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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Dec 11. 2021

율리우스력 & 동방정교회

크리스마스가 2주 남았습니다. 세 사람의 동방박사는 밤하늘에 나타난 신기한 별빛을 보고 예루살렘을 향한 머나먼 길을 벌써  출발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오늘이 성탄절 4주 전임에도 거리는 벌써 대형 크리스마스트리와 오색 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캐럴 소리는 갈수록 작아지는 듯한데 크리스마스트리는 갈수록 화려해지는 듯합니다. 바야흐로 크리스마스 시즌입니다. 크리스마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 '러브 액츄얼리'에선 5주 전부터 세상의 연인들이 크리스마스를 향해 일찌감치 출발합니다. 그런데 온 세상이 이렇게 시끌벅적하게 D-day인 12월 25일을 향해 가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는 같은 생일을 다른 날에 쇠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쯤 크리스마스트리로 쓸 전나무를 베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러시아의 10월혁명은 10월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11월에 일어났습니다. 혁명을 통해 레닌이 주도하는 볼셰비키들이 집권하였기 때문에 10월혁명은 볼셰비키혁명이라고도 불립니다. 그런데 11월에 일어난 혁명을 왜 10월혁명이라 부를까요? 정확한 혁명일은 11월 5일인데 그들이 10월혁명이라고 부르는 날은 10월 23일로 13일 차이가 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크리스마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절이 반대인 남반구 국가들조차 수영복 차림으로라도 12월 25일 한 여름의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쳐대는데 그들만이 나 홀로 1월 어느 날에 시끌벅적하게 즐기는 모습을 해외 토픽을 통해 전 세계에 전송해주곤 합니다. 러시아의 크리스마스는 1월 7일입니다. 다른 나라에서 크리스마스트리를 밝힌 형형색색 오색 전등불이 꺼진 지 한참 후에 그들은 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율리우스력(Julian calendar)이라 그렇습니다. 혁명이 일어난 1917년 러시아는 율리우스력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당시 혁명일이 율리우스력으로는 10월이라 그때 정한 명칭을 지금까지 그대로 부르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그날을 천문과 역법이 바뀌었다 해서 11월혁명으로 수정할 순 없었겠지요. 과거의 사실은 당시의 역사적 사실로 그대로 있어야 하는 것이 역사의 불문율이니까요. 크리스마스도 율리우스력의 계산법으로 하면 예수님은 1월에 태어난 것으로 되어서 그들은 그때를 축일로 기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러시아가 율리우스력을 따라서 그렇다는 것인데 엄밀히 이야기하면 러시아의 국교인 동방정교회가 그 캘린더를 따르기에 그렇습니다. 동방정교회는 러시아에선 러시아정교회가 됩니다.


동방정교회 크리스미사에 참석하여 촛불을 밝히는 푸틴 대통령, 2016. 1. 7


율리우스력은 말 그대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만든 달력입니다. 아.. 또 이 로마인이 등장합니다. 정말 오지랖 넓은 이 분은 2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세계 이곳저곳에 그의 이름 석 자, 아니 그 이상을 남기고 있습니다. 당장 러시아만 보더라도 혁명으로 타도된 제정 로마노프 가문의 황제를 가리키는 차르는 카이사르의 러시아명이니까요. 살아서는 로마의 황제로도 즉위한 적이 없던 그가 죽어서는 세계의 황제가 되어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시이저, 차르, 카이저, 체사레, 세자르 등으로 대우받고 있습니다. 하긴 그는 로마의 종신독재관(Dictator Perpetuo)이었으니 그것은 황제의 다른 이름과 다를 바 없었을 것입니다.


로마의 정권을 잡은 카이사르는 많은 개혁을 하는데 달력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사실 삼라만상 사시사철을 일자별로 쪼개 놓은 달력만큼 인간 생활과 밀접하고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 지금 우리야 백만분의 1초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달력 아닌 초력, 그것도 초월한 초초..력 속에서 생활하고 있으니까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2천 년 전이라면 이야기가 다를 것입니다. 사람들이 먹고사는 농업, 어업, 축산업, 수렵, 임업 등의 모든 경제 활동에 태양, 달, 지구, 이 3자의 밀당을 정리한 캘린더의 정확성은 그것들의 생산성을 좌우하기에 매우 중대한 기록이고 좌표였을 테니까요. 더구나 그때엔 지구는 네모나고 태양이 지구 주위를 빙빙 도는 것을 믿는 사람들도 많은 시대였습니다.


율리우스력을 제정한 율리우스 카이사르, Bc 100~44


카이사르는 BC 45년 로마인의 고대 달력에 이집트의 달력을 연구해 업그레이드시킨 새로운 달력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율리우스력입니다.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상세한 내용은 포털을 검색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년을 365.25일로 고정 / 홀수 달을 우대하여 31일, 짝수 달은 30일로 통일. 그러면 1년은 366일이 됨 / 365.25일인 1년에 맞추기 위해 2월은 30일이 아닌 29일, 모자라는 0.25일을 채우기 위해 4년에 한 번 윤년을 두고 그 해 2월은 30일로 하여 조정 / 7월은 달력 제정자인 율리우스(Julius)의 이름을 넣어 줄라이 / 후계자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도 8월에 자기의 이름을 넣어 어거스트 / 아우구스투스는 짝수 달이라 30일이었던 8월을 카이사르와 마찬가지인 31일로 변경 / 이로 인해 9월부터는 홀짝 로테이션이 바뀌어 9월은 30일, 10월은 31일.. / 아우구스투스로 인해 31일이 7개가 되면서 1일이 초과되자 2월에서 또 1일을 빼서 28일로, 4년에 한 번 윤년엔 29일 / 율리우스와 아우구스투스가 7, 8월에 들어감에 따라 본래 있던 7(라틴어 septem)월은 9월로, 8(octo)월은 10월로, 9(novem)월은 11월로, 10(decem)월은 12월로 순차적으로 밀림 / 고대 로마 시대엔 1년은 봄이 오는 3월부터 시작하여 10개월만 있었음 / 줄라이와 어거스트가 새로 끼어들면서 끝에 있었던 두 달이 밀려 1, 2월이 되면서 1년 12개월 달력인 율리우스력이 완성됨


보시듯 율리우스가 제정한 율리우스력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달력과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아니, 월력, 일력으론 똑같습니다. 그러니 러시아인이 불편함이 없기에 지금도 사용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과학성도 놀랍지만 또 하나 놀라운 것은 가위질을 엿장수 마음대로 하듯 로마인 마음대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2월은 동네북입니다. 새로운 7월과 8월은 본래의 6월과 7월 사이에 새치기해서 들어갔습니다. 7월 줄라이와 8월 어거스트는 영어로는 줄리어스 시이저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어거스트인 아우구스투스가 태어난 달입니다. 샘 많은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전임자인 카이사르에 뒤질세라 그가 한 것이라면 본인도 똑같이 따라서 했습니다. 달의 순서와 날의 길이까지도 바꾸면서 말입니다.


그 두 사람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인들은 9월부터는 맞지 않는 숫자 이름으로 배열된 달력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야 라틴어를 모르고 사는 민족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그것을 알고 사는 서구권 사람들은 달력을 보면 꽤나 이상하게 생각할 듯싶습니다. 특히 9월부터 말입니다. 학교에서 배운 숫자는 10을 나타내는데 12월이라 하고, 8각형은 옥타곤이라 부르면서 달력에선 옥타를 10월이라 부르고 있으니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표준 달력은 그레고리력(Gregorian calendar)입니다. 1582년 그간 사용해오고 있던 율리우스력의 오차를 수정하여 만들어진 캘린더로 당시 이것을 제안한 교황 그레고리 13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습니다. 구조와 표기되는 내용, 달력으로만 치면 율리우스력과 같습니다. 초력 계산에서 미세한 차이가 납니다. 복잡한 태양과 지구의 천문학 법칙은 봐도 읽어도 저는 이해불가지만, 한마디로 율리우스력이 128년마다 하루의 오차가 있다면 그레고리력은 3000년마다 하루의 오차로 정확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레고리력을 제정한 그레고리 13세 교황, 임기 1572~1585


러시아의 크리스마스나 10월혁명이 오늘날 13일 차이가 나는 것은 2천 년 넘게 율리우스력이 내려오면서 그만큼 오차가 벌어진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늘날 캘린더는 뛰어난 천문학자들의 활약으로 16세기 말에 제정된 그레고리력보다 더 더 정밀하게 오차를 줄였지만 세계의 표준이 된 그 캘린더의 이름만큼은 지금도 동일하게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1895년 을미개혁 시 음력에서 양력인 그레고리력을 도입하였습니다.


그런데 위에서 보듯 러시아와 동방정교회는 왜 다소 부정확한 율리우스력을 고집하고 있을까요? 사실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국가로서의 러시아는 혁명이 끝나자마자 바로 그레고리력으로 전환했으니까요. 1918년 1월 31일 다음 날인 2월 1일을 2월 14일로 공표한 것입니다. 당시 러시아 국민들은 매우 신기했을 것입니다. 하룻밤만에 2주가 지난 미래로 갔으니까요. 사용해오던 율리우스력을 제정 러시아 차르의 구체제로 보고 바로 수정했을 것입니다. 만약 3개월 먼저 이 법이 시행되었다면 오늘날 역사에서 율리우스력의 10월혁명은 그레고리력의 11월혁명으로 불리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러시아의 동방정교회는 여전히 교회력으로 율리우스력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정론이든 추론을 해봅니다. 하나는 교리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 Church)는 이름에도 들어가 있듯 정통성을 굉장히 중시합니다. 그래서 과거 로마시대부터 2천 년 넘게 교회력으로 채택되고 기록되어온 정통한 달력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작년까지는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이 1월 7일이었는데 올해부턴 확 당겨서 전년도 12월 25일로 바꾼다? 쉽지 않아 보입니다.


또 하나는 그레고리력이 서방교회의 수장인 교황이 발의해서 만들어진 교황의 달력이라는 점입니다. 서로마 카톨릭과 동로마 정교회는 1054년 교리의 차이로 빚어진 동서교회 대분열로 각각의 수장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 바티칸 교황이 서로를 파문하며 완전히 결별합니다. 그런데 서방의 로마 교황이 만든 달력을 사용한다? 동방정교회 입장에선 이건 더욱 수용하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의 모스크바 성 바실리 대성당 (출처. Pexels)


동방정교회는 카톨릭, 개신교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기독교 3대 종파에 들어가는 큰 종교입니다. 같은 카톨릭 같지만 개신교만큼은 아니더라도 많은 다른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단 조직적으로 로마 카톨릭의 교황과 같은 원톱 수장이 없습니다. 과거 동로마제국 시대엔 지금의 이스탄불인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그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이슬람 국가인 터키가 들어선지라 그곳은 본산이라는 상징성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장이 없어 각 나라별 독립성을 인정하기에 러시아는 러시아정교회, 그리스는 그리스정교회, 루마니아는 루마니아정교회 등으로 불립니다. 그중에서 당연히 러시아정교회가 신도수나 국가 파워 등에서 가장 실권력이 크므로 지금은 모스크바 총대주교가 정교회의 대표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한 로마인이 반도 북쪽 갈리아에서 내려와 루비콘 강을 건너 국가를 통일했고 세계를 지배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세계인은 생활 속에서 그의 이름과 그의 나라 언어를 보며, 말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가 살아있을 때 세계는 지중해를 둘러싼 로컬이었지만 지금 세계는 말 그대로 지구 한 바퀴 글로벌입니다. 벽에도 걸려있고, 책상 위에도 놓여있고, 시계에도, 스마트폰에도 있는 캘린더 속에 그가 들어있습니다. 자판을 두드리는 노트북 뒤로 보이는 달력의 오늘은 11월 27일입니다. November.. 그로 인해 9라 쓰고 11로 읽고 있는 세계인입니다.


과연 대단한 로마이고 로마인들입니다. 로마에서만 로마법을 따르는 것이 아닌 로마 밖에서도 우린 지금 이렇게 알게 모르게 로마법을 따르며 사는 것입니다. 로마 바티칸의 프란체스코 교황과 러시아정교회의 키릴 모스크바 총대주교는 2016년 2월 천년 만에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습니다. 견원지간을 끝내는 천년의 재회, 바야흐로 화해 무드입니다. 러시아와 사이좋은 쿠바의 독재자 카스트로가 중재한 빅 이벤트였습니다. 그리고 그해 11월 그는 죽었습니다. 죽기 직전 지구상에서 하늘 아래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두 분을 만나게 했으니 그는 좋은 곳에 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동방정교회는 언제까지 다소 부정확한 로마인의 율리우스력을 사용하게 될까요? 혹시 교황력인 그레고리력의 이름 바꾸면 바꾸려요?


평화로운 천년의 재회, 프란체스코 교황과 키릴 총대주교의 만남. 201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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