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교회집교회.. 요한 세바스찬 바흐

라이프치히의 수호성인 바흐

by 마하

비엔나와 잘츠부르크 중간 지점엔 린츠라는 예쁜 이름의 도시가 있습니다. 잘츠부르크가 모차르트의 도시이듯이 린츠는 교회음악으로 유명한 브루크너의 도시입니다. 린츠에서 태어난 브루크너는 19세기 중후반 린츠 대성당에서 10년 넘게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하며 이름을 날렸습니다. 당시 그는 유럽에서 오르간을 가장 잘 연주하는 음악가였습니다. 그것은 각종 콘테스트를 통해서도 입증된 실력이었습니다.


비엔나와 린츠 중간 지점엔 아름다운 멜크 수도원이 있습니다. 도나우강의 지류가 내려다 보이는 강가 언덕에 우뚝 서 그 아래 중세 마을을 내려다보는 그 수도원은 웅장함으로 인해 수도원보다는 성채처럼 보입니다. 게다가 화사한 노란색의 건축물이라 멜크 수도원은 마치 수도 비엔나의 쇤부른 궁전처럼 합스부르크 왕가의 화려한 별궁으로도 보입니다. 그곳에 서니 테임즈강과 이튼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영국의 윈저성이 떠올랐습니다.


수도원은 수도를 하는 수도사의 집이자 일터입니다. 그들은 청빈과 금욕, 기도와 예배, 독서와 필사, 그리고 자급자족에 필요한 농사와 축산 등 각종 일을 하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외부 활동으로 지역 주민을 위한 선교, 구휼, 의료 활동 등을 하였습니다. 멜크 수도원처럼 아무리 웅장하고 화려해도 그 안 수도사의 생활은 이렇게 빈한하고 단조롭기 그지없었습니다. 물론 결혼도 할 수 없으니 사명감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중세 천년의 세월을 매일 공부와 연구를 하며 기독교의 보급과 교리의 발전에 기여를 한 수도사였습니다. 그 결과 멜크 수도원엔 수도사들이 수집해서 읽고, 그들이 직접 필사로 채운 10만여권의 장서가 빼곡히 꽂혀 있습니다. 직접 보면 입이 딱 벌어지는 고전영화 속의 고색창연한 도서관입니다. 멜크 수도원이 움베르코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으로>의 배경으로 종종 언급되는 것은 바로 이 엄청난 도서관 때문입니다.


1089년 세워진 멜크 수도원. 18세가 바로크 양식의 현재 모습으로 재건됨.


그런 수도원의 수도사와도 같은 삶을 산 음악의 대가가 있습니다. 인트로에 언급한 브루크너는 아닙니다. 그는 린츠의 대성당에서 13년을 보내고 뛰쳐나가 화려한 비엔나로 진출했으니까요. 하지만 브루크너와 그 음악가는 많은 부분에서 닮았습니다. 교회음악과 오르간이 교집합입니다. 당연히 매우 신앙심이 깊었습니다. 그들이 페달을 밝은 오르간은 교회에서 연주되는 악기였으니까요. 당시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은 교회 아니면 연주될 수 없는 악기였습니다. 그 둘이 한 시대에 만나 오르간 콘테스트를 벌였다면 누가 이겼을지 궁금합니다.


브루크너는 100년 선배인 그 롤모델이 집대성한 고전적인 대위법에 낭만주의의 대가 바그너의 혁신적인 화성법을 더해 클래식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브루크너는 바그너와 가까웠던 이유로 나치주의자로 여겨져 호된 곤욕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히틀러는 바그너 다음으로 브루크너를 좋아했습니다. 그가 히틀러가 성장한 린츠 출신이기도 해서였습니다.


수도사와 같은 삶을 산 음악가, 그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Johann Sebastian Bach)입니다. 그는 그때까지는 비어있던 음악의 구성 요소들을 모두 채워 오늘날 우리가 듣는 번듯한 클래식을 완성했습니다. 음악의 ABC와 문법을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음악의 아버지로 칭송합니다. 그가 그렇게 크고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롯이 음악만을 위한 삶을 살았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당시 바흐가 수도원처럼 생활했던 곳은 그의 조국 독일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교회였습니다. 전 이제 멜크를 떠나 그를 만나러 갑니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 (1685~1750)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바이마르, 예나, 비텐베르크, 마이센 등 옛 동독의 도시들은 과거 제겐 서독의 도시들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었습니다. 어린 시절 지도책을 펼쳐 볼 때부터 공산주의의 장벽으로 갈 수 없는 도시들로 여겨져서 그런 듯싶습니다. 장막에 가려진 비경의 도시들, 하지만 그 도시들은 역사적으로 문학과 예술 분야에선 서쪽의 도시들보다 높은 내공을 보여주었습니다. 음악으로는 바흐, 헨델, 바그너, 슈만과 그의 부인 클라라가 그 지역에서 태어났고, 대문호 괴테는 바이마르에서 공직 생활과 작품 활동을 하며 평생을 보냈습니다. 니체도 라이프치히 근교에서 태어나 그 대학에서 수학했습니다. 독일을 대표하는 화가인 아돌프 멘첼과 캐스퍼 프리드리히의 주 활동 무대도 옛 동독이었습니다. 그리고 드레스덴 근교 마이센은 유럽에서 도자기가 처음으로 태어난 곳입니다.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는 가까운 베를린과 함께 독일에서는 물론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정상급 오케스트라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서도 라이프치히는 특히 음악적인 유산이 많은 도시입니다. 이 글의 주인공 바흐가 활동했고 바그너와 클라라 슈만이 태어난 도시입니다. 멘델스존도 그의 전성기는 라이프치히에서 보냈습니다. 라이프치히 오케스트라인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지휘봉을 12년 동안이나 잡았습니다. 그 오케스트라는 바흐의 유산으로 1781년 창단된 매우 유서 깊은 오케스트라입니다. 게반트하우스는 섬유회관이란 뜻으로 라이프치히 오케스트라가 그곳에서 창단되어 붙은 이름입니다. 멘델스존은 뒤에 다시 등장합니다.


라이프치히를 대표하는 음악가는 누가 뭐래도 바흐일 것입니다. 그곳이 바그너의 고향이라지만 그는 라이프치히 대학 졸업 후엔 그 도시를 떠나 와일드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바흐는 라이프치히에서 200km 떨어진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났지만 바이마르와 쾨텐을 거쳐 라이프치히에 영구적으로 정착했습니다. 그의 나이 38세인 1723년, 그때부터 그는 27년간 내내 그 도시의 성토마스교회에서 재직하며 일생을 보냈습니다. 바흐와 함께 바로크 음악의 거장으로 언급되는 헨델도 라이프치히와 불과 40km 떨어진 할레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그는 라이프치히와는 아무 인연이 없습니다. 그리고 바그너보다 더 와일드한 삶을 살았습니다. 바람기 많은 음악의 어머니였습니다.


조지 프레드릭 헨델 (1685~1759)


이렇게 서로 가까운 지역에서 태어난 음악의 아버지 바흐와 어머니 헨델은 1685년 같은 해에 태어났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부부는 평생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인 헨델이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밖으로만 돌다가 결국 영국으로 귀화했기 때문입니다. 생전엔 헨델이 훨씬 유명했습니다. 그렇게 강국인 영국에서 칙사 대접을 받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래서 바흐는 고향을 방문한 헨델을 만나기 위해 두 번이나 그를 찾아갔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어긋나 그 둘의 만남은 무산되었습니다.


생전 바흐의 유명세가 헨델보다 미약한 것은 바흐가 라이프치히 한 곳에서 수도사처럼 조용히 산 것도 영향이 있을 것입니다. 그는 27년간 성 토마스교회의 음악감독(Cantor) 직을 맡았습니다. 오르간으로 성가를 연주하고 교회 소년 합창단을 지휘하고 양성한 일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음악 이론을 정립하고 작곡을 했습니다. 이렇듯 바흐가 일한 교회는 의심 많은 토마스(도마)를 위해 세워진 교회였으나 그는 아무 의심 없이 주님을 위해서 시종일관 헌신을 하였습니다. 그에게 음악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소명(calling)과도 같은 업이었습니다. 바흐는 그의 작품 끝에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이란 문구를 서명처럼 남겼습니다. 그의 기도였을 것입니다.


바흐 하면 딱히 곡의 제목은 잘 떠오르지 않지만 대위법, 푸가, 평균율, 무반주곡, 합창곡, 오라토리오, 칸타타, 수난곡, 협주곡, 소나타, 가곡 등의 장르가 줄줄이 떠오를 것입니다. 오페라 빼고는 다 섭렵한 그였습니다. 그에게서 오페라가 빠진 것은 오페라가 세속적이라 손을 안 댔을 확률이 높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장르에서 그는 1,000여곡을 작곡했습니다. 다작으로 치면 비엔나의 슈베르트 정도가 그에 비견될 것입니다. 그 많은 곡들에 그의 신앙이 녹아있어서인가, 그리고 그가 음악의 아버지라서인가 그의 음악은 왠지 엄숙하고 경건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바흐라는 이름도 왠지 그렇게 들리고 초상화의 외모도 참으로 근엄해 보입니다. 옛날 시골집 마루에 걸려있던 할아버지 사진처럼 말입니다.


라이프치히 중심가에 위치한 성 토마스교회 전


드디어 라이프치히에 도착했습니다. 예상대로 유서 깊은 중세 도시가 펼쳐졌지만 예상외로 현대식 고층 건물도 눈에 띄었습니다. 중세부터 박람회를 열어온 전통 있는 무역 도시의 영향이 남아 있어서일 것입니다. 도시 중앙에 있는 마그리트 광장을 지나니 성 토마스교회가 바로 보였습니다.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작은 교회였습니다.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돌며 워낙 큰 성당들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일까요? 어쩌면 그 교회가 카톨릭의 부패에 저항해서 일어난 종교개혁으로 세워진 루터교회라서 그런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일순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말이 안 됩니다. 성 토마스교회는 그 이전에 세워졌고 카톨릭에서 개신교로 문패만 바꿔 달은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라이프치히가 속한 작센주는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의 본산지였습니다.


가서 보니 바흐의 생활은 단조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상보다 더 그렇다는 생각을 들게 했습니다. 성 토마스교회와 그의 집이 길 하나 사이로 거의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바흐는 그 길을 사이에 두고 집 교회 집 교회 또집 또교회..를 오가며 하루를 보냈을 것입니다. 흔히 우리가 집 학교 도서관이라 말하는 그런 심심하고 단조로운 생활을 무려 27년간 한 것입니다. 아마도 그의 일탈이라면 당시 유행했던 커피 정도였을 것입니다. 워낙 좋아해서 바흐답지 않게 커피를 위한 곡을 만들 정도였으니까요. 커피를 외쳐대는 <커피 칸타타>입니다. 바흐가 살던 집은 교회 부속인 합창학교로 운영되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니 바흐가 합창단을 지도할 때는 그나마 집 밖에 나갈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현재 그의 집은 박물관이 되었고 교회 마당엔 그의 동상이 서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지도했던 교회의 성 토마스 소년 합창단은 지금까지도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습니다.


성 토마스교회 옆 바흐가 살던 집. 현재는 재건된 건물로 바흐 박물관으로 사용


바흐는 퇴근해서 집에 가서도 하느님의 뜻대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첫 부인을 상처해 두 번 결혼을 했는데 그녀들 사이에서 많은 자식을 두었습니다. 무려 20명을 낳았고 그들 중 절반인 10명이 성인까지 생존을 하였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세속을 멀리하고 (음악의) 아버지란 칭호가 아깝지 않게 가문 번성을 위해 많은 자녀를 둔 것입니다. 바다의 모래알 같이, 밤하늘의 뭇별 같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몸소 실천한 그였습니다. 그래서 바흐 집안은 음악 가문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선대 때부터 그랬었고 그의 자손들도 그렇습니다. 바흐는 그가 쓴 글에서 그의 가족 중 음악가가 53명이라고 밝혔습니다. 모두 바흐란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음악회에서 바흐의 이름이 보이면 패밀리 네임 앞의 이름도 봐야 합니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아닐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 정도로 그의 아들들도 유명한 음악가들입니다. 이런 혼동을 막기 위해서 아들들이 활동했던 지역명을 앞에 붙여서 부르기도 합니다. 런던의 바흐, 베를린의 바흐 등으로 말입니다.


바흐는 말년에 백내장 때문에 꽤나 고통을 받았습니다. 맨날 악보만 보고 사니 눈이 좋을 리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라이프치히에 온 영국 출신 의사에게 시술을 받았습니다. 꼬챙이로 눈을 찌르는 공막천공시술을 받은 것입니다. 문제는 그 의사가 돌팔이였던 사실입니다. 바흐는 두 번의 시술 후 후유증에 당뇨 합병증까지 겹쳐 그 해인 1750년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테일러라는 그 의사는 헨델도 그렇게 보내버렸습니다. 1758년 그 돌팔이는 런던에서 역시 또 시력에 문제가 있었던 헨델에게도 시술을 했습니다. 그리고 헨델은 그다음 해에 사망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한스러운 일이 연이어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게 같은 해에 태어난 음악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9년의 시차를 두고 같은 눈병으로 같은 의사에 의해 사망을 했습니다. 바흐와 헨델이 서로 알고 지냈다면 헨델은 피해를 피해갔을지 모릅니다. (출처 : <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 로날드 D. 게르슈테 지음, 미래의 창 출판)


성 토마스교회와 파이프 오르간을 배경으로 서있는 바흐


바흐의 무덤은 성 토마스교회 안에 있습니다. 그가 평생 재직했던 직장에 잠들어 있는 것입니다. 본래는 다른 곳에 묻혔는데 1950년 그곳 교회의 제단으로 이장을 했습니다. 교회 마당에서 바흐 동상을 알현하고 교회 문을 열었습니다. 그 순간 바로 은은하고 장엄한 파이프 오르간 연주가 들려왔습니다. 2층 높은 곳까지 뻗은 파이프라서인가 그 음악은 형형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입혀진 빛의 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보니 그날은 아니지만 그 기간(6/28~8/9) 교회에선 매주 토요일마다 오르간 음악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일상적인 오르간 연주는 그렇게 늘 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과연 바흐의 교회입니다.


과거 바흐가 연주했을 법한 성 토마스교회의 파이프 오르간


바흐는 생전에 그의 <마태 수난곡>, <요한 수난곡>, <B단조 미사> 등의 초연을 그 교회에서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점점 잊혀져 갔습니다. 훗날 부잣집 도련님인 20세 약관의 멘델스존은 1829년 <마태 수난곡>을 찾아내고 지휘하여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수난으로 사망에 이른 그 대곡을 부활시킨 것입니다. 함부르크 출신인 멘델스존은 6년 후 아예 라이프치히에 와서 12년간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직접 이끌었습니다. 그러면서 바흐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그의 작품을 연주회에 꾸준히 올렸습니다. 브루크너보다 더한 진정한 바흐바라기였던 멘델스존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이제 사람들은 바흐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교회에서 세상으로 나온 바흐가 된 것입니다. 아마도 그때부터 바흐와 헨델의 지위는 역전이 되었을 것입니다.


음악의 아버지는 음악의 선구자란 의미입니다. 선구자의 길은 고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흐에겐 하느님이 있어 그 길을 완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있었기에 이어서 등장한 고전파의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 기라성 같은 음악가들이 꽃을 피울 수 있었습니다. 바로크에서 클래식이 된 것입니다. 27년간 성 토마스교회에서의 봉직 같은 헌신, 그리고 죽음.. 라이프치히엔 성 토마스의 교회가 있지만 진정한 라이프치히의 수호성인은 그곳에 잠들어 있는 바흐일 것입니다. 성 토마스, 도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 중 가장 먼 인도의 첸나이에서 순교했습니다. 그의 무덤은 그곳에도 있는 성 토마스교회에 있습니다.


성 토마스교회 제단에 안치된 바흐의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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