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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희 May 24. 2016

에디 히긴스를 듣는 날

현실에 환상의 색채를 더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학교 다니기를 너무나 싫어하던, 하지만 12년 내내 개근상을 탔던 평범한 학생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그런지 이상하게 중, 고등학교 시절의 일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보다 더 어릴 때, 그러니까 초등학생이던 시절이나 그 이전의 일은 그래도 기억나는 것이 많은데, 유독 그때만 그렇다. 영화 <맨 인 블랙>에서 기억을 잃어버리는 불빛 같은 걸 본 사람처럼 그때의 일은 거의 기억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고등학교에서 들었던 수업 중 유일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수업이 하나 있다.


음악 시간이었다. 외모와 체형이 펭귄 같던 남자 음악 선생님은 그날 이탈리아 로마인지 어딘지의 콜로세움에서 열린 오페라 <투란도트>의 야외 공연 실황 비디오를 틀어 주었다. 수업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다른 아이들처럼 나도 숙면을 취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잘 수가 없었다. 남쪽 바닷가 소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그 비디오는 충격 그 자체였던 것이다. 에로 비디오를 틀어줬어도 그 정도로 충격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아니려나). 

오페라의 내용도 (의외로) 재미있었지만, 그보다는 비디오의 처음과 끝부분에 카메라가 먼 곳에서 콜로세움을 비춰주는 장면이 압권이었다. 그것도 무대가 아니라 객석 말이다. 흰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여러 가족들이 콜로세움의 객석에 앉아 집에서 싸온 샌드위치 같은 것을 먹으면서 오페라를 보고 있었다. 아, 이것이 원조란 거구나. 오페라를 야외에서, 청바지를 입고,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거구나. 그래도 되는 거구나. 남쪽 바닷가 소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런 것이 내가 앞으로 이루어야 할 행복일지도 모르겠다는 느낌도 받았을 것이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행복은 이런 것이다. 책이 있고 커피가 있고 날씨가 좋고 실내는 쾌적하고 나는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좋은 책을 읽으며 에디 히긴스를 듣는다. 재즈를 좋아하지만 재즈에 대해서 많이 알지는 못한다. 에디 히긴스 정도면 언제 들어도 괜찮다. 귀에 거슬릴 일도 없고 다른 일을 하기에도 좋다. 마음이 차분해지기도 하고 즐거워지기도 한다. 지나치게 진지하거나 지나치게 울적하지도 않다. 나에게는 그 정도면 족하다. 그러고 앉아서 ‘이 정도면 성공적인 인생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 


그 시절 많은 부모님들이 그렇듯이 나의 부모님도 자식을 방임해서 키웠다. 학원을 보내지도 못했고 과외를 시킬 수는 더더욱 없었으며 자식의 스케줄을 부모가 짜는 일도 없었다. 학교가 끝나면 가방을 던져놓고 해가 질 때까지 어디서 뭘 하는지 몰라도 부모님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 나의 부모님에게서 배운 것이 있다면 아마도 넉넉하지 못한 환경 속에서도 멋을 찾는 법일 것이다. 그들은 많이 배운 사람들도 아니고 내가 고등학교 때까지도 냉동피자 한 판을 사주려고 해도 몇 번을 들었다 놓았다 고민을 해야 할 정도로 팍팍한 살림살이를 꾸려나가야 했지만, 그런 환경 속에서는 기적적일 정도로 ‘멋’을 찾을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엄마는 아빠의 생일날에는 언제나 요리책을 보면서 직접 만든 돈가스와 수프로 식탁을 차렸다. 포크와 나이프, 하얀 식탁보, 물병에 꽂은 장미꽃 한 송이, 와인글라스도 잊지 않았다. 시골 도시에서 가뭄에 콩 나듯 열리는 문화행사에도 아이들을 꼭 데리고 가려 했고, 차도 없이 먹을 것을 잔뜩 싸서 양손에 들고 등에는 텐트를 짊어진 채로 주말마다 산으로 바다로 들로 놀러 다녔다. 


아빠가 수개월에서 1년 정도 해외 근무 생활을 하고 돌아올 때마다 엄마는 아파트 1층부터 우리 집이 있는 3층까지 벽에 환영의 메시지를 달아 두었다. 가족의 생일에는 신문지를 깐 찜통에 카스텔라를 쪄주었다. 아빠는 온 동네 사람들을 다 초대해 외국에서 찍어온 슬라이드 필름을 영사기에 넣고 벽에 비춰 보여주었다. 근처 작은 교회의 목사님이 이사를 가면서 클래식 레코드를 박스째로 버리자 그걸 주워온 아빠는 매일 매일 음악에 빠져 지내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 집에 차가 없어도, 우리 집이 산 아래의 허름한 아파트라도, 고등학교 때까지 남동생과 같은 방을 써야 했어도, 엄마가 공사장에서 돌을 나르고 공장에서 냉동식품을 포장하는 일을 해야 했어도 내가 그렇게 가난한지는 모르고 자랄 수 있었다. 


냉철한 현실감각을 갖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에 환상의 색채를 더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도 1년의 구석구석 보물찾기처럼 보물을 숨겨 두었다. 봄은 소풍의 시즌이다. 이 좋은 계절이 다 가기 전에 즐겨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바쁘다. 유부초밥이나 샌드위치, 아니면 그냥 주먹밥이나 맨밥에 남은 반찬 같은 것들을 도시락통에 가득 채운다. 도시락을 쌀 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빈 공간이 없이 꽉꽉 채워 넣어야 한다는 거다. 그래서 도시락통은 큰 것보다는 작은 것이 차라리 낫다. 그러지 않으면 들고 다니다 안의 내용물이 뒤섞여 버린다. 


피크닉 매트를 챙기고, 밥을 먹을 때 깔 얇은 천도 챙긴다. 크림색 바탕에 붉고 가는 줄무늬가 격자를 이루는 이 천은 신혼여행지였던 일본 유후인의 한 포목점에서 산 것이다. 나는 천을 모으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 천은 자투리로 싸게 팔던 것의 무늬가 마음에 들어서 샀다. 반은 잘라서 손바느질로 듬성듬성 꿰매 거실 창문의 아래쪽에 밸런스 커튼으로 달아두었다. 이 천 때문에 집 앞 골목을 지나는 사람들과의 시선이 차단된다. 또 우리 집을 좀 더 따뜻해 보이게 한다. 


그 천의 반은 소풍 갈 때 테이블보 비슷하게 쓰기에 딱 적당하다. 얇아서 빨아도 금방 마른다. 색이나 무늬도 피크닉에 딱이다. 그 천 위에 도시락을 펼쳐놓고 먹는다. 밖에서 먹는 밥은 언제나 맛있다. 햇살과 바람과 나무 냄새 풀 냄새가 밥에 뒤섞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야외에서는 별로 일을 하지 않는다. 그냥 누워서 커피나 맥주를 홀짝거리거나 책을 읽는다. 아이들과 공을 차기도 한다. 


여름에 해수욕장에 가지 않은 지도 꽤 되었다. 가봤자 교통 체증이나 높은 물가와 엄청난 인파에 시달릴 것이 빤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 아이들은 돌아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슬슬 걸어서 동네에 있는 시립 야외 수영장에 간다. 방학이나 주말은 미어터지기 때문에, 그럴 때는 근처 계곡으로 간다. 여긴 무료다. 

가을이면 자라섬에서 열리는 재즈 페스티벌에 간다. 나에게 이건 진정 ‘럭셔리’한 일이다. 누군가가 샤넬의 백을 사거나, 특급호텔에서 휴가를 보내는 거나 마찬가지의 일이다. 3일이건, 4일이건 잔디밭에 눕거나 앉아서 각국의 아티스트들이 연주하는 재즈를 듣는다. 아니, 듣기보다는 흠뻑 젖는다. 딴 생각을 하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고, 뭘 먹기도 하고, 잠을 자기도 한다. 그런 것이 너무나 마음에 든다. 눈을 부릅뜨고 집중해야 할 것 같은 클래식음악 연주회나, 어쩐지 열광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록 페스티벌과는 다르다. 


그럴 때면 내가 마치 이탈리아의 콜로세움에서 <투란도트>를 보던 한 무리의 이탈리아인 가족을 꾸린 기분이 든다. 길다고 하면 긴 세월과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나는 내가 동경하던 행복의 세계로 들어왔다. 결국 이 정도면 성공적인 인생이 아닌가 싶다. 


갑자기 인생은 자기 합리화의 과정이라고 했던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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