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보다 큰 가문 합스부르크

합스부르크와 <황후 엘리자베트>

by 마하

합스부르크의 쌍두독수리


1856년 오스트리아제국의 황궁에선 그들이 지배하는 국가나 도시들을 초청해 커다란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제국의 수도 비엔나에 있는 호프부르크 왕궁에서 펼쳐진 행사였습니다. 그 연회는 오스트리아의 식민지들이 황제에게 변함없는 충성을 맹세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절단이 모인 가운데 돌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에서 온 사절단 중 한 청년이 황제에게 인사 중 베네치아의 독립을 달라고 외치며 잘라진 소의 혀를 그 앞에 내던진 것입니다. 괴기스러운 소의 혀를 던진 것은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 없는 식민지의 고통을 퍼포먼스로 표출한 것입니다. 연회장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당연히 체포가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청년은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그가 죽음까지 불사하며 독립을 요청한 오스트리아의 황제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프란츠 요제프 1세였습니다. 실제 역사적으로 연회 중에 저런 돌발 행동까지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장면이 넷플릭스가 2022년부터 제작하기 시작한 창작물인 <황후 엘리자베트(The Empress)> 드라마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시즌 2까지 나왔습니다. 물론 황후인 엘리자베트는 당시 황제 옆에 함께 있었습니다.


위의 연회장 장면에서는 황제와 황후 뒤로 찬란한 문장이 하나 보였는데 그것은 머리가 좌우로 두 개 달린 독수리였습니다. 쌍두독수리, 오스트리아제국의 문장입니다. 오스트리아제국이 그 쌍두독수리를 품은 것은 그것이 고대 유럽을 지배한 로마제국에서 시작된 독수리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는 하늘 위에서 먹이를 사냥하는 최강의 포식자인 독수리를 제국의 문장으로 채택했습니다. 로마인은 용맹 위엄 권력을 상징하는 그 독수리를 아퀼라(Aquila)라고 불렀습니다.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로마 군단이 맨 앞에 들고 가는 군기의 표식입니다. 그 독수리 아래 함께 보이는 라틴어 'SPQR'(Senatus Populusque Romanus)은 의회와 민중의 나라 로마를 나타냅니다. 공화국을 표방한 것인데 실제 로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후 왕정으로 돌아섰습니다.


오스트리아제국 황제 부부가 식민지의 사절단을 맞는 연회 모습 (넷플릭스 '황후 엘리자베트')


합스부르크의 신성로마제국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제국이 있습니다. 그 제국은 476년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유럽의 서방엔 동로마제국과 같은 강력한 기독교 제국이 없음을 안타까워한 교황이 만들어 준 국가였습니다. 500년의 긴 기다림 끝에 그 일을 해낼 적임자가 나타났습니다. 동프랑크 왕국의 오토 대제였습니다. 오토 대제는 동프랑크 왕국의 영토를 동서남북으로 확장하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깊은 신심으로 기독교를 수호했습니다. 962년 교황 요한 12세는 그에게 로마 황제의 왕관을 씌워주었습니다. 신을 대리하는 태양의 권력이 그가 지정한 최고의 세속 군주에게 달의 권력을 선사한 것입니다. 고대 로마제국을 잇는 신성로마제국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과거 로마제국을 상징했던 독수리는 신성로마제국의 문장으로 승계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독수리의 머리가 하나에서 두 개로 바뀌었습니다. 로마가 동서로 갈라졌기에 양쪽을 모두 지배한다는 의미로 늘어난 것입니다. 두 개의 머리에 있는 네 개의 눈으로 창공에서 동서남북을 다 볼 수 있는 쌍두독수리입니다. 사실 그 쌍두독수리는 동로마제국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 제국이야말로 오리지널 로마의 DNA를 가진 제국이었으니까요. 동로마제국은 1453년 멸망되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은 그보다 353년을 더 갔습니다. 종말로만 보면 신성로마제국의 독수리가 동로마제국의 독수리를 이긴 것입니다.


그런데 신성로마제국의 독수리가 어떻게 오스트리아제국의 독수리가 되었을까요? 일단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세습직이 아닌 선출직이었습니다. 투표권이 있는 선제후와 주교들이 모여 투표로 황제를 선출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기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의 사람들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이 아니라 연이어서 선출되었습니다. 그만큼 가문의 파워가 세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과거 메디치 가문에서 형제 교황을 줄줄이 배출했듯이 말입니다. 그러면서 위의 신성로마제국의 문장인 쌍두독수리는 자연스럽게 합스부르크 가문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가문의 힘과 용기를 상징하는 표식이 된 것입니다. 신성로마제국이 곧 합스부르크였으니까요.


합스부르크를 가슴에 품고 있는 쌍두독수리 - 바탕은 오스트리아제국기, 쌍두독수리는 제국의 문장, 그 안 방패는 가문의 문장


1806년 나폴레옹은 유럽을 뒤흔든 전쟁을 일으키며 신성로마제국을 해체시켰습니다. 844년간 이어온 그 제국을 역사에서 사라지게 한 것입니다. 프랑스가 그 제국의 일원도 아니고, 종교개혁도 일어났고, 교황의 힘이 전만 못한 상태라 나폴레옹의 눈에 비친 신성로마제국은 이상한 제국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도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제국으로 이어졌기에 신성로마제국의 쌍두독수리는 그 가문과 함께 새 제국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때부턴 오스트리아제국이 곧 합스부르크였으니까요. 그 쌍두독수리는 이후 또 한 번 제국의 운명이 바뀌어도 합스부르크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운명을 함께 합니다.


합스부르크의 등장과 확장


합스부르크 가문이 처음부터 그렇게 막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스위스 취리히 근교 아루가우 지역의 시골 백작 가문이 어찌하다 보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며 그때부터 힘을 키워 거대한 왕가를 이루고 제국을 형성한 것입니다. 합스부르크라는 가문명은 본래 그들이 살던 성의 이름이었습니다. 11세기 초 그 가문의 시조라 할 수 있는 라트보트 백작이 축조한 조그만 성의 이름입니다. 지금도 그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1273년 그 가문의 루돌프 백작이 신성로마제국의 루돌프 1세 황제로 선출되며 가문의 운명이 달라졌습니다. 절대로 황제로 선출될 급이 아니었는데 유력 선제후들이 서로 견제하느라 약한 가문의 사람을 황제로 앉힌 것입니다. 일종의 바지 사장으로 뽑힌 그였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발상지 스위스의 합스부르크 성


그런데 사람을 잘못 보았습니다. 루돌프 1세는 오스트리아까지 영지를 확대하며 합스부르크 가문을 단번에 중부 유럽의 신흥 강자로 떠오르게 했습니다. 이후 비엔나는 신성로마제국의 수도가 되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성이 되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이 망해도 오스트리아제국의 수도로 합스부르크와 600년을 함께 한 것입니다. 사실 합스부르크의 고향인 아르가우와 그곳의 성은 스위스의 다른 세력에 의해 점령이 되어 돌아가기가 난망한 상태였습니다. 이렇듯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국을 이루는 모습은 마치 일본 전국시대의 도쿠가와 가문을 보는 듯합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와도 같은 도쿠가와 가문의 이에야스는 나고야 근교 조그만 오카자키성에서 태어나 주변의 힘센 오다와 이마가와 가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가 오늘날 에도로 옮겨 가 1603년 막부를 세우고 쇼군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문이 264년간 일본을 다스렸습니다.


과거 유럽에서 영토를 늘리는 방법으로는 다수의 무력을 통한 방법과 소수의 동맹을 활용한 방법이 사용되었습니다. 다수의 무력은 전쟁이고 소수의 동맹은 결혼을 말합니다. 전쟁을 통한 영토확장은 어느 대륙이든, 나라이든, 그리고 과거나 현재나 마찬가지로 사용되고 있는 방법입니다. 요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단지 두 사람의 남녀가 결혼을 한다고 해서 영토가 달라지는 것은 과거 유럽의 왕정 시대에서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얘기는 당시 국가의 주인은 왕이나 황제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전쟁보다는 후자인 결혼을 통해서 그들의 영토를 확장해 갔습니다. 결혼을 하고, 또 결혼을 해가면서 비엔나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뻗어나간 것입니다. 결국 합스부르크 가문은 그들을 둘러싼 신성로마제국보다도 큰 영토를 갖게 되었습니다. 제국보다 큰 가문의 영토였습니다.


합스부르크의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가장 성공적인 결혼 동맹은 스페인 왕가와 이루어진 결혼이었습니다. 1492년 스페인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마지막 남은 이슬람 국가인 그라나다왕국을 몰아내고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이 또한 결혼 동맹이 만들어준 결과였습니다. 이베리아 반도 내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의 결혼으로 이뤄낸 통일이었으니까요. 유럽의 서쪽에서 스페인 시대가 개막된 것입니다. 결혼으로 성공한 그들 부부는 자녀들도 유럽의 왕가들과 활발하게 맺어줬습니다. 오빠와 언니들의 죽음으로 스페인의 최종 상속자가 된 후아나 여왕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필리프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필리프는 오늘날 프랑스 일부와 베네룩스 지역의 공작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이 그 지역 부르고뉴의 상속녀인 마리와 결혼을 했기 때문입니다. 후아나와 필리프의 결혼으로 서진을 해오던 합스부르크는 이제 스페인까지 연결이 되었습니다. 아라곤의 캐서린으로 불리는 후아나의 동생은 잉글랜드로 시집을 가 첫 남편은 죽고 그의 동생인 헨리 8세와 다시 결혼을 해서 소박을 맞았는데 후아나의 팔자는 그렇게 다르게 전개된 것입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필리프와 스페인의 후아나 사이에서 태어난 카를 5세는 거의 유럽 절반을 다스리는 대륙의 지배자가 됩니다. 그의 할머니인 이사벨 여왕이 이탈리안인 콜럼버스에게 투자해 1492년 신대륙까지 발견한 상태라 합스부르크 가문에 편입된 카를 5세는 신대륙까지 그 가문의 영역을 넓혔습니다. 합스부르크 대제국을 건설한 것입니다. 그는 모국 스페인에선 카를로스 1세로 불립니다. 합스부르크 역사상 최대 영역을 다스린 카를 5세는 37년간(1519~1556)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재위했습니다. 스페인은 그 이전부터 40년간(1516~1556) 다스렸습니다. 그의 아들인 펠리페 2세는 1571년 신성로마제국의 동맹으로 참전한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제국에 대승을 거둬 스페인의 전성시대를 이끌었습니다. 유럽의 최강자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스페인'이라 불린 시대였습니다. 1588년 그들의 무적함대가 영국에게 격파당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카를 5세 재위 시 1544년 합스부르크 가문의 최대 영토 (진한 그린 컬러)


합스부르크 가문이 스페인에서 왕가를 이루던 시대를 가리켜 압스부르고 왕조라 부릅니다. 합스부르크의 스페인어입니다. 이렇게 유럽의 서쪽 시대를 풍미했던 합스부르크의 스페인 시대는 1700년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죽으며 끝이 납니다. 그의 죽음과 무자식의 원인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유전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반복되는 근친혼으로 합스부르크 하면 떠오르는 외모인 주걱턱과 함께 건강 이상으로 죽은 것입니다. 유럽 거의 모든 왕가와 결혼하고 왕가만 찾던 합스부르크였으니 자녀 결혼 시 합스부르크 아닌 신랑과 신부를 찾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18세기가 밝으며 합스부르크의 시계는 스페인에서 다시 그들의 본성인 비엔나로 돌아갑니다. 합스부르크가 자연스러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시대입니다.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결혼 동맹은 지역과 방향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체코, 헝가리와도 결혼으로 그 지역을 합스부르크로 편입시킨 것입니다. 구 유고연방 지역도 정치적인 이득으로 그들의 영토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헝가리의 경우는 이렇게 맺은 동맹으로 19세기 후반 연합제국을 세우는 단초가 됩니다. 하지만 18세기 들어 오스트리아제국의 합스부르크는 전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1748)이 일어난 것입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한 오스트리아의 카를 6세가 아들이 없어 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는데 그것이 못마땅한 주변국이 일으킨 전쟁입니다. 그런데 프로이센왕국이 반대해 일으킨 이 전쟁에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참전을 하였습니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으로 나뉘어 전쟁을 벌인 것입니다.


전쟁은 이런 것입니다. 전쟁의 당사자가 아님에도 각각의 동맹국들이 서로의 이익을 계산하며 이어서 줄줄이 참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후 떡고물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다른 나라에서 여자가 왕이 되든 말든 전쟁까지 일으키며 참전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영국에선 훨씬 이전인 1553년에 헨리 8세의 딸인 메리 1세가 여왕으로 즉위했으니까요. 결과적으로 상처뿐인 이 전쟁에 합스부르크 가문은 필사적으로 대응했습니다. 가문의 운명을 걸고서 싸운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왕위에 오른 여왕이 마리아 테레지아입니다. 하지만 그 전쟁으로 오스트리아는 전엔 만만하게 보던 새로운 적과 대치하게 됩니다. 프로이센 왕국의 출현입니다. 계몽군주라 불리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의 슐레지엔 지역을 빼앗아 갔습니다. 프로이센왕국은 신성로마제국의 일원이었던 브란덴부르크공국이 제국 밖의 프로이센과 합병하며 1701년에 세운 나라입니다. 독일이 통일의 눈을 뜨기 시작한 것입니다. 프로이센과 독일 통일에 대한 글은 이곳에 최근에 쓴 <독일 통일의 성지 브란덴부르크>에 비교적 소상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1806년 신성로마제국을 해체시켰다고 했습니다. 전황을 예견한 신성로마제국의 프란츠 2세는 그 2년 전인 1804년 오스트리아제국을 출범시켰습니다. 그런데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피해 보는 이 상황에서 가장 밝게 빛났습니다. 전후 유럽의 새판을 짜는 일을 주도했기 때문입니다. 1814년부터 1년간 비엔나에선 전 유럽의 전쟁 피해국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습니다. 비엔나(빈) 체제라 불리는 회의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일개 외상인 메테르니히의 부름에 유럽의 크고 작은 95개국의 대표들이 그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비엔나는 외지에서 온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전 유럽에서 2만명의 창녀들까지 모여들었다고 하니까요. 아마도 역사상 비엔나가 이렇게 각광을 받은 것은 처음일 것입니다. 그래서 비엔나 체제는 최초의 국제회의로 평가를 받습니다. 그곳에 온 참가단은 비엔나를 보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위용을 느꼈을 것입니다. 국제회의 유치의 보너스 효과입니다.


비엔나 체제의 회의 모습. 왼편 서있는 사람이 메테르니히 (1814~1815)


합스부르크의 위기


오스트리아제국은 그 회의에서 전리품으로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에서 베네치아를 잇는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을 챙겼습니다. 오늘날 크로아티아인 달마티아 지방과 라구사공국도 그들의 영토에 편입시켰습니다. 모두가 나폴레옹의 정복지였습니다.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을 대체하는 독일연방의 의장국이 되었습니다. 동쪽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 서쪽의 스페인 합스부르크 전성기 때처럼 빛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1848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2월혁명의 여파로 그 영화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온 유럽에 혁명의 파도가 몰아쳤습니다. 비엔나 체제에서 결의한 나폴레옹 이전 절대왕정 시대로의 복귀에 온 유럽의 민중들이 반발한 것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식민지가 된 롬바르디아-베네치아왕국도 그랬지만 오스트리아 내부에서도 그 해 3월에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이 글 인트로 넷플릭스의 <황후 엘리자베트>는 복잡한 그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의 총독이 라데츠키 장군이었습니다. 왈츠의 왕 요한슈트라우스 1세는 라데츠키가 이탈리아 북부 독립을 지원한 사르데냐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 그에게 헌사하는 승전곡인 <라데츠키> 행진곡을 작곡했습니다. 그 이전 롬바르디아 지역의 음악가 베르디는 그들의 식민지 상황을 구약에 비유한 오페라 <나부코>를 작곡했습니다. 예술엔 국경이 없다지만 요한 슈트라우스와 베르디는 서로 국경선 반대 편에 있었습니다.


<황후 엘리자베트>에서 베네치아 독립을 외치다 죽은 청년은 그런 배경에서 순국한 것입니다. 드라마에선 1856년 연회에서 일어난 일로 처리했으니 결국 베네치아는 10년 후인 1866년 독립을 맞게 됩니다. 베르디가 활동한 밀라노 중심의 롬바르디아는 그 전인 1859년 먼저 독립을 했습니다. 이탈리아는 결국 1871년 로마까지 수복하여 완전한 통일 왕국을 이루게 됩니다. 드라마에서도 보이듯이 이렇게 오스트리아의 위기는 가속화되고 있었습니다. 더 큰 위기는 앞에서 언급한 프로이센의 발흥입니다.


비엔나 체제 후 오스트리아제국의 확장된 영토. 진한 그린 컬러는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식민왕국


합스부르크와 갈라선 독일


결국 프로이센왕국은 비스마르크 수상의 영도 하에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1871년 독일제국으로 문패를 바꿔 달았습니다. 더 거대해진 것입니다. 그 바로 전인 1866년엔 독일연방의 의장국인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했습니다. 독일연방에서 오스트리아를 퇴출시킨 것입니다. 독일제국의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를 제외시킨 이 소독일주의로 통일의 방향을 정했습니다. 바야흐로 중부유럽에서 합스부르크가 쇠퇴하고 독일이 떠오르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는 독일제국에 맞서 1867년 그들이 통치하던 헝가리와 손을 잡고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을 출범시켰습니다. 헝가리인의 자치권을 대폭 개선해주는 대타협(Ausgleich)이 만들어낸 연합국이었습니다. 물론 헝가리의 왕은 오스트리아 황제가 맡는 동군연합 형태의 제국이었습니다. 이 제국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마지막 왕조입니다. 이때도 제국의 영토는 헝가리, 체코와 세르비아를 제외한 구 유고연방이 포함된 상당히 넓은 지역이었습니다.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1914년 황위 계승자인 황제의 조카가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의 청년에게 암살을 당하면서 사망의 길로 가게 됩니다. 그 사건으로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전쟁은 걷잡을 수 없이 동맹국들이 참전하며 1차 세계대전으로 확전이 되었습니다.


68년간을 재위하며 합스부르크의 종말을 목도한 프란츠 요제프 1세 (1830~1916)


합스부르크의 종말


결국 패전국이 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1918년 해체되었습니다. 그리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도 끝이 났습니다. 1273년부터 1918년까지 645년 동안 장구한 세월을 이어온 한 가문의 역사가 마감된 것입니다. 늙고 쇠약해진 쌍두독수리의 네 눈은 모두 감겼고 두 날개는 꺾여 부러졌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해체되어 각각 왕이 없는 공화국이 되었으며 합스부르크의 재산은 모두 국가가 몰수하였습니다. 몰락한 왕조의 수순대로 이행된 것입니다. 마지막 황제 카를 1세는 스위스로 망명했지만 왕정복고를 노리다 아프리카 서부의 포르투갈 영토인 마데이라섬으로 온 가족이 추방되었습니다. 축구 스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고향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황제 카를 1세의 재위 기간은 1차 세계대전 중인 2년에 불과했습니다. 통치력을 행사한 진정한 합스부르크의 황제라고 하기엔 모자람이 있는 운 없는 황제였습니다. 실질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마지막 황제라 할 수 있는 이는 그의 선왕인 프란츠 요제프 1세입니다. 그는 카를 1세의 작은할아버지로 1848년 즉위하여 1916년까지 68년간 합스부르크의 황제 자리에 있었습니다. 재위 시 오스트리아제국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을 출범시킨 황제입니다. 그렇듯 그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유럽에서 일어난 격동의 현장을 모두 목도한 시대의 증인입니다. 위의 <황후 엘리자베트> 드라마에 나오는 바로 그 황제입니다.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베트의 결혼 (1854) (넷플릭스 '황후 엘리자베트')


황후 엘리자베트와 합스부르크


드라마는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베트 황후의 결혼 이야기부터 시작됩니다. 젠틀하고 핸썸한 황제는 여리여리한 순정남으로 나옵니다. 시시(Sisi)라는 애칭으로 불린 엘리자베트 황후가 드라마의 주인공이지만 배우자인 황제의 역할과 분량도 꽤나 크고 많습니다. 그렇게 종말을 향해가는 오스트리아제국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사를 다룬 것입니다. 특히 주변국들과의 갈등을 보여주는 시즌 2에선 더욱 그렇습니다. 시즌 2의 마지막 장면은 프란츠 요제프 1세가 북부 이탈리아 전선의 병사들을 위로하고 지휘하기 위해 떠나는 장면으로 끝을 맺습니다.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의 독립을 막기 위해 황제가 직접 참전하는 것입니다.


드라마에선 내내 황제도 그렇고 모후도 그렇고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합스부르크, 합스부르크를 외쳐댑니다. 합스부르크를 위하여 그 일을 하고, 전쟁을 하고, 식민지를 수탈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원치 않는 일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날까지 온 가문의 생존룰일 테니 실제로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신성로마제국이 사라진 상태에서 합스부르크는 곧 오스트리아제국이었니까요. 그리고 다가올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일 테니까요. 시즌 2에서 정지된 이 드라마의 시즌 3이 나올지는 모르겠습니다. 합스부르크의 이야기는 아직 더 많이 남아 있으니 말입니다.


<황후 엘리자베트>에서 독일 바이에른 공작의 딸인 엘리자베트는 좀 다른 인물로 나옵니다. 한마디로 그녀는 합스부르크의 사람들과는 달리 따뜻한 여인입니다. 그래서 민중들로부터 인기가 좋았습니다. 드라마에선 그녀와 황제 앞에서 독립을 달라고 외친 베네치아 청년의 집을 직접 방문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공장 방문 시 열악한 시설에서 일하는 맨발의 어린 소녀를 보고는 그녀의 신발을 벗어주기까지 합니다. 게다가 엘리자베트 황후는 당대 유럽 왕실 최고의 미녀라 인기와 함께 화제도 만발했습니다. 영국 윈저 왕가의 왕비가 될 뻔했던 다이애나 스펜서와 같은 셀럽으로 인기를 누린 그녀였습니다.


엘리자베트 황후의 초상화와 사진 속 모습 (1837~1898)


그래서 엘리자베트 시시의 화제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소설로도, 영화와 드라마로도, 뮤지컬로도 환생하고 있는 엘리자베트이니까요. 하지만 이번 넷플릭스의 드라마에선 몰입에 방해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녀는 173cm의 키에 50kg을 넘지 않는 체중과 20인치를 넘지 않는 허리를 유지했다고 하니까요. 미인박명이라고 이렇게 아름다운 그녀는 암살을 당했습니다. 1898년 제네바의 호숫가에서 이탈리아의 무정부주의자 청년에게 칼로 심장을 찔렸습니다. 61세의 나이였습니다. 그녀 사망 20년 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사라졌습니다. 물론 쌍두독수리도 날아갔습니다. 합스부르크라는 오페라의 피날레를 장식한 것과도 같은 엘리자베트 시시의 삶이었습니다.


* 현재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문장은 머리가 하나뿐인 독수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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