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사랑 소극장과 새로운 전통예술 그리고 휴먼스케일
1978년 2월 어느 날 종로구 원서동의 조그만 소극장에서 아주 특별한 무대가 펼쳐졌다. 이 무대는 네 명의 남사당 청년 후예들을 불러들였고 독보적인 민속학자 심우성을 끌어들였는데, 청년들은 네 개의 타악기를 동원하여 재래 풍물의 열정과 기운을 현대적으로 풀어헤쳤고 민속학자는 익숙하고도 낯선 청년 치배들의 풍물연희에 사물놀이라는 소박한 이름을 붙여주었다. 80년대 이래 도시적 전통예술과 대학가 민중문화를 풍미했던 사물놀이가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꽹과리, 장구, 북, 징이라는 네 개의 타악기가 조그마한 무대의 소박한 시간을 비우고 채워나가던 순간 불가의 의식도구였던 범종(梵鐘),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은 사물(四物)이라는 이름을 그들에게 조용히 넘겨줘야만 했다. 지난 세기 우리나라 전통예술의 가장 빛나는 성취 하나가 탄생한 순간이다. 사물놀이를 잉태한 조그만 소극장은 이름하야 공간사랑. 그때도 지금처럼 담쟁이가 우거져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건축가 김수근은 1972년 공간사옥을 짓고 1977년 증축하여 지하에 소극장과 갤러리를 마련하였다. 지난해 고인이 된 예술평론가 박용구에 의하면 1950년대 동경 유학시절에 김수근이 이미 착상했던 ‘예술가의 집’이라는 오랜 꿈을 실현한 공간이다. 거기에서 김수근과 동료들은 가장 현대적인 공간을 만들고 가장 도시적인 건축과 예술을 소환했다. 그때는 젊었고 지금은 고전이 된 굵직한 예술가들이 그때 거기에 모여들었고 우리나라 현대 예술의 새로운 저류가 지하에서 샘솟아 이내 도도한 물길을 만들어냈다. 엉키고 섞이는 물길을 따라 음악과 무용, 미술과 문학이 돛을 펼쳤다. 그들은 서로의 정신을 복제하고 혁신을 주창했는데 이 새로운 행렬에 우리 고유의 전통예술도 닻을 올려 함께 했다. 공간사랑에 등장한 전통은 박제(剝製)의 오명을 벗고 꿈틀대는 생명체로 되살아났다. 김수근이 말했다. ‘전통 창조의 주체는 민중이다.’
이 때 바깥 공간에서는 양 갈래 길 위에 선 서로 다른 전통예술이 제각각 몸집을 불려나가고 있었다. 단순하게 말해서 박제화의 길 그리고 정치화의 길이었다. 원서동에 공간사옥이 탄생했던 그해 농촌에서는 전국적으로 새마을 미학이 복제되기 시작하여 민중적 전통을 낡은 것으로 치부해 버렸다. 또한 1960년대 이래의 문화재 보호제도 성숙은 역설적이게도 전통문화를 민중의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전통문화의 박제화를 부추겼다. 1974년에 시작된 제 1차 문예진흥 5개년 계획은 국학, 전통예술, 문화재 분야로 특정된 이른바 민족사관 정립사업에 전체 예산의 70%를 할당하였다. 안타깝지만 이제 전통예술의 활성화를 가늠하는 잣대는 민중의 공감과 꿈틀대는 생명력이 아닌 정부 지원금의 규모로 대체되었다. 당대의 권력자들은 전통예술을 전체주의적인 통치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했고 전통예술 제도권의 유력자들은 저도 모르게 민중이 아닌 권력을 좇는 것이 습관화 되었다. 바깥 공간의 또다른 길 위에선 권력에 저항하면서 민중을 향해 힘껏 사위를 뻗는 전통예술이 날개를 휘젓기 시작했다. 당대 대학가의 청년들은 온갖 불편과 위험을 감수해 가면서 탈춤을 추었고 풍물을 두드렸으며 마당 위에 굿판을 펼쳤다. 통치수단에 맞선 저항수단으로서 전통예술을 앞장서 소환했고 도구화했다. 공간사랑의 바깥은 지나치게 음습하거나 걱정스러울 정도로 뜨거웠던 것 같다.
한편,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공간사랑은 그 소박함과 인간됨으로 우리나라 전통예술과의 합(合)이 참 좋았다. 안락한 의자도 현란한 조명도 요란한 음향시스템도 없었다. 하지만 조그만 공간은 연희자와 관객 그리고 관객과 관객 사이의 기운을 전달하고 또 모으는 데에 제격이었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척도가 되는 휴먼스케일(human scale)이 성실하게 구현된 공간사랑 건축철학의 결과일 것이다. 여러 도시건축학자들이 상대방의 표정을 느낄 수 있는 친근감 있는 거리를 15미터 이내로 정의하듯이 소극장 공간사랑은 딱 13미터 크기의 감성적 휴먼스케일이 구현된 공간이었다. 복잡한 장치 대신 몸 대 몸, 호흡 대 호흡으로 연희를 펼치고 깊은 공감을 주고받기에 최적이었다. 전통예술이 자신의 가치를 분출하기에 더 없이 훌륭한 적정 공간이었다. 당신은 판소리와 마이크가 어울린다고 생각하는가. 가야금소리, 해금소리, 풍물소리가 육중한 스피커와 어울린다고 생각하는가. 아닐 것이다. 소리꾼의 한 자락, 국악기 한 장단을 옆자리에 앉아 가만히 듣다 보면 절로 깨닫게 된다. 춤과 몸짓은 또 어떤가. 화면을 통해 보면 따분하기로, 대극장에서 마주치면 심심하기로 제일강산인 이 움직임들을 휴먼스케일로 마주친다면? 누구나 한순간에 매혹되고 그것의 깊은 맛을 느끼게 된다. 전통예술의 참멋에 대한 매혹과 깨달음이 교차하기에 제격인 휴먼스케일 공간. 바로 공간사랑이었다.
1970년대의 소극장 공간사랑은 이처럼 가장 현대적인 외양의 건축물이었으되 동시에 가장 전통적인 내면의 공간이었다. 그러므로 도시적 전통예술이 찾아들고 개화하여 마침내 열매를 맺게 되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섭리였으리라. 소중한 사람들이 찾아왔고, 찾아왔으므로 소중한 사람들이 되어 우리가 널리 알게 된 이들이 있다. 공간사랑에서 사물놀이를 만들고 이끈 김덕수 그리고 김용배. 알다시피 사물놀이는 20세기가 발명해낸 가장 대중적이고 현대적인 전통예술이 되었으며 여전히 방방곡곡에서 신참내기 치배들을 줄기차게 복제해내고 있다. 어디 그들뿐인가. 장터 뒷골목으로부터 시작해 극장을 넘어 민주화의 열기가 분출하던 대학 광장에까지 군중을 몰고 다니며 지극히 토속적인 익살과 해학을 펼쳐낸 공옥진도 있다. 1980~90년대 우리 전통연희의 가장 흥겨운 순간을 꼽는다면 첫 번째 자리는 단연코 그녀의 것이리라. 다만 사물놀이와 달리 공옥진은 더 이상 복제되지 않는데 1인 창무극으로서 아주 독특했던 그녀의 예술은 애시당초 복제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간사랑을 만난 것이고 그래서 군중의 마음을 얻은 것이기도 할 터. 공히 1978년의 일이었다. 1980년에는 만신 김금화가 이곳을 찾아왔다. 1박 2일 동안 대동굿을 펼쳤고 사람들은 크게 감응했다. 1983년에는 동해안을 주름잡던 박수무당 김석출도 이곳을 찾았다. 그는 이미 김용배의 가락에 자신의 유전자를 심어두었던 바, 이곳에서 자신의 후예이자 사물놀이의 선조들과 협연의 자리를 만들어냈다. 김금화의 말처럼 공간사랑이라는 시공(時空)을 통과하면서 무당굿은 미신에서 종합예술이 되었다.
혹시나 과도한 상찬이었을까 싶어 지나온 길을 수치로 다시 살펴보니 1977년부터 1992년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15년간 4180회 그러니까 매년 300회 가까운 무대가 열렸단다. 매일 밤 숱한 도전과 좌절, 탄성과 교감이 거기에 있었다는 말이다. 그게 얼마나 많은 이들의 꿈이었는지 온전히 짐작하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지금 자취로 남은 것은 서른 평 남짓한 공간에 불과하지만 그 흔적을 더듬어 본다면 7-80년대 전통예술의 사위와 열정이 오롯이 새겨진 매우 유서 깊은 공간임이 분명하다. 서울시는 공간사옥을 미래유산으로 선정하기도 했는데 이처럼 공간사랑은 건축유산, 유형유산으로의 가치는 물론이거니와 도시화된 전통예술, 무형유산으로서의 가치를 깊게 품은 장소로도 남아 있다. 박제화되지 않은 유산, 참된 의미의 살아있는 유산은 애당초 무형자산과 유형자산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함께 전승되는 것이 순리이다. 그런 맥락에서 전통예술 재발견의 역사적 공간으로서 소극장 공간사랑은 그 자격이 충분했다.
여름이면 담쟁이넝쿨의 푸르름이 시원하고도 장쾌하다. 언제 저렇게 질긴 뿌리를 촘촘하게 드리웠을까. 처음 담쟁이를 심을 때에도 언젠가 그렇게 될 줄은 알았겠지만 처음에는 한뼘 되지도 않는 조그만 잎사귀들이 저 높은 벽을 언제 다 타고 오를까 몰라 긴긴 시간 애를 태웠으리라. 예술도 이와 같아서 거대한 제도의 벽을 깨뜨리는 일은 언젠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예술가의 숙명임을 알고 있지만 처음 그 벽을 오를 때의 황망함과 두려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1970~80년대 우리 전통예술이 그 두려움을 혁파하는 데 혁혁한 역할을 담당한 하나의 공간이 지상의 광장이었다면 다른 하나의 공간은 바로 원서동 지하의 공간사랑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제는 먼 바깥에서도 숱한 담쟁이들이 서로 손을 부여잡고 뿌리를 지탱하면서 저마다의 거대한 벽을 오르고 있다. 그중 누군가는 공간사옥의 담쟁이처럼 또 하나의 벽을 푸르게 뒤덮어 버리겠지. 그러므로 우리나라 전통예술의 또 다른 미래는 국공립 기관의 조직도가 아닌 이름 없는 넝쿨들 속에서 어느 여름날 푸르게 피어오를 것이다. 그때 우리는 어느 넝쿨에서라도 공간사랑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으리라.
<월간 미르>, 국립극장, 2017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