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동주>를 통해 박정민이라는 배우를 알았다. 그전에도 꽤 많은 영화에 출연한 배우였지만 내겐 <동주>에서의 그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뭔가 묘한 매력이 있는 얼굴이 좋았고 한 번에 눈에 띄지 않았지만 계속 눈에 들어오는 모습이 좋았다.
부드럽고 조용한 태도나 모양을 가리키는 말 중에 '자분자분'이라는 단어가 있다. 내게 배우 박정민의 첫인상은 자분자분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개성 있는 연기와 재치 있는 입담을 가졌지만 뭔지 모르게 그를 생각하면 그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올랐었다.
하지만 <쓸 만한 인간>을 읽고 난 후 내가 가진 배우 박정민에 대한 인상은 정말 내 멋대로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툭 던지는 말장난 같은 문구나 친구들과 투닥거리는 장면 등에서 킥킥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내가 생각했던 배우 박정민이 아닌, 자신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인간 박정민을 만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박정민 산문집 <쓸 만한 인간>은 개정판이다. 초판은 2016년에 나왔다. 2013년부터 2016년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 더해진 그의 이야기는 6년 전이라는 꽤 오래된 이야기라기 보다 며칠 전에 갈겨쓴 일기 같다는 느낌이 강했다.
개정판이 나오기 전부터 가끔 SNS에 올라오는 <쓸 만한 인간>에 대한 글을 봤다. 일단 배우 박정민에 대한 호감도가 있었던 터라 언젠가 이 책을 한 번 꼭 읽어봐야지 했었다. 팬으로 좋아해서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겼지만 또 배우가 쓴 에세이에 대한 선입견이 있어 쉽게 집어 들지 못했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작가의 말에는 다음과 같은 짧은 글이 적혀있다.
그럴듯한 문장과 서사는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
그래도 읽어보시겠다면,
그저,
무심결에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박정민의 산문집 <쓸 만한 인간>을 잘 나타내주는 문장이 아닐까 싶다.
배우로서의 고민과 진중한 일상이 궁금해서 이 책을 집어 들었다면 작가의 말을 읽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길 바란다. <쓸 만한 인간>은 의외로 꽤 독특하게 웃기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짠한 감동을 슬쩍 던져주는 조금은 독특한 산문집이다.
소설 줄거리를 알면 읽는 재미가 뚝 떨어지듯, 에세이 역시 핵심 구절을 알아버리면 책의 분위기를 알게 되어 읽는 즐거움이 줄어든다. 그럼에도 들려주고 싶은 책 속 구절이 있다.
"삼류 단역 엑스트라 새끼야, 밥도 안 처먹는 게 냉장고는 왜 이렇게 좋은 걸 샀냐?"
"<냉장고를 부탁해> 나갈 수도 있잖아."
"취미가 실연인 새끼가 침대는 왜 이렇게 큰 걸 샀냐?"
"<나 혼자 산다> 나갈 수도 있잖아."
"프론데? 뭔가 준비된 코미디언 느낌이야."
풋! 머금고 있던 물을 뿜을 뻔 했다. '오~박정민 완전 내 취향의 말장난을 하는데?' 책에 대한 몰입도가 높아지는 순간이었다. 물론 이 대화 외에도 책 속 구석구석에는 별것 아니라는 듯 툭 던지고 지나가는 웃음 코드가 많다. 시작은 환상 속에서 만들어낸 배우 박정민의 일상 탐방이었으나 책을 읽어 나갈수록 취향인 그의 말투를 찾는 것에 집중되어 갔다.
참 별 내용 없네 하며 무심히 읽다가도 '문득' 한 문장에 왈칵 눈물이 쏟아질 때도 있다. 별것 아닌 말장난이 '문득' 나를 위한 개그콘서트인 것 같아 책을 붙잡고 박장대소를 하기도 한다. 나는 그런 '문득'이 에세이의 매력이라고 생각하는데 박정민의 산문집 <쓸 만한 인간>은 '문득'이 참 많은 책이었다.
피식피식 웃으며 '아~골 때리네.'를 연발하며 읽어간 <쓸 만한 인간>.
포스트잇을 꺼내 책 곳곳에 붙여두었다. 우울하게 하루를 마감하는 날, 책 속 곳곳에 숨어있는 문장들이 요즘 나에겐 그 어떤 것보다 웃음과 즐거움을 안겨주고 있다. 작가의 피와 땀이 뚝뚝 떨어져 있는 글을 보며 웃음이 난다고 하다니 작가에게 문득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