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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Dec 18. 2021

엄마와 친정엄마

남자에게는 없고 여자에게만 있는 집, 여자 중에서도 미혼 여자에겐 없고 기혼 여자에만 있는 집, 바로 친정(親庭)입니다. 친정은 참으로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집입니다. 한자로 해석하면야 친할 친이지만 그 친함 한 가지만으로는 설명이 짧은, 긴 이야기가 서린 집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인가 여자의 마음속에 친정은 때론 역설적으로 그 친함 반대편에 위치한 집이기도 합니다.


옛날엔 여자가 시집가는 순간 그 시점을 경계로 그녀가 우리집이라 불렀던 집은 친정집이 되면서 돌아가기 힘든 집이 되기도 했습니다. 친한 집이라는 친정이 무색하게 먼 집이 되는 것입니다. 시집에서 험한 일을 겪었을 땐 그 정도가 더 심했습니다. 물론 신사임당 같은 여성은 당시 조선에 그런 풍속도 있다고는 하지만 아들 율곡을 친정인 강릉에서 낳고 6살까지 그곳에서 키워 훌륭한 위인의 반열에 오르게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과거 여성의 친정은 엄한 친정아버지의 모습을 우선적으로 떠올리게 한 집이었습니다. 죽어도 시집에서 죽으라는 친정아버지의 추상같은 호령을 시대극에서 못 보신 분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시집갈 때 호적까지 파서 같이 갔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호주가 한 집안의 주인이었던 시절 개인의 결혼, 이혼, 입양 등이 드러난 호적은 양성평등에 위배된다는 헌법재판소의 판결로 2008년 가족관계등록부로 대체되어 지금은 사라졌습니다. 호적을 파다 파다 보니 시대에 역행하는 문제가 드러나 호적 자체가 파내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2008년의 일이니 생각보다는 근자에 일어난 일입니다. 전설의 고향 시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인가 지금도 시집간 여자가 남편이나 시댁과 안 좋은 일이 있을 땐 참새가 방앗간을 가듯 자유롭게 출입했던 친정도 그 문을 두드리는 것에 일말의 망설임을 갖게하곤 합니다. 시대가 변했음에도 적어도 시집가기 전만큼 친정 문지방을 넘나드는 게 자유로운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얘야! 시집가거라'란 대중가요가 히트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언제인가 찾아보니 1978년에 나온 곡으로 지금은 작고한 정애리 씨가 첫 가사부터 시원스레 얘야 시집가라고 뽑아댔던 흥겨운 7080 송입니다. 열아홉 살 밖에 안 된 순이 보고 시집가라고 재촉하는 노래인데 순이는 그 말이 속으론 좋으면서 겉으론 싫은 척합니다. 이렇게 대놓고 시집을 가라 했던 시절이 그렇게 멀지 않지만 지금은 시집가란 말이 조심스러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물론 남자에게 장가가란 말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유사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제게도 성년이 된 자녀가 있고 조카들도 있지만 그들에게 시집과 장가를 가란 권유가 여간 쉽지가 않습니다. 거기에 언제 갈 거냐, 왜 안 가냐고 묻는 것은 더욱 힘들게 느껴집니다. 명절엔 손주들에게 그것을 벼르시는 엄마에게 제가 사전에 조심스레 입단속 차 말씀을 드릴 정도로 점차 시집과 장가가란 말은 이 사회의 금기어가 되어가는 듯합니다. 서구처럼 결혼 여부가 확실한 프라이버시의 영역으로 들어선 시대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중 시집의 경우 정도가 더해 거주지로서 존재하는 시집과, 시댁 식구들을 통칭하는 시집은 그래도 계속 사용되고 있지만 결혼을 의미하는 시집은 점차 고어까지 되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이렇게 시집이나 장가란 말이 덜 들리는 대신 그것들을 통합한 결혼이라는 성(性)의 차별이 보이지 않는 말은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이 들리고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이 글에선 제목에서 보이는 친정의 선명성을 부각하기 위해 결혼보다는 시집이란 용어를 남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집과 대척점에 있는 친정은 요즘도 실생활에서 꿋꿋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오히려 존재감은 과거의 그것보다 더 크게 느껴지고 있습니다. 감성적인 친정의 거리감이 과거보다 더 가깝게 느껴지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거리감에 맞추어 실제 거리도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시집에 사는, 또는 곁에 사는 며느리보다 친정이나 그 곁에 사는 딸이 점점 더 늘어가고 있으니까요.


출처. '엄마와 나의 모든 봄날들', 송정림 작가, 알에이치코리아 출판


그 가까워짐에 친정엄마가 계십니다. 엄마는 엄마인데 친정에 사시는 엄마라 친정엄마입니다. 과거 아버지가 먼저 떠올랐던 친정에서 엄마가 먼저 떠오르는 친정으로 바뀐 것입니다. 시집가서 출가한 딸에게 친정을 심리적이든 물리적이든 가깝게 만드는 제1 요인이 된 친정엄마입니다. 그 엄마가 끌어당겨서 기혼 여성에게 친정은 갈수록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친정에 친정엄마는 계셔도 친정어머니란 분은 안 계십니다. 전 그렇게 부르는 딸을 본 적도 없거니와 문서로도 대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친정아버지는 계신데 말입니다.


이상합니다. 이렇게 엄마 앞에 친정이 붙으면 왠지 더 정겹고 깊게 느껴지니 말입니다. 시집간 딸에게만 있는 엄마라 공간은 분리되고 시간은 흘러가서 그런 건가요? 그래서인가 여자의 엄마는 결혼 전엔 young mom이었다가 친정엄마가 되면서부터는 old mom으로 바뀝니다. 엄마의 실제 모습과 상관없이 딸의 마음속에서 그렇게 바뀌어가기 시작합니다. 결혼으로 인한 시공의 변화로 이제는 함께 살지도 못하는데 늙어가는 엄마.. 그런 엄마이기에 딸은 미혼 때는 느끼지 못했던 애틋함과 아련함까지 친정엄마에게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집가기 전 엄마에겐 끌려가기만 했던 딸은 이제 친정 엄마와 서로 끌고 당기는 밀당의 사이가 됩니다. 때론 모녀가 툭 터놓고 마주하며 세대를 뛰어넘어 인생의 친구가 되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친구니까 알콩달콩 다툼도 있겠지요. 이렇게 시간이 갈수록 엄마와 딸이라는 경계는 점점 흐릿해지고 같은 여자로서의 동질감이 심화되는 것입니다. 그런 친정엄마의 모습은 그녀의 미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녀도 딸을 낳고 엄마로 있다가 그 딸이 시집을 가면 친정엄마가 될 테니까요. 엄마와 친정엄마의 대물림입니다.


출처. '엄마와 나의 모든 봄날들', 송정림 작가, 알에이치코리아 출판


최근 이곳 브런치에서 작가님들의 친정엄마에 대한 글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모녀지간은 보편적이면서도 특별한 사이의 관계라선가 양자 간에 파생되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꽤나 많이 쌓여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전 그 소재에 꽂혀 이곳에서 그녀들의 다양한 밀당 스토리들을 훔쳐보게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슬픈 이야기, 그리고 따스한, 섭섭한, 자랑스러운, 안타까운, 후회스런.. 때론 감동으로 다가오는 깊은 울림까지 있는 모녀의 이야기들을 말입니다.


남자인 저는 지금 이 글을 쓰게 된 원천인 이곳 작가님들의 친정엄마 스토리에 그간 우리 가족을 비롯한 주변에서 본 친정엄마의 모습이 더해져 난데없이 이 글을 쓰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에겐 존재하지도 않는 친정엄마에게 제가 이입이 된다 해서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당사자인 딸이 아니기에 관찰자로서 속내 없는 수박 표면의 이야기만 하고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틀리고 공감되지 못하는 부분도 있겠지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데 그런 남자에게도 친정이 있긴 합니다. 엄밀히는 그렇게 부르는 곳이 있습니다. 집은 아니고 직장입니다. 이직한 남자의 첫 직장을 가리켜서 친정이라 부릅니다. 처음에 있던 곳을 나간다는 출가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그렇게 부르는 것 같습니다. 아, 그래도 친정사장, 친정상사 등 이런 말은 없습니다.


우린 종종 프로야구 같은 스포츠 경기에서 이적한 선수가 처음에 적을 두었던 구단에 결정적인 패배를 안길 때 언론 기사에 친정에 비수를 꽂았다는 헤드라인이 등장하는 것을 보곤 합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의 속내는 그렇게 편치는 않을 것입니다. 대개는 이직을 해도 떠나 온 조직에 원한이 있지 않는 한 친정회사가 잘 되기를 바라니까요. 그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첫, 처음이라는 의미는 어디에서든 특별하니까요. 그래도 시집간 여자가 친정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따라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직장에서 친정이라 불리는 개념도 이젠 굳이 남자에게만 한정해선 안 되겠네요. 그만큼 여성의 사회 진출이 많이 늘었으니까요.


이 글과 연계되어 돌아가신 지 오래된 저의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떠오릅니다. 어린 시절 외가의 경조사 때마다 8남매의 장녀인 엄마를 따라 외갓집을 가곤 했었는데 갈 때마다 엄마는 뭘 그리 이것저것 많이 싸가는지 전 그게 싫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린 저도 분담해서 들고 가야 할 짐이기에 그랬습니다. 문제는 돌아올 때였습니다. 인천과 안양 사이 지금은 시흥시가 된 시골에서 저희 외가는 포도를 비롯한 논밭 농사를 지었는데 돌아올 때 짐은 족히 갈 때의 두 배 이상이었습니다. 외할머니가 농작물이나 가공한 농산품을 바리바리 싸주셔서 그렇습니다. 엄마가 손사래를 쳐도 외할머니는 그것들을 이고 지고 버스 타는 데까지 따라 나오셔서 강제로 태워 보내주셨습니다.


어린 제 눈엔 다 짐으로만 보이는 것들이었습니다. 안 주고 안 받으면 힘 안 들이고 편하게 오갈 텐데 왜 서로 못 줘서 안달이신지 전 그 점이 이해가 안 갔습니다. 엄마도 그랬었고 외할머니도 그랬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시간이 흐를수록 그 짐의 크기가 역전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외할머니가 연로해지실수록 갈 때 엄마의 짐은 더 많아지고, 올 때의 짐은 줄어들었습니다. 마치 시소나 저울 양끝의 무게추가 반대쪽으로 이동하듯이 말입니다. 외할머니인 친정엄마와 엄마인 딸은 그렇게 모녀지간 서로 볼 때마다 줄 수 있는 한, 지극정성 한 보따리로 서로의 정성을 건네신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시절 두 분이 주고받은  정성 보따리의 합은 매번 똑같았습니다. 변함없는 사랑의 크기입니다. 친정엄마와 딸의..   


출처. '엄마와 나의 모든 봄날들', 송정림 작가, 알에이치코리아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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