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미래에 가장 먼저 사라질 능력을 가르치는가?

입시지옥과 사교육 병폐를 끝낼 'KBP 의무화' 혁명(2)

by 아하

입시지옥과 사교육 병폐를 끝낼 'KBP 의무화' 혁명 (2부)


어느 이과생의 ‘이상한’ 시간표


고등학교 2학년 민준이는 ‘코딩 천재’로 불립니다. 장래 희망은 당연히 AI 개발자입니다. 그런데 민준이의 수능 탐구 과목 시간표는 조금 이상합니다. AI 개발의 기초가 되는 물리나 화학 대신, ‘세계지리’와 ‘동아시아사’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저도 물리랑 화학 공부하고 싶죠. 제 꿈이랑 직결되는 과목이잖아요. 그런데 입시 컨설팅을 받아보니, 지금 수능 시스템에서는 과학탐구를 선택하는 게 불리하대요. 의대 가려는 최상위권 학생들이 과학탐구에 몰려 있어서, 만점을 받아도 표준점수가 생각보다 낮게 나온다고요. 차라리 사회탐구를 선택해서 높은 표준점수를 받은 뒤, 그 점수로 원하는 대학의 컴퓨터공학과에 지원하는 게 ‘전략적으로’ 훨씬 유리하다고 하셨어요.”


민준이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합니다.


“미래의 AI 전문가가 되기 위해, 지금은 동아시아의 역사를 외워야 하는 상황이라니… 좀 황당하죠? 이건 공부가 아니라 ‘입시 게임’ 같아요.”


미래 인재를 처벌하는 입시의 자기모순: ‘사탐 런’과 ‘확통 런’


민준이의 이야기는 2028학년도 대입 개편 이전에 우리 입시 제도가 얼마나 심각한 자기모순에 빠져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국가의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과학과 수학을 깊이 공부한 학생이 오히려 불이익을 받는 이상한 시스템. 그 모순은 ‘사탐 런(Run)’과 ‘확통 런(Run)’이라는 기이한 현상으로 폭발했습니다.


‘사탐 런’은 말 그대로 이과 성향의 학생들이 더 높은 수능 점수를 받기 위해 과학탐구(과탐)를 버리고 사회탐구(사탐)로 ‘달려간다(Run)’는 의미의 신조어입니다. 실제 데이터를 보면 이 현상은 더욱 명확해집니다. 2026학년도 수능을 기준으로, 과탐 선택자의 비율이 1년 만에 약 9% p 감소하는 동안, 사탐 선택자는 정확히 약 9% p 증가했습니다. 이과를 지망하는 수많은 민준이들이 과학을 포기하고 역사와 지리책을 편 것입니다.


수학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AI와 데이터 과학의 심장과도 같은 심화 수학 과목 ‘미적분’ 대신, 상대적으로 배우기 쉽고 점수받기 좋다고 알려진 ‘확률과 통계’로 학생들이 몰려가는 ‘확통 런’ 현상입니다. 1년 사이 ‘미적분’ 선택자는 약 9% p나 급감했고, 그만큼 ‘확률과 통계’ 선택자가 늘었습니다.


점수 계산의 함정: ‘표준점수’는 왜 이런 비극을 낳았나?


똑같이 100점 만점을 받았는데, 왜 누구는 더 유리하고 누구는 불리해지는 걸까요? 범인은 바로 수능의 ‘표준점수’ 산출 방식에 있습니다.


수능 성적표에 나오는 표준점수는 단순히 맞힌 개수(원점수)로 계산되지 않습니다. 내가 선택한 과목에 응시한 다른 학생들의 평균 점수를 함께 고려해서, 전체에서 나의 상대적인 위치를 알려주는 점수입니다.


조금 더 쉽게 비유해 볼까요? 여기 ‘전국 팔씨름 대회’가 있습니다. A조에는 강호동, 마동석 같은 우승 후보들이 전부 몰려있습니다. 여기서 4강에만 올라도 엄청난 실력자입니다.

B조에는 일반 학생들이 대부분입니다. 여기서 우승하는 것은 A조에서 4강에 드는 것보다 훨씬 쉽습니다.


수능의 ‘표준점수’는 이 대회의 ‘랭킹 포인트’와 같습니다. A조(예: 물리Ⅱ)처럼 고수들이 득실거리는 과목에서는 만점을 받아도 높은 랭킹 포인트를 얻기 어렵습니다. 평균 점수 자체가 높기 때문이죠. 반면 B조(예: 사회탐구 과목)처럼 응시자 집단이 다양하고 평균이 낮은 과목에서는, 만점을 받으면 엄청나게 높은 랭킹 포인트를 받을 수 있습니다.


결국 학생들은 자신의 꿈이나 학문적 흥미와는 상관없이, 단 1점의 ‘랭킹 포인트’라도 더 얻기 위해 과학 대신 사회를, ‘미적분’ 대신 ‘확률과 통계’를 선택하는 ‘전략적 도피’를 감행한 것입니다. 심지어 최상위권 의대를 지망하는 학생들조차 과탐 가산점을 포기하고 사탐을 선택해 더 높은 표준점수를 확보하는 기현상까지 벌어졌습니다. 입시 제도가 아이들에게 ‘미래에 필요한 공부를 하라’는 신호 대신, ‘제도의 허점을 파고들어 점수만 높이라’는 잘못된 신호를 보낸 셈입니다.


‘공정성’의 역설이 만든 비극


어쩌다 우리 교육이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걸까요? 아이러니하게도, 그 배경에는 ‘공정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뜨거운 열망이 있습니다.


과거 ‘조국 사태’ 등을 겪으며 학생부종합전형 같은 주관적인 평가에 대한 사회적 불신이 커졌습니다. 그 결과,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단 하나의 객관적인 잣대, 즉 ‘수능 점수’로 모든 것을 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습니다. ‘공정성 강화’라는 이름 아래 입시 제도는 다시 수능 중심으로 되돌아갔습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공정성의 역설’이 발생했습니다. 채점 과정이 투명하고 결과가 객관적이라는 ‘절차적 공정성’에만 집착한 나머지, 미래에 필요한 공부를 하는 학생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더 큰 ‘교육적 불공정’을 외면하게 된 것입니다.


5지선다형 객관식 시험인 수능은 학생의 창의력이나 깊이 있는 사고력을 측정하기 어렵습니다. 정해진 답을 빠르고 정확하게 찾는 능력을 평가할 뿐이죠. 이런 평가 방식은 1부에서 말씀드린 ‘누테 학원’처럼 주입식·암기식 사교육을 키우는 자양분이 됩니다. 결국 ‘공정성’이라는 이름으로 강화된 수능 체제가, 오히려 사교육을 부추기고 미래 인재의 역량을 깎아 먹는 자기모순에 빠진 것입니다.


미래를 저당 잡힌 교실


‘사탐 런’과 ‘확통 런’은 단순히 몇몇 학생의 선택과목 문제를 넘어, 대한민국 교육 시스템 전체가 고장 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위험 신호입니다. 이는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이공계 인재의 기반을 우리 스스로 허물고, 아이들에게는 학문적 즐거움 대신 ‘입시 기술자’로 살아남으라고 강요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는 1부에서 지적한 ‘의대 쏠림’ 현상과 맞물려 국가적 위기를 더욱 깊게 만듭니다. 이공계는 직업이 불안정하고 대우도 좋지 않다는 인식이 팽배한데, 입시 제도마저 이공계 공부에 불이익을 주니 누가 선뜻 그 길을 가려고 할까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자연계열에 합격하고도 등록을 포기한 채 의대로 향하는 학생들의 행렬은, AI 기술 패권 경쟁 시대에 우리 교육이 국가 경쟁력의 발목을 잡고 있음을 보여주는 부끄러운 자화상입니다.


결론적으로, 2028년 개편 이전의 입시 제도는 미래 인재를 키우기는커녕, 오히려 미래에 필요한 역량을 갖추려는 학생들을 ‘처벌’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2028 대입 개편안은 이 총체적 난국을 해결할 근본적인 전환점이 될 수 있을까요?


다음 3부에서는 이 개편안이 과연 희망이 될 수 있을지, 아니면 또 다른 문제를 낳는 미완의 대책에 그칠 것인지를 심층적으로 분석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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