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오전 9시, 회의실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는다.
"야, 김 대리! 이걸 기획안이라고 가져온 거야?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패기가 없어!"
박 부장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핏대를 세우며 책상을 내려치는 모습은 흡사 정글의 포식자 같다. 신입 사원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다.
하지만 소리 지르는 그 순간, 테이블 아래서 미세하게 그의 손끝이 떨렸다.
그리고 주말 내내 단톡방에 "우리 팀 이번 분기 실적 어쩌냐"며 전전긍긍하던 그의 불안한 메시지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고함은 우리를 향한 공격이 아니라, "나 좀 살려줘, 나 아직 안 죽었어! 나 무시하지 마!"라고 외치는 절박한 '비명'이 아닐까?
그는 사자인 척하는 겁쟁이였다.
겁쟁이 사자의 포효를 들으며, 나는 조용히 마음속 서재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학창 시절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던 그 유명한 문장이 박 부장의 정수리 위로 겹쳐 보였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지금 박 부장은 갇혀 있다. '과거의 성공 방식'과 '상명하복'이라는, 이제는 화석이 되어버린 단단한 알 껍질 속에 말이다.
세상은 변했다.
AI가 기획안을 쓰고, 90년대생들이 리더의 논리를 따져 묻는 시대다.
알 껍질은 점점 좁아져 숨이 막혀오는데, 그는 아직 스스로 껍질을 깰 힘이 없다.
결국 그가 내지르는 고함은 강자의 호령이 아니었다. 알을 깨지 못한 새가 좁은 공간에서 버둥거리는 처절한 몸부림이자, 질식 전의 발악이었다.
그가 부숴야 할 건 자신의 낡은 세계인데, 애먼 부하 직원들의 멘탈만 부수고 있다는 사실이 이 비극의 핵심일 뿐이다.
궁금해졌다. 도대체 40대 중반의 가장이 회사에서 저토록 핏대를 세우며 화를 내는 진짜 심리는 뭘까?
나는 조용히 AI에게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박 부장의 정신 분석을 의뢰했다.
"부하 직원에게 습관적으로 화를 내는 상사의 심리를 분석해 줘. 이게 리더십이야, 아니면 공포야?"
AI의 답변은 소름 돋게 냉정하고 명쾌했다.
"그것은 전형적인 '투사'입니다. 자신의 내면이 불안할수록 외부(타인)를 강하게 통제하려 듭니다. 그의 분노는 '네가 일을 못해서'가 아니라, '내가 도태될까 봐' 두려워서 나오는 방어 기제입니다."
그렇다. 그는 호랑이인 척하는 겁쟁이였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세상(AI, 변화)에 대한 공포를, 만만한 김 대리를 통제함으로써 해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권위라는 껍질을 세계의 전부로 착각하고 있기에, 껍질에 금이 가는 것(부하의 반론)을 죽기보다 두려워하는 '늙은 싱클레어'일 뿐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의 소소한 반란은 시작되었다. 나는 오늘부터 박 부장의 고함에 상처받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를 '알을 깨느라 고생 중인 늦깎이 사춘기 소년'으로 바라보기로 했다.
이제 그가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지르면 나는 속으로 조용히 주문을 외운다.
"아, 부장님. 오늘따라 껍질이 너무 단단해서 힘드신가 보네요. 참 짠합니다."
그의 화를 내 부족함 탓으로 돌리지 않고, 그저 그가 겪는 '성장통'으로 바라보는 것. 이것이 나의 우아한 거리두기이자 가장 강력한 방패다.
그는 나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 살려달라고 처절한 구조 신호를 보내는 중이니까.
나는 결심했다.
그 껍질 속에서 썩지 않고, 기어이 태어날 것이다. 비명 대신 노래를 부르며, 아주 우아하게 알을 깨고 나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