. 그 문양은 세인트 앤드루(안드레)의 십자가에서 유래했습니다. 안드레는 베드로의 동생으로 그 역시 순교할 때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이 죽을 수 없다며 X자형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린 형처럼 의연한 죽음을 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십자가는 스코틀랜드의 국기 안으로 들어왔고 그 국기는 성 앤드루기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먼 옛날 어떤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가 패퇴 직전이었는데 하늘에 그 X자 모양의 십자가 구름이 나타난 후 역전승 했다는 것에서 유래해 앤드루는 수호성인이 되었고 그의 십자가와 그날 하늘은 국기가 된 것입니다. 아마도 윌리엄 월레스는 그 전설과도 같은 전투를 재현하기 위해 그 문양을 얼굴에 새기고 전투에 임했을 것입니다.


1995년 개봉한 <브레이브 하트>에서 윌리엄 월레스를 연기한 멜 깁슨의 포효. 얼굴 문양은 스코틀랜드 국기임. (출처, 네이버 영화)


윌리엄 월레스는 스털링 전투에 이어 여러 승리를 거두고 잉글랜드 땅인 요크성까지 함락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귀족들이 협조를 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잉글랜드 왕인 에드워드 1세의 매수에 다들 몸을 사린 것입니다. 그들 중엔 훗날 독립왕이 되는 로버트 더 브루스도 있었습니다. 결국 1298년 폴커크 전투에서 패한 윌리엄 월레스는 유랑자 신분이 되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홀로 독립을 모색했습니다. 혼자서만 발을 동동 구른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는 부하의 배신과 귀족들의 묵인으로 잉글랜드군에 잡혀 런던으로 압송되었습니다. 그리고 <브레이브 하트> 영화에서처럼 죽게 됩니다. 조리돌림으로 런던 시민들에게 모욕을 당한 후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체 중 머리는 런던에 효수되고 사지는 전국 각지로 보내져 전시되었습니다. 저항과 반항의 대가를 똑똑히 보여준 것입니다. 그의 처형에 대해선 이 글 아래에서 좀 더 상세히 묘사됩니다.


<브레이브 하트>는 2021년 속편도 나왔습니다. <브레이브 하트 2>입니다. 스코틀랜드 독립의 원투 펀치인 윌리엄 월레스가 죽고 난 후 왕이 되고 독립을 이룬 로버트 더 브루스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입니다. 전편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는 영국 배우인 앵거스 맥페이든이 맡았습니다. 제목과 주인공이 바통을 이어받아 속편처럼 보이지만 속편이라 할 수 없는 것이 이 영화의 원제가 <로버트 더 브루스(Robert the Bruce)>이고 제작도 전편과는 아무 상관없는 호주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브레이브 하트>의 감독과 주연을 맡았던 멜 깁슨의 조국이긴 합니다.


저는 그 영화는 못 보고 최근 넷플릭스에서 2018년 제작된 <아웃로 킹(Outlaw King)>을 보았습니다. 그 영화도 <브레이브 하트>의 줄거리를 잇는 영화입니다. 제목에서 보이는 범법자인 왕이 그때 윌리엄 월레스를 나몰라라 했던 로버트 더 브루스입니다. 그는 알렉산더 3세 이후 공백이었던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즉위해 로버트 1세가 되었습니다. 전편 격인 <브레이브 하트>에서 어찌 보면 비겁자라 할 수 있는 그가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 어떤 계기로 마음이 움직여져 독립투사로 변한 것입니다. 미국 배우인 크리스 파인이 그를 연기했습니다.


2018년 개봉한 <아웃로 킹>에서 로버트 1세를 연기한 크리스 파인. 전시된 윌리엄 월레스의 사체를 보고 있음. (출처, 넷플릭스)


윌리엄 월레스는 1305년 사망했습니다. 그의 사지는 브리튼섬 전역으로 보내졌다고 했습니다. 영화 <아웃로 킹>에선 그 장면이 나옵니다. 스코틀랜드의 베릭이라는 포구에 그의 잘려진 팔이 전시된 것입니다. 로버트 더 브루스는 그곳에서 그것을 보게 됩니다. 하필이면 그곳에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에게 공납할 세금을 걷으러 갔다가 본 것입니다. 그 순간 그에게 변화의 기운이 들어왔습니다. 잉글랜드 에드워드 1세의 개에서 스코틀랜드의 사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윌리엄 월레스가 생자일 때는 두려움에 예수를 부인했던 새벽의 베드로처럼 그를 부인했었지만 그의 사체 중 뜯겨진 팔을 보고선 그의 편으로 돌아선 것입니다. 윌리엄 월레스의  심장은 베릭엔 없었지만 그의 브레이브 하트가 로버트 더 브루스에게 전해졌습니다.


베릭은 지난 7월 제가 요크에서 에든버러로 기차로 이동할 때 중간에 정차했던 역이었습니다. 항구이고 큰 도시는 아닌데 고색창연하고 유서가 깊어 보여 궁금해했었는데 <아웃로 킹> 영화를 통해서 그곳이 역사가 서린 도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털링 전투지에 세워진 윌리엄 월레스의 기념비 (출처, pixabay)


그때부터 로버트 더 브루스는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위해 매진을 합니다. 일단 뜻이 다른 경쟁 가문의 수장인 코민을 죽이고 교회의 인정을 받아 스스로 왕으로 올라섰습니다. 윌리엄 월레스가 죽고 1년 후인 1306년 로버트 1세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화려하고 위엄있는 왕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당장 고정적으로 앉을 왕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1세 모르게, 그가 허락하지 않는 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잉글랜드 입장에선 그도 윌리엄 월레스와도 같은 반란자요 범법자인 것이었습니다. 왕이 된 다음부터 그는 쫓기는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추격자들을 피해 아일랜드까지 도망가기도 합니다. 그의 수난기였습니다. 그러면서 점차로 세를 규합하여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잉글랜드를 괴롭히고 힘을 키워갑니다.


도주 기간에 잉글랜드군은 그를 집요하게 추적합니다. 그 과정에 그의 은신처를 부정하는 동생이 처형을 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교수형에 처하는데 그냥 순순히 목을 매달아 죽이는 게 아닙니다. 바둥거리며 숨이 끊어지려 할 때 칼로 그의 배를 가릅니다. 피와 내장이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면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윌리엄 월레스가 실제로 당한 처형 방법입니다. 그는 산 채로 심장이 먼저 꺼내지고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그리고 사지가 잘린 것입니다. 영화 <아웃로 킹>에선 런던의 템즈강 초입에 효수된 그의 머리도 나옵니다. 잔인한 잉글리시맨입니다. 아니, 인간입니다.   


1314년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1세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2세를 상대로 결전을 벌입니다. 장소는 스털링 바로 아래에 위치한 스코틀랜드의 배넉번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로버트 1세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과거 스털링 전투의 재판으로 서로 상대만 달라진 것입니다. 그가 상대한 에드워드 2세는 윌리엄 월레스가 상대했던 에드워드 1세의 아들로 아버지와는 달리 무능해 실정을 거듭하다 결국은 폐위된 비운의 왕입니다. 스털링 전투가 다리에서 거둔 승리라면 배넉번 전투는 하천에서 거둔 승리였습니다. 그곳으로 잉글랜드군을 몰아넣어 승리할 수 있던 것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다이내믹한 지형이 평원에 익숙한 잉글랜드군을 격퇴한 것으로 보입니다. 배넉번 전투의 승리로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 독립으로 가는 협상의 길을 걷게 됩니다. 독립의 여신이 스코틀랜드로 기운 것이 아니라 아예 선을 넘어왔습니다. 영화 <아웃로 킹>에선 이 전투 이전의 이야기까지 나옵니다.


배넉번 전투지에 세워진 로버트 1세의 동상 (출처, pixabay)


마침내 1328년 노샘프턴 조약으로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로부터 독립했습니다. 로버트 1세와 에드워드 3세간에 맺어진 조약이었습니다. 잉글랜드는 에드워드 1,2,3세 3대 동안 스코틀랜드 문제에 개입해 결국은 두 손을 들게 된 것입니다.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 문제가 끝나자마자 전장을 대륙의 프랑스로 바꿉니다. 스코틀랜드 독립전쟁보다 훨씬 긴 백년전쟁을 시작한 것입니다.


양국의 국경선은 과거 로마인이 브리타니아 시절 세웠던 하드리아누스 방벽과 안토니누스 방벽 사이로 정해졌습니다. 윌리엄 월레스 사후 23년 후에 쟁취한 독립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영화 <브레이브 하트>와 <아웃로 킹> 사이의 개봉 기간도 23년 시차가 납니다. 귀족인 로버트 더 브루스가 <브레이브 하트>에서 윌리엄 월레스에게 진 빚을 <아웃로 킹>에서 왕이 되어 갚은 격입니다. 제작자가 그것까지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렇듯 스코틀랜드는 과거 브리타니아 시절 그의 선조들이 로마인의 계속되는 침략을 막아내며 자유와 독립을 수호했던 것처럼 그들도 14세기 전후 최고의 위기를 막아냈습니다. 사실 독립전쟁이라고는 하지만 스코틀랜드가 공식적으로 잉글랜드의 식민지 생활을 한 적은 없으니 일제 식민지 하에 있었던 우리의 독립과는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그때부터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각자도생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물론 간헐적인 충돌은 있었으나 그것이 국가의 근간을 흔들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한 섬에 사는 그들이 어느 정도로 다른 길을 갔느냐 하면 그것은 두 나라의 종교를 봐도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잉글랜드는 1534년 헨리 8세가 아라곤의 캐더린 왕비와 이혼하기 위해 수장령을 발동하며 영국 국교회를 출범시켰습니다.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는 1560년 칼뱅의 제자인 종교개혁가 존 녹스가 주창한 스코틀랜드 국교회를 출범시켰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교세가 큰 성공회와 장로교의 시작입니다.


잉글랜드는 헨리 8세 이후 남매왕들이 바뀔 때마다 카톨릭 교도들과 성공회 교도들이 피를 뿌리는 유혈 참사를 반복했습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는 그들이 무엇을 믿든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잉글랜드의 외국이었으니까요. 그 와중에 오히려 독자적으로 새로운 개신교인 장로교를 세웠습니다. 자국의 종교를 믿게 하기 위해 전쟁까지 벌이는 마당에 두 나라는 그 정도로 독립된 국가로 가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1517년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격문을 발표하며 일어난 종교 개혁으로 개신교가 유럽을 휩쓸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렇게 철도처럼 평행선을 그으며 가던 두 나라는 어느 시점에 한 선으로 만나게 됩니다. 살아 움직이는 유기기체와도 같은 역사의 변곡점이 생겨서였습니다. 처녀왕이었던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가 죽으면서 이슈가 생긴 것입니다. 그녀가 아이를 낳지 않고 죽자 그녀의 할아버지인 헨리 7세부터 이어온 튜더 왕조가 끊어졌습니다. 잉글랜드의 입장에선 큰일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튜더 왕조의 피(blood)가 한 방울이라도 섞여있는 왕족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스코틀랜드에 그 씨가 있었습니다. 헨리 8세의 누나인 마거릿 튜더의 증손자였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인 헨리 7세의 뜻에 따라 정략결혼으로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에게 시집을 갔는데 그 피가 이어진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1세와 대립했던 조카 메리 여왕의 아들입니다. 그렇게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의 런던으로 입성을 했습니다. 그리고 잉글랜드에서는 제임스 1세가 되며 스튜어트 왕조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1603년 그때부터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1왕 2국가 체제로 갑니다. 이러한 체제를 동군연합(同君聯合, Personal union)이라 부릅니다. 어떻게 하든 왕실 가문이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인적 연합을 통해서라도 살리려는 것입니다. 왕족에겐 그 피가 아무 상관도 없는 남의 나라 왕을 데려와 자기 나라 왕으로 섬길 정도로 그렇게 중요했었나 봅니다. 우리로 치면 상상이지만 역사의 구도상 일본이나 중국 왕가의 씨가 끊어졌을 때 조선 왕에게 시집보낸 그들 공주의 피가 조금이라도 있는 조선의 현직 임금을 양국의 왕으로 겸직하게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날 영국의 윈저 왕가도 만약 훗날에 그들의 후사가 없어지면 가출해서 외국에 살고 있는 해리 왕자의 자손을 찾게 될지 모릅니다. 


좌로부터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왕실 문장. 방패 안에 각각 한 마리와 세 마리의 사자가 들어있음.


동군연합 체제 하에서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 또는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는 두 나라의 의회를 모두 상대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스코틀랜드의 왕은 더 큰 나라인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래서 역사는 재미있습니다.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 재밌고 놀라운 것은 잉글랜드의 그 스튜어트 왕조의 시조가 스코틀랜드의 왕가이고 그 선조가 잉글랜드와 원한이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위의 로버트 더 브루스, 바로 로버트 1세의 외손자인 로버트 2세가 스튜어트 왕조의 시조이기 때문입니다. 잉글랜드가 죽이고자 했던 독립 영웅 손자의 후손이 잉글랜드의 왕이 되고 그의 자손들이 계속해서 왕위를 이어간 것입니다. 로버트 1세라면 런던에 입성할 때 윌리엄 월레스처럼 반란의 수괴로 오랏줄에 묶여 압송이 되었을 텐데 그의 후손 제임스 6세는 꽃가마를 타고 왕이 되어서 온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왕가는 로버트 2세가 즉위한 1371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603년부터 시작된 잉글랜드의 스튜어트보다 232년이나 먼저 시작된 것입니다.


1707년 함께 손잡고 동행하던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결국 한 나라로 합치게 됩니다. 역시 공동 여왕이었던 앤 여왕 재직 시 두 나라 의회가 연합법을 통과시키면서 한 나라가 된 것입니다. GB,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탄생입니다. 서로 번거로움이 많아 그럴 만도 했을 것입니다. 군주제를 유지하는 한 효율성을 따져보아도 1국가 1의회로 가는 것이 나았을 테니까요. 영토도 붙어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두 나라의 의회는 해산하고 의석 수를 조정해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단일 의회가 되었습니다. 어제의 적으로 칼을 겨누기도 했던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한 나라가 된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통합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문장. 스코틀랜드 버전으로 국기와 국가 슬로건이 들어가 있음.


국기도 스코틀랜드의 성 앤드루기와 잉글랜드의 성 조지기기를 1대 1로 합쳐 GB의 국기가 만들어졌습니다. 오늘날 UK의 국기인 유니언 잭의 원형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후 GB는 1801년 아일랜드까지 통합하여 UK, 유나이티드킹덤이 되었습니다. 세계의 절반을 지배한 대영 제국(British Empire)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후 아일랜드는 20세기 들어 독립하고 영국엔 북아일랜드만 남게 되었습니다. 웨일스는 헨리 8세 때 완전하게 복속이 되어 독립 국가가 아닌 공국의 지위로 일찍이 잉글랜드에 편입된 나라였습니다. GB라는 국명은 아직도 살아 있어서 올림픽의 경우 영국은 UK가 아닌 GB(올림픽 코드 GBR)로 출전을 합니다. 여기에 얽힌 사연은 일전에 이곳에 쓴 <올림픽 때만 보이는 나라 GB>에 자세한 내용이 있습니다.  


1707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통합으로 탄생한 그레이트브리튼(GB) 왕국의 국기. 미완성의 유니언 잭


보듯이 스코틀랜드는 역사상 많은 위협과 위기가 있었음에도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자유와 독립을 유지해 왔습니다. 그들의 땅을 탐낸 고대 세계 최강 로마 제국의 450년에 걸친 침략을 견디었으며 중세 신흥 강국으로 떠오른 잉글랜드의 침입도 의연하게 막아내 동등한 지위를 얻어냈습니다. 사는 곳은 험준하고 뒤로는 바다가 가로막아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의 자세로 살아왔을 것입니다. 한가롭게 살 여유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의 국화는 그 옛날 로마인들이 그들을 칭했던 칼레도니아를 닮은 모양새인 거칠고 질긴 엉겅퀴입니다. 반면에 잉글랜드의 국화는 화사하고 향기로운 장미입니다. 스코츠맨은 쓰고 독한 스카치 위스키를 마십니다. 반면에 잉글리시맨은 시원하고 페스티브한 맥주를 마십니다. 


새옹지마(塞翁之馬), 고대 브리튼섬의 원주인이었음에도 살기 힘든 북쪽으로 쫓겨간 그들의 선조 켈트족의 고난은 오늘날 후손들이 보상을 받고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바다인 북해에서 석유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척박한 그 땅에 금은 없지만 바다엔 금이 있었습니다. 물론 2천 년 전 켈트족이 살던 때에도 묻혀있었을 것입니다. 현재 스코틀랜드는 EU 국가들을 통틀어 최대 산유국입니다. 에든버러 북쪽에 위치한 에버딘은 유럽의 석유 수도라 불립니다. 그런 경제력은 스코츠맨을 이젠 좀 여유롭게 만들 것입니다. 크기는 영국 전체의 1/3이고 인구는 1/10도 안 되지만 옛날에도 그랬고 오늘날에도 그들을 무시할 수 이유입니다. 스코틀랜드는 UK 중앙정부와는 달리 브렉시트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에든버러성 앞 아름다운 로열마일. 멀리 북해가 보임. (2024. 7)


스코틀랜드는 1707년 연합법으로 GB가 되며 문을 닫았던 의회를 1998년 다시 열었습니다. 2014년엔 UK에서 분리독립하는 투표를 실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땐 55대 45로 부결되었습니다. 요즘은 코로나와 우크라이나 사태로 잠잠해졌지만 당시 유럽엔 분리독립의 바람이 불던 때였습니다. 대표적으로 스페인의 카탈루냐주는 2017년 주민의 90% 이상이 찬성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카탈루냐는 스페인의 영토이기에 독립은 불법으로 간주되어 중앙 정부가 제제할 권한이 있습니다. 반면에 스코틀랜드는 역사에서 보듯이 서로의 이해관계에 의해 부부처럼 하나가 된 것이기에 싫거나 불편하면 언제든 이혼이 가능합니다. 과거 역사에서 본 것처럼 그들의 자유와 독립이 침해받는다면, 그리고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의 이익에 심각하게 반하는 일이 생긴다면 스코틀랜드는 다시 독립국가의 길을 선택할지 모릅니다.


에든버러 성문 위에 있는 스코틀랜드의 왕실 문장과 슬로건


에든버러성 앞에서 그 문 좌우에 서있는 로버트 1세와 윌리엄 월레스를 바라보며 그들이 이뤄낸 스코틀랜드의 자유와 독립에 대해 생각하고 쓰는 글입니다. 그들 위로는 스코틀랜드 왕실의 문장과 라틴어로 쓰인 슬로건이 새겨져 있습니다. "Nemo me impune lacessit", 구글이 알려준 영어로는 "No one has beaten me with impunity", 즉 "스코틀랜드를 괴롭히는 자들은 누구든 처벌을 받으리라"입니다. 장구한 역사 속에서 아무도 그들을 굴복시키지 못한 이유일 것입니다. 이 슬로건은 위에서도 보이듯이 GB, UK 연합 왕국의 스코틀랜드 왕실 문장에서도 보입니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윌리엄 월레스가 처형을 당하며 그의 가슴에서 산 채로 그 브레이브 하트가 꺼내지기 전 마지막으로 외친 말은 'Freedom!'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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