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나라에서 온 빨간 음식
1.
레드벨벳이 컴백을 했습니다.
한창 빨간 맛에 꽂혀있던 여름이 생각난다. 도쿄에 갔던 여름에 레드벨벳 ‘hit that drum’과 ‘빨간 맛’에 꽂혀있었다. 시부야든, 다이칸야마든, 지유가오카든 어느 거리든 빠빨간맛궁금해허니만 주구장창 듣고 있었다. 오늘은 빨간 맛에 대해 써보고자 하는데 레드벨벳 노래에 대한 진지한 고찰은 아니고 빨간 음식에 대한 것이다.
빨간 나라에서 온 빨간 음식, 훠궈가 그 주인공이다.
2.
빨간 맛 말고도 여름 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또 하나 있다. 해외봉사 프로그램으로 2주 동안 중국에 있던 여름이었다. (여름이었다…) 중국에서 이열치열로 훠궈 먹었느냐? 당연히 못 먹었으니 한 맺혀서 구구절절 적고 있는 것이다.
첫날 공항에서부터 지각한 팀 멤버로 인해 우리 팀은 5개의 팀 중에서 총괄님께 단단히 미운털이 박혔고, 밥도 맨날 제일 마지막 순서로 먹었다. 외부 식당은 아니고 호텔 식당에서 먹었는데, 뭐가 서러웠냐면 앞 순서들이 볶음밥 다 먹으면 할당량이 끝나서 뒷 순서는 맨밥 먹어야 했다. 종업원에게 차오판 달라고 해도 없다면서 미판 줌… 아침 식사 때도 요거트가 맛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우리 순서가 되어 가보면 요거트는 코빼기도 안 보였다. 수박은 많이 줬다 식사마다 수박은 두 쪽씩 꼬박꼬박 먹은 거 같다. 웬 일이야 이 지역이 수박이 싼가… 했는데 어디 물어보니까 진짜로 그 성(우리나라의 도 개념)에서 그 동네가 수박이 제일 많이 난다고 했다. 어쩐지. 그리고 누가 수분 충전하게 과일 많이 달라고 했는데 총괄님이 수분이 필요하면 물 마시라고 했다. 그래서 매일 아침 다 같이 모여서 물 한 모금씩 맨날 먹고 차 탐. 아 이건 쓰고 나니까 진짜 어이없어서 웃기다…
하루는 문화체험이라고 봉사 일정 말고 팀별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날이 있었다. 우리 팀은 이날마저도 누가 문제 일으켜서 반나절만 문화 체험하고 반나절은 일찍 호텔 돌아와야 하는 페널티가 있었다. 당시 있던 곳은 시안(西安, 서안) 이었는데 이슬람 문화 탐방을 테마로 잡고 청진사와 회족 거리를 가기로 했다. 지하철 타고 청진사 가는 길에 맥도날드 들러서 캐러멜 아이스크림 하나씩 먹고 청진사랑 회족 거리 쓱 보고 공차 가서 밀크티 사 먹고 호텔 돌아오는 길에 중국 햄버거 브랜드 德克士에서 햄버거 포장해서 레크레이션 홀에서 옹기종기 모여 앉아 먹었다. 저녁에 팀별로 브리핑하는 걸 들으니 한 팀이 하이디라오에 갔다고 했다. 가본 적은 없어도 그게 유명한 훠궈 브랜드라는 건 들어본 적이 있었기에 너무 부러웠다. 나도.. 나도 입이 있는데. 나도 훠궈 먹을 수 있는데. 페널티 있던 우리 팀으로서는 절대 소화 못할 만찬 일정이었기에, ‘내 돈으로라도 명동 하이디라오 간다’고 결심을 했다.
3.
전공수업으로 소수민족연구라는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중국의 51개 민족에 대해 하나하나 배우려나? 했지만 그건 아니었고 소수민족 정책의 변화를 배웠던 것.. 같다. 한 번은 갑자기 교수님이 다음 시간에 답사를 간다고 공지를 하셨다. 역사학과나 국어국문학과도 아니고 외국어 전공인 우리가 답사를 갈 일이 뭐가 있담? 어디로 가서 뭘 한다는 거지? 의문투성이였는데, 생각보다 단순했다. 건대 양꼬치 거리로 가서 조선족의 실생활을 연구하는 거였다. 아니, 이런 명목 하에 다 같이 건대에 가서 훠궈를 먹는 것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동기들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건대에 갔다. 훠궈를 처음 먹은 날이었다. 그때만 해도 마라탕이 유행을 타던 때가 아니라서, 이런 셀프 시스템에 약간 낯가리고 버벅거리다가 먹어본 적 있다는 동기들을 따라 재료를 담아왔다. 백탕, 홍탕, 토마토탕에 훠궈를 야무지게 즐기고 ‘교수니임 저희 꿔바로우 시켜도 되나요?’ 여쭤보고 꿔바로우까지 야무지게 먹었다. 교수님 답사 또 가요. 언제 가요?
원래도 자극적인 음식을 좋아하는지라 기가 막힌 이 음식에 꽂힌 후 훠궈를 시작으로 마라탕에도 발을 담갔는데, 같이 마라탕 먹으러 가자고 하면 안 먹어봤다며 망설이는 친구들에게 ‘그럼 일단 훠궈부터 먹으러 가자’고 영업을 했다. 일단 원앙탕(홍탕+백탕)으로 시키고, 홍탕 시도해보고 정 아니다 싶으면 그냥 샤부샤부처럼 백탕에 먹어라. 만약 홍탕이 먹을만하고 향신료도 즐길만하다면 그다음에 같이 마라탕을 먹자. 마라탕도 괜찮으면 그다음으로는 마라샹궈를 먹자. 다단계처럼 치밀하게 계획한 이 코스는 지금도 종종 써먹는 방법이다.
4.
첫 번째로 간 하이디라오는 명동점은 아니었다. 중국에 교환학생으로 있을 때 친구가 관광 겸 나를 보러 놀러 온 적이 있다. 맨날 학생식당 마라샹궈만 먹고살았지만, 정말 제일 맛있는 것들만 먹이고 싶어서 하이디라오에 갔다. 하이디라오는 서비스 경영으로 유명한 걸 알고 있나요? 원래는 기다리는 동안 젤 네일도 해주는데, 나는 네일을 하지 않고 친구는 여행 전 네일을 하고 온 상황이었기에 그냥 그 앞에 준비된 웨이팅 좌석에 앉아서 팝콘을 먹었다. 웨이팅 좌석도 굉장히 넓고 무슨 매실차 같은 음료와 팝콘을 무한리필로 갖다 주셨다. 순서가 되어 들어갔는데 종업원들이 매우 친절하다 보니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중국어 공격에 정신이 아주 약간 혼미했다. 뭐.. 뭐부터 대답하란 거야..?
신중히 고민해서 이것저것 주문을 하고, 면 사리도 추가를 했는데 직접 우리 눈앞에서 수타 퍼포먼스도 보여주시고… 아무튼 흥미진진했다. 이때는 11월이었는데 그때도 후식으로 수박을 갖다 주셨던 게 기억이 난다. 수박 데자뷴데?
맛있게 다 먹고 결제를 할 때가 되었는데 나보고 유학생이냐고 물었다. 맞다고 했더니 유학생이면 할인이 된다며 인증 페이지를 보여주었다. 중국은 장기 비자면 거류증이라는 걸 발급해주는데, 당시 단기 유학 비자라서 거류증이 없던 나는 거류증 번호가 없어서 인증을 할 수가 없었다. 이 내용을 설명을 했더니 학생증을 보여달라고 했다. 꺼내 보여주었더니 알아서 처리를 해주어 10퍼센트 정도의 할인을 받았다. 맛과 친절 모두 사로잡아 기분 좋게 배를 통통 치며 나왔다. 이때 내가 친구에게 하루 5끼 정도를 먹이고 다녀서 다른 친구들이 ‘대체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라고도 했다.
중국에서도 빨간 음식은 쓰촨성으로 통한다. 훠궈 러버로서 본토의 맛을 놓칠 수 없지. 쓰촨의 청두에서도, 청두 옆 충칭에서도 훠궈 집을 찾았다. 소올직히 본고장이라고 해서 딱히 특출 난 점은 못 느꼈다. 훠궈집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많다는 것 정도? 막입인 나로서는 맛은 명동이나 충칭이나 대련이나 비슷했다. 다만 충칭을 끝으로 나는 한 6개월 정도 그렇게 좋아하던 마라샹궈조차 손을 대지 않았는데, 그것은 충칭의 츠치코우때문이다. 옛 건축물들이 남아있는 관광거리인데, 훠궈로 유명한 곳이다 보니 수제 훠궈 소스가 특산물이었다. 그 좁은 골목골목마다 상인들이 마녀의 솥같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큰 솥에 각자 수제 훠궈 양념 소스를 끓여 판매하고 있었는데, 초반 한두 집 정도는 오 신기하다 정도였지만, 이게 그 모든 골목골목이 다 이 훠궈 냄새로 가득 차 있으니 아무리 사랑해도 그 향신료 냄새가 너무 심해서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코로나 극초반이었지만 미세먼지 때문에 kf마스크를 쓰고 나갔음에도, 마스크를 뚫는 향신료 때문에 정말 멀미가 나서 마지막에는 거의 도망 나오듯이 츠치코우를 빠져나왔다. 한국 와서도 마라탕조차 입에도 못 대겠다고 할 정도로 후유증이 셌는데, 피에 마라가 흐르는지 6개월 쿨타임 지나니 다시 잘 먹는다. 아무튼 인상 깊은 기억이었다. 살면서 냄새만으로 어떤 음식에 질려본 게 처음이었다.
5.
빨간 맛의 여름 후로 벌써 몇 번의 여름과 겨울이 지났지만, 항상 다른 맛있는 걸 먹느라 바빠 잊고 있던 그때 다짐이 어느날 갑자기 떠올랐다. 아 맞다 우리 훠궈 먹어야 하는데. 봉사 같이 했던 언니들이랑 이번 겨울에 훠궈를 먹었다. 같이 먹은 건 이제야 처음이었다.
훠궈는 먹고 나오면 머리카락까지 냄새가 밴다. 인턴으로 회사 다닐 때도 점심으로 훠궈 먹고 오곤 했는데, 냄새를 가리려 화장실에서 섬유탈취제로 샤워를 하고 들어가곤 했다. 내가 정말 좋아해서 그만두기 전에 마지막의 마지막 식사로도 훠궈 먹으러 가고 그랬다.
-점심 뭐 드세요?
-아 저희 오늘 훠궈요
-점심으로 훠궈요?
-넹
그 집은 후식으로 주는 요거트 아이스크림이 참 맛있었다… 아르바이트 다닐 때도 동료들에게 ‘우리 훠궈 먹으러 가면 안돼?’ 하고 하이디라오에 간 적이 있다. 잘 먹고 나서 후식으로 주는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 나오는데, 동료가 ‘중국에서 이거 먹어봤어?’라고 물었다. ‘내가 있던 곳은 너무 추워서 아이스크림을 먹어본 적이 없어…’라고 동북 유학생은 답했다.
집에 와서 옷에 밴 훠궈 냄새를 빼는 일은 꽤나 골치 아픈 일이다. 매번 빨지 못해 외식만 하고 오면 향수와 섬유탈취제로 옷을 절여놓던, 동북 유학생으로 살던 때가 기억이 난다.
다 흘려버린 아이스크림 같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여름 그 맛. 냄새든 맛이든 꽤 깊이 밴 것 같다. 이제는 멀미가 안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