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 없이 못 살아 정말 못 살아
지난해 노벨화학상은 존 구디너프, 스탠리 위팅엄, 요시노 아키라 등 세 명의 과학자가 공동으로 수상했다. 그들이 평생 연구해 온 분야는 '리튬 이온 전지'. 요즘 특히 핫하다는 2차 전지다. 노벨위원회는 이들이 휴대기기, 노트북, 전기차 등에 들어가는 전지를 개발하는데 공을 세운 점을 높이 평가했다. 특히 수상 선정 발표에서 사용한 "They Created the Rechargeable World"라는 표현은 한동안 화제가 된 바 있다. '그들은 충전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냈다'. 미래 사회를 이끌어가는 것이 정보기술(IT)이라면, 그 기술을 실제로 구현하는 힘은 전지, 즉 '배터리'에서 나온다는 점을 학계가 공고히 인정해 준 셈이다.
이제 사람들은 컴퓨터와 핸드폰, 시계를 들고 바깥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전지는 이미 예전부터 화학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바꾼 형태로 에너지를 '휴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가죽시계에도 전지가 들어 있고, 스마트워치에도 역시 전지가 들어 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시대가 변하는 동안 전지 기술 역시 함께 발전해 온 셈이다. 외부에서 긴급한 상황에 스마트폰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하다못해 정전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알 수 있을 것이다. 일상은 수많은 전자제품들로 유지되고 있고, 이들을 구동하는 것은 '전기'다.
전기를 얻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전자제품을 사용할 수 있다면 그건 전기를 저장해둘 수 있는 '전지'가 있기 덕분이다. 아무리 사양이 높고 성능이 뛰어난 제품도 전기나 전지가 없다면 OFF 상태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앞서 말한 지난해 노벨화학상 수상 내용과 2020년 전기차 시장의 급격한 성장 가도는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전지라고는 '건전지' 말고는 아는 게 없지만 천천히 조금씩 살펴봤다. 내가 아는 그 전지가 정말 미래 사회를 바꿀 힘이 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전지는 크게 1차 전지와 2차 전지로 구분돼 왔다. 우선 1차 전지는 쉽게 말해 '한번 사용하고 나면 재사용이 불가능한 배터리'를 말한다. 1800년 이탈리아의 알렉산드로 볼타가 만든 '볼타 전지'가 최초로 알려져 있다(볼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인류는 지금까지도 전기 단위로 볼트를 사용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은 '건전지', '에너자이저'등의 알칼리 전지 일 것이다. 1차 전지의 경우 일회용이기 때문에 생산할 때마다 새로운 자원이 필요하고, 소비자의 경제적 부담도 적지 않다. 또한 방전된 전지 내부에 남아 있던 화학 물질은 환경오염의 요인이 되는 등 많은 한계가 있었다.
2차 전지는 1차 전지의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쉽게 말해 2차 전지는 방전된 후에도 다시 충전해서 사용할 수 있는 배터리를 말한다. 최초의 2차 전지는 프랑스의 플랑테가 1859년 발명한 납축전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70~1980년대 구디너프와 위팅엄의 리튬 관련 연구 발표를 계기로 2차 전지는 '리튬이온 전지'로 인식되게 된다. 리튬이온 전지는 다른 배터리보다 가벼운 데다, 카드뮴, 납, 수은 등의 환경 규제 물질이 들어 있지 않다. 충전 가능 용량이 줄어드는 메모리 효과도 적은 편이라 여러모로 1차 전지보다는 높은 출력이 가능하다.
2차 전지는 리튬 이온이 양극재와 음극재 사이 전해질을 타고 이동하면서 전기가 발생한다. 쉽게 말해 충전은 양극에서 음극으로, 방전은 음극에서 양극으로 이동할 때 일어난다. 지금의 친환경 전기차에 들어가는 배터리도 바로 이 리튬이온 배터리이다. 1985년 요시노 아키라는 리튬의 경량화에 성공해 최초의 상용 리튬이온 배터리를 만들어냈다. 일본 전자회사 소니는 요시노의 연구 내용을 바탕으로 1991년 충전 가능한 배터리가 들어있는 '워크맨'을 출시해 엄청난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전기차를 필두로 한 신기술들은 대부분 리튬이온 배터리를 필요로 한다. 이에 따라 리튬 수요량은 2025년까지 2017년 대비 약 3배 증가한 71만 톤까지 증가할 전망이다. 그러나 리튬은 제한된 자원인 데다 전체 생산량의 75%가량이 남미 칠레 부근에 치중되어 있어 수요 대비 공급량이 매우 부족한 상황이다. 이에 국내 기업인 포스코는 2010년 리튬 직접 추출 기술을 세계 최초 개발한 후 약 십 년간 발 빠르게 리튬 상업화 제반 마련을 위해 힘써왔다. 또한 내년부터는 2018년 광산권을 인수한 아르헨티나 염호(소금호수)에서 리튬을 생산할 예정이다. 향후 포스코가 생산 가능한 리튬은 연간 5만 5000톤(전기차 약 110만~120만 대의 배터리 제조 가능)으로 추정된다.
최근 '전지'가 더 자주 거론되는 이유는 전지와 전기차 시장이 서로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전기차는 기존의 석유나 엔진 대신 배터리와 모터 등의 전기를 동력으로 운행하는 자동차를 말한다. 전세계가 친환경 이슈가 대두되면서 자동차 업계에는 완성차 시장 이후 차세대 모빌리티, 즉 전기차가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 전기차 시장에서 배터리 성능은 차의 성능에 바로 직결될 만큼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리튬 금속산화물로 구성된 양극재는 전기차 원가의 40∼45%나 차지하고 있어 생산비용 면에서도 배터리 기술 향상이 필요한 상황이다. 특히 리튬이온 배터리를 구성하는 부품과 소재는 기술주로 함께 주목받는다.
이렇게 배터리-전기차 기술 이슈가 부상하자 테슬라의 '배터리데이' 역시 큰 관심을 모았다. 파나소닉, LG화학, CATL 등 세계에서 배터리를 조달받던 테슬라가 올해 초부터 언급해온 자체 배터리 생산 사업 계획을 밝힐 것이란 예측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난 22일 진행된 실제 '배터리데이'의 발표를 보면 이른바 '로드러너 프로젝트'로 불렸던 해당 사업 계획은 거시장기적 목표 수립 정도에 그쳤다. 많은 투자자들이 실망하긴 했지만 그만큼 전기차 생산기업들이 '배터리 자체 생산'에 사활을 걸고 있음을 알린 계기는 됐다.
국내에서는 LG 화학의 전기차 배터리 개발이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지난 2009년 현대자동차의 아반떼 하이브리드카에 리튬 폴리머 전지를 단독 공급하는 등 LG 화학은 무려 1만 5000개가량의 배터리 관련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작년 말 글로벌 자동차업체 제너럴모터스(GM)와 함께 미국에 전기차 배터리셀 합작법인을 세우고 총 2조 7000억 원을 투자해 배터리 생산 공장을 짓기로 결정해 이슈가 됐다. 올해 말 12월1일자로 LG 화학으로부터 배터리 사업을 전담하는 신설법인 'LG에너지솔루션(가칭)'이 분사해 공식 출범할 예정이다.
전기차 배터리 연구는 업계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지난 22일 세계 유명 학술지 '네이처 에너지(Nature Energy)'에는 한양대 에너지공학과 선양국 교수 연구팀의 '전기차 배터리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원천기술 연구결과'가 실려 주목을 받았다. 쉽게 말해 선 교수팀이 개발한 'NCX 양극재' 기술을 배터리에 사용하면 1회 충전으로 600∼700km 주행이 가능하고, 20년 동안 사용해도 90% 이상 성능이 유지할 수 있다. 양극재는 전기차 전체 가격의 20%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이번 연구 결과는 원가절감과 주행거리 증대로 전기차 시장을 한 단계 더 도약시킬 것이란 평가를 받는다.
일본 토요타 자동차는 교토대와 함께 공동으로 전기차 배터리 연구를 추진중이다. 올해 8월에는 플루오라이드-이온을 활용한 배터리 시제품을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발표 내용에 따르면 이번 시제품은 작은 부피로도 기존 리튬이온 배터리에 비해 단위 무게당 약 7배의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다. 이론대로라면 한 번 충전으로 도쿄에서 후쿠오카까지 1000km 이상을 달릴 수 있는 전기차가 등장할 예정이다. 이번 연구 내용이 상용화된다면 이 역시 전기차의 주행 범위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리튬의 특성이 지닌 다양한 한계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리튬이온 배터리는 온도나 압력, 누액(배터리 내부의 액체 전해질이 밖으로 새는 현상) 등에 취약한 편이다. 이러한 불안정성은 종종 '발화' 등의 사고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리튬이온 배터리에는 안전성을 높이기 위한 부품이나 장치들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이러한 부품들은 배터리 부피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데 지장을 준다. 특히 배터리가 주행거리와 직결되는 전기차의 경우 리튬이온 배터리의 불안정성을 보완할 차세대 배터리 기술이 꼭 필요한 실정이다.
이러한 차세대 배터리 기술을 위해 대두된 자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소금, '나트륨 전지'이다. 나트륨은 리튬과 비슷한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지구 상의 어느 곳에서나 생산할 수 있다는 장점이 크기 때문이다. 향후 나트륨 배터리는 무게감이 있고 전압이 낮은 부분을 보완해야 하지만 차세대 자원으로 거론된 만큼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특히 작년 6월에는 KAIST 신소재공학과 육종민 교수 연구팀이 용량과 수명이 늘어난 나트륨 이온 전지를 개발해 세계 학술지 '사이언스' 6월호 표지논문에 실리기도 했다.
삼성 SDI 경우 최근 '전고체 배터리'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전고체 배터리란 기존의 리튬이온 배터리에 비해 에너지 밀도가 높은 전지를 말한다. 폭발이나 화재의 위험성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배터리에 안정성을 키우는 부품수를 줄일 수 있고, 그만큼 확보한 공간은 배터리 자체 용량을 키우는 데 사용할 수 있다. LG화학의 경우 또다른 차세대 배터리로 거론되는 '리튬-황 배터리'를 2025년 생산을 목표로 개발중이다. 지난 10일에는 리튬-황 배터리를 탑재한 무인기로 총 13시간 비행 중 7시간을 일반 항공기가 운항할 수 없는 성층권을 비행하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카메라, 계산기, 녹음기, 게임기, 타자기, 컴퓨터 등의 전자 제품은 이제 스마트폰 속에 다 들어 있다. 뿐만 아니라 노트북, 전기차, 로봇, 사물인터넷 등이 발전할수록 저장된 전기 에너지를 휴대하는 기술은 꼭 필요하다. 다행히 2차 전지가 탄생한 이후에는 충전된 전지만 있으면 어디서든 전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렇게 무한한 가능성과 간편함을 전지 기술이 실현했음에도 정작 보조 배터리는 아직까지 들고 다녀야 한다는 점이다. 야외에서 오랜 시간 노트북을 사용하기 위해서도 역시 어댑터도 챙겨야 한다. '전지를 위한 전지'가 필요한 상황을 늘 고려해야 한다는 숙제가 남아 있으니 전지 기술이 풀어야 할 숙제가 아직 많은 듯하다.
그래도 그 사이 무선으로 보조 배터리를 충전하는 기술까지는 도착해 있다. 특히 지금처럼 전기차와 전지가 지금처럼 함께 시너지를 내는 구조라면 앞으로 더 빠른 속도로 기술이 발전해갈 것이다. 어쩌만 조만간 전기차로 길 위를 달리면서도 집에 저장해 둔 에너지로 전기차를 원격으로 충전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영화 같기만 했던 많은 일들이 이미 다 현실이 되었으니 왠지 이런 상상 역시 영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