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다가 가까운 마을에서 자전거를 샀다. 벌써 3년이 된 일이다. 한겨울에 바다가 필요해서 무작정 내려왔지만 낯선 마을에서 돌아다닐 방법이 마땅찮았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접이식 자전거를 구매했다. 하루만에 커다란 상자에 담겨 도착했고 약간의 수고로움 끝에 자전거가 되었다. 동네 자전거 점포에서 바구니와 종을 달아주니 샌드위치와 음료를 담아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자전거를 타고 호수를 돌고 또 돌았다. 얼어붙은 호수 옆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도시락을 먹었다. 독립 서점과 혼술 가게가 있다고 해서 책을 읽고 하이볼을 마시고 자전거로 돌아왔다. 자전거가 생기고 나니 동네가 조금 친근해졌고 나는 조금 덜 외로워졌다. 일주일 뒤에 아빠가 왔고 자전거는 착착 접혀서 같이 서울로 돌아왔다. 그렇게 바닷마을 자전거에서 서울 자전거가 되었다. 나와 비슷해진 셈이다.
2.
직장은 역에서 내리면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다. 자전거를 타면 3분이면 가는 곳이다. 나는 15분을 일찍 일어나지 못해서 매일 따릉이를 타는 사람이 되었다. 출근길의 마지막 코스가 자전거라는 사실에는 장점이 더 많다. 마지막 3분이 기분을 약간은 좋게 하기 때문이다. 바람이 스치우는 감각이 순간을 잠시 미화시킨다. 벚꽃이 날리거나 단풍잎이 떨어지는 날이면 효과가 배가 된다. 애매한 비가 내리는 날은 그냥 맞으면서 자전거 타는 습관이 생겼다. 역시 15분을 일찍 일어나지 못해서이다. 조금 더 많은 비가 내리면 우산을 쓰고 자전거를 모는 요령도 생겼다. 막지 못하는 것은 스콜뿐이다. 애매한 비로 시작해서 갑작스러운 스콜로 마무리되었던 날은 정말로 뼛속까지 다 젖어버려서 아침에 만난 모든 이를 놀라게 했다. 옷 입은 상태로 수영장에 들어갔다 나오면 대충 이런 느낌이겠구나 싶었다. 그 이후에도 여전히 일찍 일어나지 못한다.
3.
이제 웬만한 도심 주행에 대해서는 은근한 자부심이 있다. 적당한 언덕도 오를 수 있고 이어폰을 낀 사람들과 교복 무리들 그리고 유모차를 탄 강아지 틈으로 자연스럽게 지나갈 수 있다. 3년동안 자전거를 정말 많이 타고 다닌 덕분이다. 교통이 애매한 동네에 살면서 헬스장에 갈때도 발레에 갈때도 레슨을 갈때도 그냥 나가고 싶을 때도 늘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동네에 있는 언덕들을 외우게 되었다. 기어 7에 넘을 수 있는 언덕. 7로 가다가 5로 낮춰야만 가능한 언덕. 4로 해야 간신히 넘는 언덕. 언덕들은 컨디션 확인의 기준점이 되기도 했다. 저번엔 4로 넘었던 언덕을 6으로 넘으면 전보다 건강해졌다고 생각하면서 혼자 웃었다. 반대로 저번에는 잘 넘던 곳에서 막히면 오늘은 내가 뭐가 문제인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4.
한 달 전부터 자전거를 모는 것이 조금 버거워진 느낌이 들었다. 원래 다니던 길이 힘에 부치고, 언덕에서 내려서 자전거를 끌고 가는 일이 늘었었다. (이럴 때는 꽤나 자괴감이 든다) 6의 언덕이 4의 언덕이 되다가 어느 순간 내려야 하는 수준까지 되었다. 헬스를 안한 지 거의 일년이 되어가니 그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차이가 난다니 싶어서 속이 탔다. 처음에는 겨울이고 내복까지 껴입어서 그래. 하고 생각했지만 점점 허덕이는 내 모습에 문제가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편하려고 타는 자전거인데 이렇게 힘겹다니. 역시 근력 운동을 해야 하는건가. 노화를 막을 순 없는 건가 하고 별별 생각을 다 했다. 어쩐지 전보다 몸이 둔해진 것 같긴 했어, 하면서 단서를 찾아내려고도 했다. 한 달 동안 자전거를 탈 때마다 반성과 후회와 서글픔이 스며들었다. 언제까지나 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지. 약간의 각오와 함께 운동을 조금씩 시작했다. 이렇게 흐물흐물해질 수는 없어. 하고 다짐하면서.
5.
오늘 아침에도 자전거를 타고 레슨에 가야 했다. 고민하면서 오늘은 그냥 걸어 갈까. 하고 자전거 바퀴를 만져보았는데 몰랐던 사실을 알게되었다.
자전거 바퀴에 바람이 빠져서 누르면 쑥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게 언제부터?
6.
아빠가 자전거 바퀴에 바람을 넣어주었다. 레슨실로 가는 길에 오랜만에 두 다리가 가뿐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동네 언덕을 두 개 넘었다. 예전 내가 알던 그 언덕이 맞았다.
한 번도 자전거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나에게서 원인을 찾으려고 했는데 이런 거였다니. 한 달동안 나는 꽤 성실하게 나를 원망했었다.
알고 보니 필요한 건 근력 운동도 각오도 철학도 아니었었다. 그냥 바람이었구만. 바람 좀 넣으니 날 숨가쁘게 했던 자전거길이 다시 귀여운 언덕이 되었고, 나는 평소처럼 그냥 조금 덜 진지한 어른이 되었다.
앞으로도 일찍 일어나는 어른은 못되겠지만 그래도 자책하기 전에 바퀴부터 한번 눌러보는 사람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비오는 날에는 일찍 일어나긴 해야 할 것 같다. 비 오는 날까지 자전거 탓을 할 수는 없으니까. 마른 날에 인생이 힘들면, 일단 어디든 바람부터 넣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