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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May 09. 2017

기억과 글로 역사가 된다 <베이징, 내 유년의 빛>

따라 적고 싶은 글이다. 처음 만난 작가, 베이다오의 글은 간결하지만 담백하고 깊이가 있었다. 담담하게 적어 내려가지만 한 글자, 한 문장에 가득 담긴 정성이 느껴졌다. <베이징, 내 유년의 빛>을 읽는 내내 필사가 하고 싶어 연필을 쥔 손을 끊임없이 꼼지락거렸다. <상하이, 여자의 향기>와 함께 중국의 대표적인 두 도시인 베이징과 상하이를 추억하는 에세이집인 <베이징, 내 유년의 빛>은 이전에 읽었던 <상하이, 여자의 향기>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책이었다. 상하이를 배경으로 쓴 왕안이의 <상하이, 여자의 향기>가 감성을 자극하고 작가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책이라면 <베이징, 내 유년의 빛>은 제목 그대로 작가의 기억과 글만으로 만들어진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작가의 기억이니 그의 생각이나 느낌에 대해 들려주는 부분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무척 객관적으로 자신의 유년 시절을 보낸 베이징의 옛 시절을 들려준다. 또박또박 들려주는 이야기는 저자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그 이후를 살아온 사람이든 상관없이 자신만의 추억을 다시금 되살릴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해 준다. <베이징, 내 유년의 빛>은 한 사람의 전기이자 그 집안, 도시 그리고 한 나라의 역사였다. 


<베이징, 내 유년의 빛>의 글이 마음에 들어 저자를 검색해 봤다. 중국의 저항시인이라는 베이다오는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꼽는 인물로 은유와 상징적인 수법을 많이 사용해 시의 형식을 대담하게 혁신했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라고 한다. 객관적으로 표현된 책이라고 생각했지만 읽는 도중에 불쑥 불쑥 훅~하고 들어오는 문장들의 감동이 있었다. 시인으로서의 그만의 특징이 <베이징, 내 유년의 빛> 곳곳에도 나타나고 있다. 

등불은 원래 인류가 진화했다는 표식 가운데 하나지만, 일단 진화가 시작되어 시간이 흐르면 반대로 눈이 멀게 된다. 

베이징에서 유년을 보냈지만 13년 동안 나라를 떠나 아버지의 병세가 위중해 돌아오게 된 베이징의 변화된 모습에 저자는 충격을 받았다. 인생의 절반을 보낸 도시, 하지만 변화된 베이징과 함께 그의 인생의 절반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서 저자는 글로써 자신의 베이징을 재건했다. 물론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사실들은 친구와 함께 찾아내고 수정했다. 베이징에서 유년을 보냈던 사람들의 기억을 글을 통해 이 세상으로 끄집어 낸 것이다. 그래서 <베이징, 내 유년의 빛>은 마치 내가 베이다오가 된 듯 그의 추억 속으로 깊이 빠져들 수 있게 만들어준다. 하나의 제목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짧지 않은 글이지만 그의 글은 읽기에 어렵지 않고 친절하다. 옛 베이징에서의 추억은 그때를 살아보지 않은 나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겪어 온 격동기의 중국, 문화대혁명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어졌다. 


장난감과 놀이, 낚시 등 유년 시절을 함께 해왔던 일들과 자신의 집에서 일했던 첸씨 아줌마, 초등학교에서 중학교까지의 이야기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추억까지 저자의 기억을 관통하고 있는 수만 가지 장면들 중 대표적인 18가지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내가 전혀 겪어보지 않아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사물을 통해 기억하고 들려주는 그의 이야기를 통해 내 기억 속의 물건과 그 속에 묻어있는 추억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베이징에 관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냄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냄새에 관한 추억은 18가지 이야기 중에서도 특히 더 재미있게 읽었다. 사람마다 기억을 담아놓은 각자의 방법이 있을 것이다. 사진을 찍듯 장면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있고 당시에 누군가가 했던 말, 입었던 옷 등으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냄새로 사람과 상황을 기억하는 편이다. 기억력이 좋은 사람들처럼 자세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특정한 상황에서 어떤 사람에게 무슨 냄새가 났는지를 기억한다. 그래서 냄새로 베이징을 설명하는 그의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겨울에 저장해 놓은 배추 냄새, 매연 냄새, 재 냄새 등이 적혀있는 글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마 <베이징, 내 유년의 빛>은 그가 들려준 베이징의 냄새로 기억하지 않을까. 


나에게도 베이다오의 가족사진과 비슷한 사진이 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의 사진첩에는 어린 시절 반듯하게 찍어놓은 가족사진이 있지 않을까. <베이징, 내 유년의 빛>에는 저자와 가족들의 사진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성장한 후의 사진까지 마치 친구네 집에 놀러 가서 사진첩을 들쳐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베이다오의 추억을 공유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남긴 베이징의 잊혀진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베이징, 내 유년의 빛>을 읽으면서 글이 가지는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은 한 사람의 추억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 아니다. 남겨놓지 않으면 현실에서 절대 보지 못할 베이징의 옛 모습을 머릿속에서 다시 기억나도록 만들고 잊지 않게 상기시켜 주는 책이다. 

<상하이, 여자의 향기>를 읽으면서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에 대해 적어 보고 싶었다. 그리고 <베이징, 내 유년의 빛>을 읽으며 베이다오, 그의 글처럼 도시와 나의 유년에 대해 써보고 싶어졌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 백 년 후에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거야. 우리를 포함해서 말이야."라는 베이다오 아버지의 말처럼 지금 나와 당신이 살고 있는 이곳도 백 년 후에는 전혀 다른 사람과 물건으로 채워질 것이다. 저자의 추억 속에만 있었던 베이징이 그의 글을 통해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한다. 

대학시절 한 교수님은 매일 아침 베란다를 통해 동네 사진을 찍는다고 하셨다. 매일 똑같은 사진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인간이 늙어가듯 도시도 조금씩 변하고 있단다. 그리고 언젠가는 사진 속의 마을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전혀 다른 건물이 들어서게 되고 예전의 모습은 교수님이 찍은 사진으로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베이징, 내 유년의 빛>을 읽으면서 문득 교수님의 그 말이 생각났다. 교수님이 사진을 통해 잊혀지는 순간을 남기듯이 저자는 글을 통해 이미 없어진 것들, 잊혀지고 있는 옛 베이징의 모든 것을 남겨두고 싶어한게 아닐까. 이 책을 읽는다면 한 페이지씩 글을 쓰고 한 장씩 사진을 찍어두길 바란다.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도시, 현재 그리고 당신의 모습은 곧 변하고 없어질 수도 있으므로 우리는 기억하고 쓰고 남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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