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지옥과 사교육 병폐를 끝낼 'KBP 의무화' 혁명(6)
지금까지 우리의 교육 개혁 논의가 주로 ‘어떻게 하면 더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학생들을 한 줄로 세울 것인가’라는 기술적인 문제에 머물렀다면, 이번 6부에서 살펴볼 프랑스와 독일의 사례는 우리에게 교육의 본질 자체를 묻습니다.
프랑스의 ‘바칼로레아’와 독일의 ‘아비투어’. 2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이 두 시험은 ‘과연 대학생이 될 자격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철학적 성찰의 결과물입니다. 이들은 단순히 지식을 많이 외운 학생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논리적으로 표현할 줄 아는 학생을 미래의 지성인으로 인정합니다. AI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이들 역시 디지털로의 전환을 서두르고 있지만, 그 변화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교육 철학의 단단한 땅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1808년 나폴레옹 시대에 시작된 바칼로레아의 가장 큰 특징은 객관식 문제가 단 하나도 없다는 점입니다. 모든 과목이 주관식 논술형으로 출제되며, 특히 모든 학생이 계열과 상관없이 ‘철학’ 시험을 반드시 치러야 합니다.
실제 바칼로레아 철학 시험 문제들
- “예술 작품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는가?”
- “국가는 각자의 행복을 책임져야 하는가?”
- “과거를 안다는 것은 미래를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
정답이 없는 이 질문들에 대해 학생들은 몇 시간에 걸쳐 자신만의 논리를 글로 펼쳐내야 합니다. 프랑스 교육은 지식의 양보다 ‘사유하는 능력’ 그 자체를 핵심 역량으로 보는 것입니다.
바칼로레아는 20점 만점에 10점만 넘으면 합격하는 절대평가 방식의 ‘자격고사’입니다. 합격률이 80%를 훌쩍 넘는다는 사실은, 이 시험의 목적이 소수의 1등을 뽑아내는 경쟁이 아니라, 다수의 시민에게 고등 교육의 문을 열어주는 데 있음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최근 프랑스는 이런 전통 위에서 AI 시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문·이과 계열을 폐지하고, 일회성 시험 성적(60%)과 3년간의 학교생활 과정 평가(40%)를 합산하는 ‘신(新) 바칼로레아’를 도입했습니다. 하지만 일회성 시험의 압박이 내신 관리의 압박으로 바뀌고, 교사별 평가의 공정성 논란이 이는 등 상당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평가의 틀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사회적 합의 과정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독일의 아비투어는 ‘전인적 도야(Bildung)’, 즉 ‘온전한 인간으로의 성장’을 돕는다는 19세기 교육 철학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대학 교육의 목표는 특정 직업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 이성을 갖춘 성숙한 인간을 길러내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아비투어 역시 모든 과목이 논술형이며, 이 시험을 통과하면 원칙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에 진학할 자격이 주어집니다. 대학이 학생을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자신의 학문적 길을 ‘선택’한다는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인문주의 전통의 독일 역시 AI 시대를 맞아 ‘디지털 협약 학교’라는 이름 아래, 약 9조 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전국 학교에 디지털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팬데믹을 거치며 드러난 디지털 교육의 심각한 격차를 해소하려는 국가적 의지입니다.
하지만 독일 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는 나옵니다. 막대한 돈이 태블릿 PC 같은 하드웨어를 사는 데만 쓰이고, 정작 그 기술로 수업을 혁신할 교사 교육이나 콘텐츠 개발은 더디다는 것입니다. 이는 ‘학교의 디지털화’가 곧 ‘교육의 디지털 전환’은 아님을 보여주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프랑스와 독일의 사례는 AI 시대의 교육 개혁이 단순히 코딩 교육을 추가하고 태블릿 PC를 나눠주는 기술 도입만으로 완성될 수 없음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이들은 새로운 디지털 도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 도구를 활용해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윤리적으로 판단하며, 책임감 있는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돕는다는 교육의 근본 철학을 굳게 지키고 있습니다.
이는 5지선다형 객관식 시험이라는 틀에 갇혀 효율성과 객관성만을 좇아온 우리 교육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의 수능은 학생들을 한 줄로 세우는 데는 매우 효율적인 도구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아이들이 스스로 질문하고, 자신만의 답을 만들고, 정답 없는 문제에 도전할 기회를 빼앗고 있지는 않을까요?
AI가 정답을 찾는 일은 인간보다 훨씬 더 잘하게 될 미래에, 우리 교육은 왜 여전히 ‘정답 찾기 훈련’에만 매몰되어 있는가? 이제는 교육의 패러다임 자체를 되돌아볼 때입니다.